한국장학재단 홍보대사

요즘 취업난으로 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다. 취업을 위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에만 몰두하다 보면 자칫 인적 네트워크가 단절되기 쉽다. 그러나 한국장학재단 홍보대사로 활동하면 전국 대학생들과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활발한 교류가 가능하다. 또한 장학금 제도를 널리 알려서 주변 친구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 주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새해부터 새롭게 활동할 홍보대사에 주목해보자.

▲ 지난 9월에 선발된 7기 홍보대사들이 2016년 한해 새롭게 활동할 예정이다.
▲ 지난 9월에 선발된 7기 홍보대사들이 2016년 한해 새롭게 활동할 예정이다.
2009년, 한국장학재단이 설립되면서부터 ‘장학앰배서더’로 선발된 학생들이 매년 학자금지원사업을 함께 홍보해왔다. 2015년 1월부터 활동한 6기부터는 명칭이 ‘장학앰배서더’에서 ‘한국장학재단 대학생 홍보대사’로 바뀌었으며, 올해는 7기가 활동할 예정이다.
현재는 약 350명의 홍보대사들이 30개 팀으로 구성되어, 전국 각지에서 현장밀착 홍보활동을 펼침으로써 장학 사업을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홍보뿐만 아니라 봉사활동까지
한국장학재단 홍보대사로 선발되면 1년 동안 국가장학금, 학자금대출 등 정부학자금 지원제도를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 중에 정부지원 장학제도, 학자금 지원제도, 인재육성제도 등을 알지 못하여 지원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대학 캠퍼스는 물론 학부모 등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도 다양한 현장 홍보를 진행한다. 또한, 학자금 관련 포스터 모델로도 활약하며 각 대학에 국가장학금, 학자금대출을 알리기도 한다.

홍보대사들이 온·오프라인에서 제작한 다양한 콘텐츠는 홍보대사 공식 커뮤니티 상에서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으며, 재단공식채널 SNS를 통해서도 전파되고 있다.
시기에 따라 대외적으로 사회봉사도 주도한다. 최근에는 ‘사랑의 연탄 나눔봉사’ ‘김장 나눔 봉사’ 등을 실시했고, 향후에는 자선냄비 행사도 펼칠 예정이다.

 
 
 
 
자율적으로 활동하고, 혜택도 받고
홍보대사의 활동은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에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지만, 홍보대사가 계획→실행→결과물을 얻기까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직접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홍보대사들은 저마다 역량이 강화되고 자긍심이 고취된다.
연간 활동 시, 소정의 활동비와 홍보활동을 위한 홍보용품 및 디지털 기기 등을 지원해 준다. 활동을 시작할 때는 한국장학재단 이사장 명의의 임명장이 수여되고, 활동 우수지역 팀을 선발하여 이듬해 무료로 해외 봉사활동 특전을 제공한다.

선발과정의 기준은 인성과 자질

홍보대사 선발은 총 2단계로 진행된다.
1단계(서류전형): 지원서의 충실도, 지원동기 등으로 기본적인 인성에 대해 평가한다.
2단계(면접전형): 지원서 내용을 포함한 지원자의 자질 검증 과정으로, 책임감과 적극성 등을 평가한다.

 
 
독거노인과 저소득 가정을 위한 연탄 나눔 봉사활동
지난 11월 21일, 한국장학재단 홍보대사와 대구·경북지역 대학생 100명이 대구 고성동에서 ‘사랑의 연탄 나눔’봉사활동을 했다. 이들은 겨울을 맞이하여 직접 모금한 성금으로 연탄을 구매해 독거노인과 저소득 가정 열 곳에 3천 장의 연탄을 나누어주었다.
봉사활동 현장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한 학생들의 뜨거운 열정이 가득했다. 봉사에 참여한 홍보대사들은 “도움을 받아 감사해하는 이웃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홀로 지내시는 분들을 위해 따뜻한 마음으로 뜻 깊은 봉사활동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전했다.

 
 
소심했던 내가 담대해지다
박창욱(경일대학교 기계공학과 3학년, 홍보대사 6기)
2015년 한 해, 나는 6기 한국장학재단 홍보대사로서 학교에 찾아가 장학사업 소개도 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장소나 지역 축제에 참여해 홍보하는 일을 했다.
뿐만 아니라, 봉사활동, 학생캠프 등의 활동도 자율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1박 2일간의 대학생 리더십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친친캠프를 열기 위해 기획하고 준비했던 6개월의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친친캠프에는 대구·경북지역 학생 60명이 참여했다. 1~2학년을 멘티로 받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이야기하며 팀원을 이끌어가는 법, 대학생활 정보나 노하우 등을 가르쳐주었다. 처음으로 진행하는 캠프다 보니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많은 학생들이 “다음에 또 참여하고 싶다”고 하여 현재 2회 친친캠프를 준비하고 있다.

나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려했는데, 홍보대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서야할 때가 많았다. 서서히 자신감이 생겼고, 떨림 없이 나의 의견을 말하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배운 마음가짐과 말하는 태도는 취업면접에서 합격하는 데 있어서도 큰 몫을 했다. 홍보대사들과 함께 활동하기에 힘들고 고민이 될 때, 내가 의지하고, 내게 조언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의 가장 큰 자산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최근 나는 기계 관련 회사에 취업했다. 언젠가는 한국장학재단에 입사해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홍보대사들을 이끌어주고 싶다.


우리는 이미 ‘하나’된 청춘들이다
글 | 김정은(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

최근 통일에 대해 관심이 생기면서 어떻게 하면 남한과 북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이룰 수 있을지 고민했다. 나는 그 고민을 통해, 통일을 준비하고 해결해가는 국민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미래통일리더 아카데미’를 알게 되었다. 북한에서 건너와 남한에 정착한 새터민 학생과 남한 학생이 1년간 팀을 이루어 통일과제를 연구하는 모임인데, 프로그램 안내문을 읽던 중 ‘탈북 대학생’이라는 키워드를 보면서 내 또래 중에도 탈북민이 있고 그 친구들이 우리처럼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멀게만 느껴졌던 탈북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래통일리더 아카데미에 지원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 된 우리
발대식이 있던 날, 처음 탈북민을 가까이 마주하는 터라 몹시 긴장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탈북민의 모습은 딱 봐도 우리와는 무언가 다를 것 같았다. 스타일과 말투도 다르고, 성격도 드세서 조심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눈앞에 직접 마주한 탈북민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세련된 옷을 입고, 먼저 다가와주기도 하고, 배려할 줄도 알았다. 부끄럽지만 내가 우리 조의 탈북민 언니를 만나 처음으로 했던 말이 “어머, 북한사람 맞아요?”였다. 그날 이후 언니와 더욱 친해지고, 또 다른 탈북 대학생들과 인사하면서 느꼈던 것역시 ‘우리와 다를 바가 없구나’였다. 우리는 똑같이 연예인을 좋아하고, 취업 걱정을 하고, 웃음코드 또한 비슷해 함께하는 동안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단국대 국제 학생회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전주한옥마을 투어를하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했다.
단국대 국제 학생회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전주한옥마을 투어를하며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했다.
그날 처음으로 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통일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우리 조가 앞으로 무엇을 해나가야할 것인지를 계획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담아내어 대학생의 통일인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팀의 목표로 세웠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팀 내의 통일이 먼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남한 대학생 3명과 탈북 대학생 2명이 만나 한 팀을 이루었지만 하나가 되지 못하고, 서로가 잘 알지 못하는 점들도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함께할 여정 중, 전반기에는 ‘우리 안의 통일’을 이루는 것에 주력하고, 후반기에는 우리가 전반기에 이룬 통일을 토대로 ‘우리가 앞으로 이뤄나가는 통일’을 계획했다.

고등학교 동창과 내일로 여행을 하던중, 부산의 야경을 감상하며.
고등학교 동창과 내일로 여행을 하던중, 부산의 야경을 감상하며.
전반기에는 먼저 6.25전쟁을 기념하여 전쟁기념관을 방문했다. 전쟁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한 동영상과 구조물, 전시품들을 보면서 우리는 참혹함과 아픔 그리고 고통스러움을 느꼈다. ‘이 전쟁은 누구의 잘못으로 일어났나? 남한만이 피해자일까?’를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며 적개심을 두지 않았다. 어둠의 역사를 회상하며 하나였던 우리가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던 잔인한 역사를 똑같이 가슴 아파했다.

7월에는 ‘제주 4.3 평화 기념관’에 찾아갔다. 4.3사건은 남북분단을 막고자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참혹한 사건이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기 위해 벌였던 운동이 당시의 정치상황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무차별적으로 진압 당하였다. 그 피해가 6.25전쟁 이후까지 이어지면서 수많은 제주도민이 대량학살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둘로 나누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 짓밟히는 것을 보며 우리는 똑같이 참담해하였다. 유일하게 남한정부 수립선거가 무효화되었던 곳 제주도를 둘러보며 남한과 북한이 나누어지기 전 하나였던 한국을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인 나라를 잃지 않기 위해 고고히 타올랐던 제주도민의 희생을 우리는 한마음으로 추모하였다.

마지막으로 북한의 현실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던 ‘크로싱회담’이 떠오른다. 먼저 북한의 현실을 다룬 영화 ‘크로싱’을 관람하고 탈북 학생들을 초청하여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북한에서 지내온 생활과 탈북했던 과정 그리고 남한에서의 생활에 대해 들었다. 그들은 자신이 겪어온 모든 것들을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이야기 속에는 북한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도 있지만, 탈북하는 과정에서 브로커에게 큰일을 당할 뻔하기도 하는 등 생과 사의 갈림길을 오간 사연도 있었다.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털어놓아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이렇게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곳이 없었겠구나’ 싶어 안타까웠다. 그들은 이미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우리는 관심도 없고 이야기를 들을 열린 자세를 지니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가 하나임을 느꼈다.

 
 
우리 손으로 이루어 가는 통일
어느덧 이 활동을 마쳐야 할 시점이 왔다. 그동안 탈북민 친구들과 함께하면서 느꼈던 점은, 우리는 이미 ‘하나’라는 사실이다.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북한과 탈북민은 나와는 다른 그저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렇기에 서로 안아줄 수 없는, 가깝고도 먼 이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통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많은 차이점을 어떻게 감당하겠어? 그들은 우리와 너무도 달라’라며 말이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만나고 느낀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또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리는 청춘들이었다.

이런 깨달음을 토대로 우리 조는 후반기 활동인 ‘우리가 이뤄나가는 통일’ 과제를 위해 SNS에 일간게시물을 올리고 있다. ‘전라남도 진돗개와 양강도 풍산개 비교’ ‘대한민국 국기와 북한 국기’ ‘북한 대학생활 탐구’ 등 우리와 다를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알고 보면 우리와 하나인 북한의 모습들에 대해서 게시물로 올리고, 북한의 일상모습들을 연구해 홍보도 한다.

우리는 지난 역사 속에서 떨어져 있던 시간보다 하나였던 시간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한민족이다. 혹자는 ‘탈북민을 외국인이라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그들을 외국인이라 부르기에는 우리의 정신이나 성향이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떨어져 지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다른 환경에서 자라며 다른 옷을 입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겉옷에 불과하다. 쉽게 벗을 수 있는 겉옷을 던져버리고 바라본 우리의 모습은 ‘하나’이다. 통일은 더 이상 뜬구름이 아니다. 우리가 당면해야 할 밝은 미래이며 다시 이루어야 할 하나의 ‘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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