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록 김포시장
김포 가는 길
유영록 시장을 만나기 위해 차에 올라타고 양재동 사무실을 출발해 김포시청으로 향했다. 며칠 전 김포시청 홈페이지를 꼼꼼히 훑어보며 어느 정도 사전조사를 마쳤지만, 그래도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아닌가. 한 도시의 변화를 체감하려면 직접 그 도시를 둘러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다. 남부순환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왼편으로 김포공항이 보였다. 지금이야 행정구역상 서울 강서구에 위치해 있지만, ‘김포’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개항 당시에는 엄연히 김포군에 속해 있었다. 김포에서 비행기를 타면 중국이나 일본까지 2시간 안에 갈 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 서해가 만나는 지리적 특성상 먼 삼국시대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시내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아파트 단지였다. 지난 2003년 20만 3천여 명이던 김포 인구는 2013년 31만 2천여 명으로 53.5% 증가했다. 전국 도시들 가운데 단연 인구증가율 1위다. 도시계획에 따르면 2020년 무렵에는 60만까지 증가할 전망이라니, 앞으로 김포가 얼마나 더 크게 발전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밖에도 김포시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키워드는 많다. 하수종말처리장 위에 정원과 체육시설을 건립한 친환경도시, 그리고 2017년까지 2천여 개의 기업체가 입주하는 첨단산업도시 등. 문득 유영록 시장은 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김포를 어떤 리더십으로 이끌어가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약속시간이 되어 비서의 안내를 받아 시장실로 들어선 순간 펼쳐진 뜻밖의 광경에 기자는 ‘아!’ 하고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지방자치단체나 기관장들 스케줄의 절반 이상은 사람을 만나는 일로 채워진다. 언제 손님이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집무실은 대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하지만 유 시장의 집무실은 약간 달랐다. 기자가 앉은 테이블과 소파는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는 커다란 도시개발계획도를 비롯해 각종 필기구, 보고서, 참고문헌 등이 잔뜩 쌓여 있었다. 뭔가를 열심히 적은 메모장도 보였다. 행정가의 방이라기보다는 디자이너의 작업실을 방불케 했다. 어쩌면 기자가 찾아오기 전까지 아마도 김포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던건 아닐까.
“대규모 사업일수록 비용도 비용이지만,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얽혀 있습니다. 특히 도시철도 공사는 발파작업을 하다보니 소음 때문에 민원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렇다고 공사기간을 늦추면 다른 시민들의 불편함이 커질 테고 안전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김포는 시민들의 것인 만큼 시민 한 분 한 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설득하며 양해를 구하는 것 외에 특별한 비결은 없습니다.”
부족함을 알기에 매일 현장에서 문제와 답을 찾는다
“현장을 무시하면 안 되지 말입니다.” 드라마 <미생>에 나오는 대사다. 세상에 이론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다. 현장으로 달려가야 문제를 100% 정확히 파악할 수 있고 그래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유시장의 지론이다. 그래서 그는 ‘산은 너무 높이 있고, 황제는 너무 멀리 있다’는 러시아 속담을 자주 인용한다. 황제가 궁궐 안에서만 지내서는 민심을 알 수 없듯, 시장도 시청을 나와 시민들의 삶 속으로 들어 가야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에 걸맞은 시정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리더십을 가장 쉽게 파악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의 관용차 트렁크를 열어보면 된다. 그 안에는 다른 차에서는 흔히 볼수 없는 것들이 세 가지나 있다. 첫째, 낫과 칼이다. 김포는 아파트가 워낙 많이 들어서다 보니 곳곳에 분양을 광고하는 현수막이 달려 도시의 미관을 해치고 있다. 차를 타고 가던 중 현수막이 눈에 띄면 유 시장은 바로 차에서 내려 현수막을 제거한다.
때 활용한 것이 굴렁쇠다. 이 굴렁쇠에는 줄자가 달려 있어 굴리면서 가면 이동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다. 그는 아침 6시에 집을 나와 버스노선을 따라 굴렁쇠를 굴리고 다니면서 보다 많은 시민들이 손쉽게 버스를 탈 수 있는 정거장 위치를 연구했다.
“굴렁쇠를 굴리고 다닌 것은 단순히 거리를 측정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직접 민원현장을 찾아시민들과 대화하며 불편사항을 접수하고, 거기서 나온 의견을 시정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많이 걷는 동안 건강도 훨씬 좋아졌고요. 시민을 위해 일하다 보니 결국 저도 행복해진 것이죠.”
“좋은 정책을 대중화시키려면 아이디어를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고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시장인 제가 말만 아니라 행동, 나아가 생각까지 일치해야 시민들의 삶이 윤택해지지 않을까요?”
그가 지난 2014년 발간한 자서전 <문제도 답도 현장에 있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시장에게는 현장을 손바닥처럼 꿰뚫어 보는 부지런함, 100년 뒤를 내다보는 혜안,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와 따뜻한 인격이 필요하다. 나 또한 이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스스로 나의 부족함을 알기에 매일 현장에 나가 문제와 답을 찾는 것이다.’
김포시청은 공무원 수만 1,400명이나 되는, 구성원 수로는 김포에서 가장 큰 조직이다. 민선 5기 시장으로 어느덧 두 번째 임기를 거치면서 공무원들 역시 그가 제시하는 정책방향과 의중을 잘 읽고 업무를 처리하고 있지만, 1,400명의 공무원이 36만 시민의 고충을 일일이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김포가 발전하려면 뛰어난 행정가 한 사람의 역량보다는 시민 모두의 자발적 참여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그는 시에서 추진하는 각종 환경미화 사업에도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포사랑 벽화 그리기 사업이다. 김포시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유영록 시장의 눈에 북변터널, 김포향교, 김포초등학교의 벽이 심하게 훼손된 것이 들어왔다. ‘여기에 벽화를 그리면 주변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사람들에게도 좋은 볼거리가 되겠다!’ 그는 벽화 그리기 작업에 미술가들 외에 지역주민들을 공공근로 사업으로 참여시켰다. 시민들도 벽화 그리기를 단순히 급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는 동네를 내 손으로 아름답게 바꾸는 일’로 여기고 열성적으로 작업에 참여했다는 후문이다.
유영록 시장이 대학을 졸업한 1988년은 우리나라가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치르면서 경제적으로 빠른 성장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대학만 졸업하면 얼마든지 좋은 직장을 골라 갈 수 있었지만, 그는 고향으로 내려왔다. 뜻이 맞는 선후배들과 ‘김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결성하고,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독서실을 열었다.
그의 정치인생에서 늘 평탄한 길만 있었던 건 아니다. 1998년과 2002년 연이어 경기도의회 의원에 당선되며 정보화위원회 위원, 예산결산특별위원회 간사 등을 거쳤지만, 2004년 국회의원 선거와 2006년 시장 선거에서는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생각하면 그 두 번의 실패가 오히려 고마운 존재라고 말한다.
“역경이 축복이 되느냐, 절망이 되느냐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번의 낙선을 계기로 시민들 가까이에 다가가 그 눈물 섞인 하소연과 버거운 삶의 짐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 앞에서 좌절하고 무릎 꿇어야 할 게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는 걸 배운 것이죠.”
김포시가 빠르게 발전할수록 그의 삶은 더욱 더 바빠지고 있다. ‘내 시간을 갖는 것이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가 이처럼 바쁜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기자가 보기에 그 힘은 ‘가족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아버지다. 6.25 참전 장교였던 아버지는 폐허가 된 고향을 재건하기 위해 김포에서는 처음으로 신용협동조합을 열고 비닐하우스 농법을 도입한 지혜로운 농부였다. 땀 흘려 일하는 가치를 일깨워준 이도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가 태어나 살아온, 그리고 물려준 땅 김포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으랴.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로 가꾸어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일념으로 그는 행복한 김포를 건설하기 위해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