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희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학교와 집에서도 항상 혼자였다는 대학생 박동희 씨. 그런데 지난 5월 한 달, 놀랍게도 그는 교생선생님이 되어 20~30명 학생들 앞에서 수업도 하고, 틈틈이 학생들에게 상담도 해주었다. 사람을 멀리하던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고자 한다니. 과연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내가 인터뷰를 하려고 만나본 인물들 중에서 말이 적고 조용한 사람에 속한다. 그런데 그는 현재 자신의 언변은 예전에 비해 대단한 변화라고 부연설명을 해준다. 사실, 이전의 모습을 모르는 나로서는 지금도 여느 사람들보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올 봄에, 그가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그의 별명은 ‘수다쟁이 교생쌤’이었단다. 쉬는 시간, 청소 시간 등 틈만 나면 교실에 있는 학생들을 찾아가 말을 걸며, 사소한 이야기라도 들어주고 상담도 해주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데... 원래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그가 이렇게 딴사람처럼 변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말 없던 나, 말 많은 교생선생님 되다
“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인구 많은 인도로 해외봉사를 가서 1년 간 생활하면서 성격이 많이 바뀌었어요. 난생 처음 사람들과 더불어 지내며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를 알게 되었지요. 예전의 저처럼 외톨박이 학생들을 앞으로 만나 제가 경험한 더 넓은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교사가 되고 싶어요.”
인도 오리사에서 해외봉사를 하는 동안 교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고, 이를 위해 귀국 후 사범대 역사교육과로 편입을 준비했다. 학점이 3.4로 그리 좋은 성적은 아니었던 그가 면접을 보았는데, 교수님이 그에게 편입하려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질문하셨다. 주저 없이 그는 해외봉사를 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를 했고, 교수님은 그의 진솔함에 푹 빠져들었다고 한다. 교수님의 마음을 울린 그는 편입 면접에서 합격했고, 어느새 4학년이 되어 교생실습을 다녀왔다. 실습 나갔을 때, 처음에는 학생들 앞에 서는 것이 어색했지만, 먼저 학생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틈틈이 학생들을 찾아가 대화했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학생,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는 학생들을 만나 상담도 했다. 자신이 바뀌었듯 그들도 바뀔 것을 기대하며....
“소위 문제아라고 불리는, 학습부진 상태의 한 학생을 만났어요. 저를 경계하고 경직되어 있더군요. 제가 먼저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던 저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 들려주었어요. 제가 살아왔던 과정이 자신과 똑같으니까 이야기를 잘 듣고 자기 사정도 서슴없이 말했어요. 공부가 싫고 놀고만 싶다던 그가 경호원이 되고 싶다 길래, 체구도 건장하고 운동도 잘하는 그 학생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조언을 해주니, ‘다른 사람의 안전을 지켜주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겠다’며 경호원의 꿈을 갖게 됐어요.”
학생들과 함께 보낸 교생실습 한 달 동안 그는 학생들의 주 관심사였던 게임을 절제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고, 학업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마음관리법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 홀로 보낸 학창시절
그가 학생들을 자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 고 이끌어주는 데는 이유가 있다. 동희 씨 는 중고생 때 어두운 시절을 보냈는데, 지금은 학생들의 미래를 고민해주고 도움을 주는 교사를 꿈꾸는 멋진 청년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사실 중학생이 될 무렵의 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늘 홀로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외도를 하시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아지자, 자연스럽게 가정형편이 어려워졌고 어쩔 수 없이 어머니께서 일을 하러 나가셔야 했다. 부모님이 집에 안 계시니 그는 운동회나 졸업식에서도 항상 혼자였다.
“평범하지 않는 저희 가족사를 사람들이 알면 저를 안 좋은 시선으로 볼 것 같았어요. 사춘기 때라 더욱 친구들이 의식이 됐고, 친구들의 가정과 다른 우리 가정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 상황을 알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 서서히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 무렵부터 사람 만나는 걸 꺼렸던 그는 마치 히키코모리(‘틀어박히다’는 뜻의 일본어.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의미)처럼 지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았고, 집에 오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봤다. 그러다 다행히도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혼자 지내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어. 뭔가 새롭고 재미있는 일 없을까’
때마침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으로 인도에 다녀온 사촌 형으로부터 생생한 인도 체험기를 듣게 되었다.
“기차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 인도에서 가장 열악한 오리사에서 고생하고 배고팠던 이야기를 들었어요. 고생했던 이야기를 듣는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어떨지 궁금해졌고 너무 가보고 싶었죠. 어디 한번 ‘힘들어 보자’는 각오로 오리사로 떠났어요.”

 
 
함께하는 것, 이렇게 즐겁구나!
인도 땅에 발을 내딛은 순간, 정체 모를 냄새, 숨 막히는 더위, 길바닥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소. 그는 고티베라라는 시골 마을로 두 달간 무전여행을 갔다.
“제가 간 동네에는 화장실이 따로 없었어요.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물을 한 바가지 퍼서 산이나 들로 갔습니다. 정말 자연 그 자체인 편리(?)하고 마음에 드는 문화였죠. 제가 너무 잘 적응하니까 사람들이 저를 보고 현지인 같다고 하더군요. 그 곳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램프나 호롱불을 켜고 생활했어요. 흙집에 살면서 직접 키운 채소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장작 을 피워 요리했죠. 신기한 건 아무런 복지 혜택도 없이 어렵게 사는 그들이지만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있는 겁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기 가족도 제대로 먹이 지 못하면서 동희 씨에게 하루 세 끼 꼬박 챙겨주고, 끼니때마다 입맛에 맞는지 물어 보았다.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마을 분들은 그에게 화장실도 만들어주고, 새벽 일찍부터 우물에서 물도 떠다 주었다.
“영어도 못하시는 분들이 제가 하는 영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주시고 제게 온 신경을 다 써주시는데, ‘나였으면 이분들처럼 우리 집에 방문한 사람들을 대접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요. 전 못했을 거예요.”

 
 
하루하루 고티베라 마을 사람들과 지내면서 그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같이 더 있고 싶고, 좀 더 그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30Km 떨어진 옆 마을로 가는데, 바퀴에 펑크가 났다. 자전거를 질질 끌고 멀고도 험한 길을 가면서도 그들과 함께 걷고, 또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은 지독히도 가난한 삶을 살면서도 작은 것에 감사하고 웃을 줄 알았다. ‘와줘서 고마워, 잘 먹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그는 고티베라 마을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수 있는 여유로운 환경 속에 살았으면서도 늘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외톨박이 같던 그의 성격이 조금씩 활달해지더니 말도 많아졌다. 해외봉사를 마치고 1년 뒤 귀국했을 때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네가 정말 동희가 맞니?’ 하며 굉장히 놀라워했다. 떠나기 전과 정반대로 바뀐 아들을 본 어머니 또한 감격해했다.
햇볕을 받으면서 나무가 자라듯이, 인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의 마음이 여물고 성숙해졌다. 이처럼 그는 지금은 아무하고도 교류하지 않은 채 절망해 있는 학생이라도 사랑을 받으면 언젠가는 인생이 바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사랑을 한 학생에게라도 더 전해주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다가와주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피했던 동희 씨. 편입생인 그는 학과 학생들에 비해 나이가 많은 편이지만, 동생들이 “행님~” 하면서 먼저 다가와 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다. 인도 오지에서 만난 사람들, 교생실습을 하며 만난 학생들과 사귀고 대화하면서 서서히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느낄 줄 알게 된 것이다. 함께하는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것.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인 것 같다.

사진 | 배효지 기자 장소제공 | COFFEE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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