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 완전탐구 13회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송태진 씨는 굿뉴스코 출신으로 2008년에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봉사했다. 인터넷방송국에서 뉴스 팀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지난달 아프리카 케냐방송국으로 발령받아 최근 출국했다. 이번호에 부룬디에서 보낸 크리스마스의 추억을 끝으로 일 년간 연재했던 수기를 마친다.

아프리카의 크리스마스
12월 25일, 뜨거운 햇볕이 쨍쨍한 부룬디에서도 크리스마스는 돌아온다. 특별한 전통명절이 없기에 성탄절부터 이어지는 설날까지가 한해의 가장 큰 축제 기간이다. 사람들은 ‘노에리 은지자 차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인사하며 들뜬 분위기를 전달한다. 이윽고 크리스마스 주간이 되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덕담을 나누며 소박하게 한해를 마무리한다.

부룬디 IYF 교육원에서는 크리스마스 축제에 맞춰 특별한 행사를 계획했다. 무료교육 수업의 발표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연초부터 일 년 남짓 무료교실에서 공부해온 학생들은 그간 쌓아온 실력을 선보일 기회를 크게 반겼다. 행사 한 달 전부터 발표회준비가 시작되었고, 교사로 활동하는 굿뉴스코 단원들과 현지 봉사자들도 각자 담당한 수업의 학생들을 지도하느라 덩달아 바쁘게 움직였다.

작은 교육원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표준비에 열을 올리는 학생들로 붐볐다. 중국어 반 학생들은 가사가 죄다 틀린 등려군의 노래를 간드러지게 합창했고, 건너편에서는 영어 말하기 대회를 준비하는 연사들이 우렁차게 영어 연설을 외쳤다. 마당의 잔디밭에는 스트레칭을 마친 호리호리한 맨발의 젊은이들이 태권댄스와 호신술 시범 연습에 푹 빠져있었고, 교육원의 대부분을 점거한 수많은 꼬맹이들은 얼기설기 만든 연극 소품을 들고 사방에서 날뛰어 다녔다. 그 사이에서 나는 타잔과 모글리를 합쳐 놓은 듯한 요란한 아이들을 모아 차분하고 교훈 가득한 성탄절 연극을 가르쳐야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동시에 진행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어느 때보다 활기찬 시간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한번도 보지 못한 눈사람
이윽고 크리스마스 행사 날이 다가왔다. 전날 밤 늦게까지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꾸민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사람들을 맞이했다. 육각형 눈꽃 모양의 종이 모빌이 천장에 예쁘게 매달렸고, 아끼고 아껴 사용하던 한국에서 가져온 색색 풍선들도 곳곳에 붙였다. 작지만 반짝이는 크리스마스트리와 고구마 포대 자루를 하얗게 칠해 만든 눈사람은 특히 인기가 좋았다. 한 번도 눈을 본적 없는 부룬디의 아이들은 눈사람에 몰려들어 빙그르 둘러섰다.
“쏭, 이게 뭐에요?”
“이건 눈사람이야.”
“우와! 눈사람이래. 이거 정말 눈으로 만든 거예요?”
“아니, 부룬디에는 눈이 없어서 고구마 포대 자루로 만들었어.”
“그러면 진짜 눈도 포대자루처럼 생겼어요? 나도 눈을 보고 싶다.”
순수한 아이들은 못생긴 눈사람 인형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진짜 눈은 어떻게 생겼을지 자기들 나름대로의 추측 섞은 토론을 벌였다.

 
 
크리스마스 행사는 시종일관 웃음 가득하게 진행되었다. 청년부터 노인까지 참가한 영어 말하기 대회는 치열했고, 무료교실 학생들의 발표는 그들이 그간 얼마나 훌륭히 수업에 참여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어린이들의 귀여운 연극은 모두를 뒤집어지도록 웃게 만들었다. 첫 장면에서 아기예수를 출산하는 마리아가 해산의 고통 속에서도 감격에 젖은 신음을 흘려야 했지만, 마리아 역을 맡은 여자아이는 변비로 고생하는 증조할머니가 화장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듯 끙끙거리는 괴성을 질렀다.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져 나왔고 나름 진지해야할 성극은 시작부터 코미디가 되어 버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아이들은 열심히 연습한 것은 홀랑 까먹은 채 실수를 거듭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을 나무라거나 언짢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날은 크리스마스가 아닌가? 작은 실수쯤이야 얼마든지 웃어넘길 수 있었다. 천방지축 꼬마들은 큰 박수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무대를 내려왔다.

이별을 앞둔 우수에 찬 크리스마스
발표회에서 일어나는 난리법석을 보며 키득거리던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모습, 이 느낌, 이 행복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에 도착한 첫날부터 부룬디 사람들의 맑은 웃음은 뻣뻣하기만 했던 나에게 새로운 세상을 알려주었다. 내가 잘하든 못하든 ‘나’라는 사람 자체를 끝없이 사랑해주던 그들, 문제 앞에서도 언제나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늘 한 결 같이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던 부룬디 사람들. 그들 사이에서 나는 마치 사방에 가득 찬 황금빛 행복의 열매를 하나씩 따서 입 안에 넣어 오물거리고, 품속에 넣어 가지고 놀고, 머리에 베고 잠을 자는 것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이제 곧 나는 여기를 떠나야 했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고별 파티처럼 느껴졌다. 고작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 흐르면 더 이상 이들과 함께 웃을 수도 없고, 싸울 수도 없고, 미안해할 수도 없고, 고마워 할 수도 없고, 춤을 출 수도 없고, 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잡아당길 수도 없다.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다. 내가 한국에 돌아간다면 과연 이 모습, 이 느낌, 이 행복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따뜻한 관심에 둘러싸여 둥둥 떠다니는 그 기쁨에 젖을 수 있을까? 설령 다시 부룬디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을까?

 
 
해외봉사를 마치면 더 이상 이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생각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있도록 었다. 즐거운 축제는 계속 되었지만 그들의 웃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내 마음의 슬픔은 더욱 빠르게 자라났다.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모여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처럼 멋지게 옷을 빼입고 온 부룬디 친구들은 동공의 초점을 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내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했다. 나는 사진기 앞에서 밝게 웃을 자신이 없었다. 괜찮다고 거듭 사양했지만 그들은 깔깔거리며 재촉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사진 찍기 싫다고!”
놀란 친구들에게 황급히 사과를 하고 그들에게서 떨어졌다.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잡는 친구들을 멀찍이에서 바라보며 나는 우울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진을 찍고 싶지 않았다. 웃고 싶지도 않았다. 곧 잃어버릴 것이기에, 이제 다시는 내게 올 수 없는 것이기에, 떠난 후 그리워하게 될 좋은 추억들을 더 이상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까이 갔다가 자칫 그들이 가진 행복이 내게 묻을 것 같아 걱정됐다. 만약 그걸 지우지 못하면 떠나는 순간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이별 연습을 하듯 그냥 적당히 마지막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눈치 없는 바보들은 나를 가만 두지 않았다. 얼굴이 구겨진 채로 울먹이며 앉아있는 내게 와서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이 있는지, 자신들이 무슨 실수를 했는지 계속 물어보았다. 남자가 감성적일 때는 좀 가만둬도 될 법한데, 이들은 나를 혼자 두지 않았다. 외롭게 만들지 않았다. 끝까지 나를 위로해 주었다. 어린 아이를 달래듯 하는 그들 덕분에 모처럼 우수에 젖었던 나의 섬세한 감성은 한낱 징징거리는 응석으로 격하되었고,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 웃는 얼굴을 되찾을 수 있었다. 눈물은 말랐고 가슴은 뜨거웠다.

 
 
내 사랑, 부룬디여. 안녕히!
2009년 1월 1일.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11개월 동안의 부룬디 해외봉사를 마치고 한국을 향하는 길.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아쉬움에 매이지도 않았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며 밝게 웃었다.
비행기가 달린다. 하늘로 오른다. 저 멀리 창문 아래로 따닥따닥 붙은 따개비 양철집들과 초록빛 가득한 숲, 둥그런 언덕들이 보인다. 그리고 탕가니카 호수, 언제나 나에게 커다란 평안을 주었던 그 안식처에 작별 인사를 했다.
부룬디를 떠났다.
몸이 부룬디를 떠났다.
내 마음은 그곳에 두고 왔다.
언제든지 다시 돌아가서 그들을 만날 수 있도록 내 고향에 마음을 두고 왔다. 이별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다. 그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그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길을 찾아 짧은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마치고 아프리카에, 부룬디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내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다.
내 사랑하는 부룬디, 내게 행복을 알려준 이들이여. 안녕히!

 
 
 
 
 
 
컴퓨터 교실, 댄스공연, 무전여행…부룬디에서 보낸 1년은 행복으로 꽉꽉 채워진 시간이었다. 나는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늘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컴퓨터 교실, 댄스공연, 무전여행…부룬디에서 보낸 1년은 행복으로 꽉꽉 채워진 시간이었다. 나는 시커멓게 그을린 얼굴로 늘 행복을 감추지 못했다.
아프리카 방송국 PD가 되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아프리카를 위한 삶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여러 가지 길이 있었지만 그 중 방송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고, 7년이 흐른 2015년 10월부터 아프리카 케냐의 현지 TV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내가 부룬디 사람들에게 받은 행복을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생각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다.

 
 
해외봉사활동을 지원하는 많은 대학생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 해외봉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일이라는 것은 아무리 잘해봤자 자신만 우쭐해질 뿐이다. 일은 행복을 주지 못한다. 그런 건 한국에서도 할 수 있다. 해외봉사는 일이 아니다. 성과와 실적을 올려야 하는 냉혹한 세계가 아니다. 잘한 사람은 칭찬받고 못한 사람은 면책 받는 그런 것이 아니다. 치열한 경쟁을 해서 더 뛰어난 성과를 올려야 하는 업무가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느끼는 것, 그리고 누리는 것이다. 내게 펼쳐지는 새로운 오늘속에서 행복의 조건을 찾는 것이다. 잘 할필요 없다. 오히려 잘하는 것보다 부족함을 아는 것이 더 값지다. 실수하고 틀리는게 좋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껏 실패하고 마음껏 위로받고 마음껏 다시 도약한다. 절망에서 일어나는 법, 실패를 훌훌 털어버리는 법, 진심으로 위로받는 법을 배운다. 세상에는 나 혼자가 아닌 걸 깨닫는다. 눈앞의 어려움에 매이지 말고 기뻐하고 행복하고 사랑하라. 외국어 공부도 좋지만 그게 목적이 되면 편협해진다. 그냥 대화하라. 마음을 나눠라.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고 섞일수록 행복은 더욱 커진다.

해외 봉사-행복을 배운 시간
해외봉사는 행복을 연습하는 시간이다. 일 잘하는 연습 말고 행복해지는 연습이다. 일은 아무리 잘해도 피곤함만 얻게 된다. 일은 부수적인 것이다. 행복을 배우는 게 진짜다. 스스로 만들어낸 업무 속에 파묻혀 절망하는 당신 앞의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그들과 함께 행복 하라. 그 행복을 배우고 연습해서 자라게 하는 것이 해외봉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행복을 갖고 한국에 돌아와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아라.
수많은 굿뉴스코 해외봉사단 선배들은 말한다. ‘그곳에서 행복을 배워 왔다’고. 그 말은 추상적인 겉치레가 아니다. 사실이다. 당신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길 바란다.

 
 

송태진
그는 아프리카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꿈을 품은 맹랑한 공상가이다.
2012년 손정아와 결혼한 후, 현재 아프리카와 청소년을 위한방송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손정아
2007년 부르키나파소로 해외봉사를 다녀오며, 아프리카에서 얻은행복으로 살고 있다. 해외봉사로 맺은 인연을 따라 필자인 송태진과 결혼했다.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청소년들을 위한 따뜻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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