솟대문학 발행인 방귀희

세상의 편견을 멋지게 이기고 사는 사람이 있다. 지체장애 1급의 솟대문학 발행인 방귀희 씨가 그 주인공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일에 도전해온 그녀는 기회가 찾아올 때 즐겁고, 준비된 마음 가짐을 얻었다. 2016년에는 그녀처럼 마음 먹기를.

 
 
건강하고 예쁘게 성장해야 할 유아기에 ‘장애인’이라는 신체의 운명이 낙인찍힌다면, 그런 상황이 여러분 자신에게 펼쳐진다면 참담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방귀희 씨는 달랐다.
한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팔만 쓸 수 있게 된 그녀는 어린 시절 한창 뛰어놀며 개구쟁이처럼 골목을 누빌 나이에 집밖 출입이 쉽지 않았다. 부모님의 등에 업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감사가 컸다. 또래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이나 따돌림에도 상처를 받거나 원망 섞인 울음을 쏟아내기는커녕 씩씩하게 지냈다. 그녀가 불평하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고, 집에서 하루 종일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습니다.”

왕따를 당했지만 의연했다
해를 거듭하면서 소녀 방귀희는 뿌린 만큼 거둘 수 있고, 가장 정직하게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공부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온전히 할 수 있는 것도 공부밖에 없었다. 시험 때가 되면 은연중에 ‘왕따’를 시키던 아이들도 그녀의 자리에 바짝 붙어 노트를 빌리려고 친한 척을 하기도 했다.
공부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공부만 했지만 또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어머니의 훈계 때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각이 깨인 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딸이 인생을, 세상을 개척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한반(45명)에 20명이 겨우 대학에 입학하는 시절, 방귀희 씨 어머니는 딸에게 이야기했다.
“만약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그 돈을 네게 물려주면 나쁜 사람들이 빼앗아가기도 하겠지만, 네 머리속에 든 것은 아무도 훔쳐갈 수 없단다. 그래서 네 미래를 개척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대학에 보내려고 하는 것이란다.”
그렇게 젊은 날 그녀는 ‘무학여고 수석 입학, 동국대학 수석 졸업’이라는 이력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녀의 이력 뒤에는 장애인이라는 편견의 꼬리표가 달렸다.

벽은 높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
한의학과를 들어가고 싶었지만 장애인이라서 입학이 불가능했다. 동국대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하면서 박사 과정까지 밟고 싶었지만 박사 과정 시험만 여덟 번 낙방했다.

“더 공부할 수 있는 길이 없었어요. 다른 길을 찾아야 했고 아쉽지만 돌아서야만 했어요. 그리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호호호)”
그녀는 편견의 벽에 갇혀 어둡게 살지 않았다. 방송에서 장애인이라 죽고 싶을만큼 고통스럽지 않느냐고 질문하면, 그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고 사는 게 더 힘들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렇게 방송국과 연결됐고, 방송의 패널로 다니면서 방송이 무엇인지 접하게 됐다. 사람들의 묻는 말에 그녀는 항상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냈고, 때로 그녀의 좋은 기획이 채택되어 프로그램으로 방영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히 그녀의 몫이 될 순 없었다.
“당시 방송작가가 기획한 곳을 직접 다녀야 했어요. ‘암자를 찾아서’를 기획할 때도 기획 아이디어를 냈지만, 제가 갈 수 없는 곳이었어요. 그래도 다녀온 사람들이 제가 일러준 대로 비슷했다고 했었죠.(^^)”
작가를 꿈꿨지만 누구도 이력 없고 이름도 없는 그녀에게 방송작가 일을 맡기지 않았다.
“어느 날 휴지통에서 방송 멘트가 적힌 원고지를 주운 적이 있어요. 오프닝 멘트부터 방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다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그 종이에 적힌 대로 방송을 짜보는 연습을 했어요. 그리고 또 방송을 모니터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매인 작가가 펑크를 내는 일이 일어난 거예요. 프로그램 담당자에게서 30분 안에 작성이 가능한지 연락이 왔어요. 나는 ‘당연히 된다’고 했죠. 전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걸요.(호호)”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지난 31년간 방송작가로 활동을 해왔다.
내가 누군가와 동등하지 않는 입장에서,남들보다 부족한데 도전해야 한다고 느낄 때, 방귀희 씨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만약 장애인이라도 일반인과 똑같은 조건으로 직장 생활을 하고 싶어서 이력서를 내야 한다면 떨릴 겁니다.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또 받아주는 사람도 없어요. ‘당신은 어떻게 왔나요’ 하고 묻는다면 더 떨리는 겁니다. 하지만 자신을 상품이라고 생각하고 (외모는 빼고 ^^) 이야기해보세요. 기획을 좋아한다든지, 사람들과 화합하며 어떤 일도 할 수 있는 겸비함이 있다든지, 여러분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청와대 문화 특보, 장애인 1호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유일하게 4선을 연임했던 장애인이었다. 39세에 척수성 소아마비로 7년간 재활 훈련을 받은 루스벨트는 장애를 극복하면서 수없이 암송했던 글귀가 있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취임식 때 이와 같은 명언을 남겼다. 역대 대통령 중 링컨에 이어 위대한 인물로 그려지는 이유가 24년간 장애인으로 살면서 대통령 당시 경제 대공황을 극복했고, UN을 창설하고,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장애인을 이해하면서 장애인을 위한 공공시설을 짓고, 정책과 법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장애인을 위한 터를 마련했다.
루스벨트와 견줄 수는 없으나 방귀희 씨의 행보에도 특별한 점이 발견된다. 방귀희 씨는 2012년 휠체어를 탄 첫 장애인으로 청와대 문화 특보로 취임됐다. 그녀가 문화 특보 후보가 된 소식이 주변에 알려지자 많은 분들이 만류했다. EBS <문학기행> 방송을 유일하게
맡은 작가로 한창 활동 중이었기 때문에, 방송작가라는 좋은 업業을 마다하고 그 어려운 자리로 왜 가느냐고도 했다.
“장애인이라서 의욕이 없고 무능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런 이미지를 없애고 싶었습니다. 그런 일도 장애인이지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고 희망을 주고 싶었어요.”
그런 이유로 청와대로 들어갔지만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루 종일 걸려오는 민원 전화에 일일이 응대를 하는 일부터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어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일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비록 불편한 몸으로 휠체어 생활을 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느끼곤 했다. 임기 1년은 짧지만 충분했다.

장애인을 위한 문화 예술센터를 건립하다
얼마 전 그녀는 25년간 발행했던 <솟대문학>을 100호로 종간終刊을 선언했다. 장애인의 삶과 애환이 담긴 책으로 그동안 어렵게 발간됐다고 했다. 정부 지원도 올해로 끊기면서 더 이상 발행할 수가 없게 됐다. 홈페이지에는 솟대문학을 살리자는 구명의 글도 올라왔지만 2016년에 예순을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까지 솟대문학의 역할이 ‘충분하다’고 말한다. 현재 장애인 문화예술 회장으로 겸임하는 그녀는 몇 주 전 대학로에 장애인 문화예술센터를 개관해 루스벨트처럼 장애인을 위한 허브 역할을 해낸 것에 기쁨을 표현했다. 그녀는 장애인 문화예술센터가 장애인을 위한 복지에 한 획을 긋는 공간으로 생명력 있게 존재하길 기대했다.

 
 
더불어 사는 사회, 공유하는 밝은 사회
우리나라 장애인의 수는 1만 명이다. 타고난 ‘장애인’도 있지만 불의의 사고로 후천적 장애인이 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방귀희 씨는 대학에 강의를 갔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녀를 힐끔 쳐다보며 먼저 들어가는 대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한 외국인이 마침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녀를 쳐다보는 시선이 다소 냉담했다고 기억한다.
“교과서에서 글자로만 배우는 장애인에는 어떤 이해도 담겨있지 않아요. 그래서 학생들이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새로운 언어의 카테고리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사실 누구라도 장애를 겪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누구든 소외되지 않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려면 우리의 인식이 보다 더 성숙해져야 할 것이다.

방귀희
장애인이라는 편견을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해온 그녀는 장애문학인 솟대문학을 25년간 발행했다.31년간 방송인으로서, 2012년에는 청와대 문화 특보로 1년간 활동했다. 현재 장애인 문화예술 회장으로, 대학로에 장애인을 위한 문화예술센터를 건립하여 많은 사람들의 교류의 장으로 운영되길 희망한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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