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 완전탐구 12회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송태진은 굿뉴스코 출신으로 2008년에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현재 인터넷방송국에서 뉴스 팀장으로 재직하며 본지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대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달에는 그가 부룬디의 작은 시골로 떠났던 여행담을 들려준다.

탕가니카 호수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면적이 넓어서 부룬디, 잠비아, 콩고 민주공화국, 탄자니아에 걸쳐 있다.
탕가니카 호수는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면적이 넓어서 부룬디, 잠비아, 콩고 민주공화국, 탄자니아에 걸쳐 있다.

해외봉사활동 중에는 좋든 싫든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 처음엔 간단히 ‘Hello’라고 인사 건네기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일단 낯선 것들을 향해 도전의 발을 떼면 뜻밖의 행복을 만나게 된다. 그 재미를 느끼며 도전에 익숙해지면 나중엔 현지인처럼 큰 길 한복판에서 당당히 코를 후비며 무한한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이런 행동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의지박약 청년이었더라도 걱정 마시라. 봉사현장에서 겪게 되는 도전이 그가 누구든 반짝이는 눈을 가진 모험가로 만들 테니까

해외봉사의 백미, 무전여행
해외봉사단원들이 겪는 다양한 경험 중에서도 무전 배낭여행은 단연 도전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활동이다. 나는 케냐에 이어 부룬디에서 한 번 더 무전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기간은 3박4일, 목적지는 부룬디 최남단 마을 ‘냔자락’. 반겨줄 사람도, 예약된 숙소도 없다. 출발점과 종점이라는 두 점만 찍혀 있는 막연하기 그지없는 여행. 더욱이 이번엔 한국인 없이 부룬디 현지 친구 ‘파니’와 단둘이서 가야했다.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수도 부줌부라를 벗어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남쪽을 향해 두시간이 넘도록 길을 걸었다. 하지만 케냐와 달리 부룬디에는 우리를 태워주려는 차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동차 자체가 없었다. 가난한 부룬디의 한적한 찻길 위엔 자동차 대신 소떼와 목동만 종종히 지나다녔다. 탈것을 이동시키는 본 목적을 잃은 도로는 나를 괴롭히는 거대한 태양열 반사판이었다. 검은 아스팔트길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와 머리 위에서 내리꽂는 적도의 따가운 태양광선에 매 걸음마다 굵직한 땀방울을 흘려야 했다.
몸이 고생을 하니 출발할 때의 당찬 도전의 각오는 점점 찌부러졌다. 이렇게 가다가 첫날부터 노숙하는 거 아닐까? 부정적인 상념들이 둥실 떠오르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반면 같이 걷는 현지친구 ‘파니’는 몇 걸음마다 셀카 사진을 찍느라 희희낙락. 뭐가 그리 좋을까? 앞서가던 파니가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쏭, 우리는 운이 좋아.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리빙스턴과 스탠리가 세운 기념비가 있거든. 만약 차를 타고 갔었다면 그 곳을 그냥 지나쳤을 텐데 걸어오게 되어서 다행이야.”
“맙소사, 여기까지 걸어오게 된 게 다행이라고? 더워 죽겠는 데 넌 힘들지 않아?”
“하쿠나 마타타! 걱정할 거 없어. 여행을 나와서 걷는 건 당연한 거야. 많이 걸을수록 차를 탔을 때 더 행복해질 수 있잖아.”
상황은 같았지만 그걸 바라보는 나와 파니의 관점은 너무나 달랐다. 나는 힘들지 않고 더 편하게 갈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파니는 무전 배낭여행의 매순간을 즐겼다. 태양 아래를 몇 시간씩 걷는 것도 그에게는 기쁨의 조건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우리의 마음은 연결되었고 파니의 즐거움이 내게도 전달되었다. 여전히 자동차는 보이지 않고 이마에서 땀은 뚝뚝 떨어졌지만 그런 상황들이 더 이상 싫지만은 않았다. 신기할 정도로 몸과 마음이 가뿐해졌다.
 

리빙스턴은 1871년 아프리카 탐험 중 이곳 탕가타나 호수에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스탠리의 수색대에게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와 스탠리가 탐험을 동행하며 세운 비석 앞에서
리빙스턴은 1871년 아프리카 탐험 중 이곳 탕가타나 호수에서 열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다 스탠리의 수색대에게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와 스탠리가 탐험을 동행하며 세운 비석 앞에서
큰 길을 벗어나 파니가 말한 기념비에 도착했다. 1871년, 나일강의 수원을 찾아 탕가니카 호수를 탐험하던 리빙스턴과 스탠리가 세운 기념비였다. 명성에 걸맞지 않게 덩그러니 방치된 돌비는 시간이 흐르며 맨발의 아이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놀이기구가 되어 있었다. 비록 동네 까불이들에게 봉변을 당할지라도 리빙스턴 이후로 바위는 묵직하게 한자리를 지켰다. 비석의 반질한 표면에 또박또박 새겨진 글자들은 죽을 고비를 넘으며 오지에 도달한 이의 것이라기에는 놀라울 정도로 밝고 경쾌했다. 한계를 넘는 악조건 속에서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탐험가들의 강인한 정신이 느껴졌다. 기념비 앞에서 혹독한 여정의 성공을 기원했을 그들…. 그 모습을 떠올리니 고작 배낭여행 며칠 갔다 오는 걸로는 더 이상 엄살 떨 수 없었다.

기념비를 구경하고 큰 길로 돌아오니 바로 자동차 한 대가 멈췄다. 이집트에서 온 친절한 운전자는 마침 냔자락까지 가는 길이었다. 그의 차를 타고 우리는 단번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니의 말대로 하쿠나 마타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호수호수 마을, 냔자락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행복을
우리가 도착한 목적지 ‘냔자락’은 부룬디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시 우리가 도착한 목적지 ‘냔자락’은 부룬디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냔자락Nyanza-Lac의 냔자Nyanza는 부룬디어로 호수라는 뜻이고, 락Lac은 프랑스어로 호수를 의미한다. 풀이해보면 호수호수 마을이라는 재미있는 지명이다. 이름대로 냔자락은 탕가니카 호수-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의 폭이 넓어지는 호반에 위치해 있다. 어디에서든 고개만 돌리면 마을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탕가니카가 눈에 들어온다.

쉬엄쉬엄 발 닿는 곳을 따라 마을을 둘러보았다. 푸른 하늘과 겹쳐지는 은은한 수평선, 마을 뒤로 뻗어 있는 나지막한 산줄기, 50년 전부터 시간이 멈춘듯한 불그스름한 단층 흙벽돌집과 그 앞 야자나무 그늘에 앉아 이방인에게 인사를 건네는 주민, 그리고 얼굴 가득 호기심을 머금고 우리의 꽁무니를 쫓는 맨발의 아이들….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에도 아프리카를 괴롭히는 빈곤은 여지없이 공존하고 있었다. 묵은 때가 깊이 밴 꾀죄죄한 옷과 머리에 피어난 하얀 부스럼. 학교는 구경도 못해보고 걷기 시작할 때부터 농사일을 배우며 사는 아이들도 많다. 비슷한 또래 한국어린이들의 말끔한 모습과 견주어보면,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다. 부룬디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난 속에서 살아야 하는 아이들. 아프리카에 살면서 매일 보는 장면이지만 익숙해지기는커녕 가슴이 더 깊게 아파온다.

예닐곱 명의 꼬마들은 나와 파니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내며 키득거렸다. 그 중 용감한 몇 녀석은 살금살금 내 곁으로 다가와 ‘니하오!’라고 외치고는 놀란 병아리마냥 후다닥 도망가기도 했다. 우리를 반겨주는 녀석들이 고마워 파니와 머리를 맞대고 작은 선물을 주기로 했다.
무전여행인지라 가진 것 없지만 다른 비장의 카드가 있다. 우리는 가난을 퇴치해줄 수는 없어도 아이들에게 행복을 줄 수는 있다. 파니와 나는 매주 토요일마다 어린이교실을 진행해 온 자칭 실력파 교사들. 심심해서 온몸이 근질거리는 개구쟁이들과 한바탕 놀아주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수십 번도 넘게 해본 어린이교실의 경험이 냔자락에서 빛났다.

우리를 따라다니던 어린이들을 공터에 모으고 영어 노래와 율동을 알려줬다. 음악이 곧 삶인 아프리카인답게 녀석들은 금방 신나게 노래하고 춤을 추며 리듬을 탔다. 부룬디는 어린이혼자의 인구 비율이 높은 반면 아동을 위한 놀이문화는 발달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파니와 내가 진행한 어린이교실에 아이들은 무척이나 즐겁게 참여했다. 해맑은 웃음소리가 멀리까지 전달됐는지 여기저기에서 나타난 동네 꼬마 친구들이 하나둘 즉석 수업에 끼어들었다. 

어린이들의 수가 꽤 많아져서 우리는 아이들을 ‘파니 팀’과 ‘쏭 팀’으로 나눠 놀이를 했다. 장애물 달리기, 수건 돌리기 등 함께 할 수 있는 놀이는 무궁무진했다. 이겨도 박수밖에 주지 못하는 싱거운 시합이었지만 파니 팀과 쏭 팀의 어린이들은 마치 올림픽에라도 출전한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지나가던 어른들도 걸음을 멈추고 경기를 구경하며 아이들을 응원했다. 마침내 승패가 결정되었을 때, 마을이 요동할 듯 함성과 박수가 터져나왔고 승리한 아이들은 앞서 배운 영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기쁨을 표현했다. 가난에 젖은 부룬디 어린이들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우리의 선물을 그들이 기쁘게 받아주어 고마웠다.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둥그스름한 우부갈리 앞에서 행복해졌다. 오른쪽이 우리에게 숙박을 제공해주신 목사님.
저녁 식사 시간, 나는 둥그스름한 우부갈리 앞에서 행복해졌다. 오른쪽이 우리에게 숙박을 제공해주신 목사님.
어둠 속 우부갈리는 함께 먹어야 제 맛
아이들과 놀다보니 해 넘어갈 시간이 다됐다. 언제 다시 오냐며 아쉬워하는 꼬맹이들을 돌려보내고 숙소를 찾아보았다. 주민들은 교회의 목사님에게 가보라며 우리를 안내했고 넉넉한 인상의 목사님은 외국인 길손을 환대했다. 해가 완전히 지고 컴컴해졌을 때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 귀한(?) 외국인 손님이 와서인지 이웃들도 함께 모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실내는 컴컴해서 사람들의 눈과 치아만 보였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부룬디의 식사 문화에는 고고한 기품이 있다. 음식을 먹기에 앞서 주인은 주전자에 물을 담아와 손님의 손에 천천히 부어준다. 손님은 고된 농사일로 흙먼지가 묻은 지친 손을 주인이 부어주는 물로 씻어내며 진한 유대감을 느낀다. 노인부터 소년까지 모든 식객에게 일일이 물을 부어주며 주인은 안부를 묻는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물을 부어주는 그의 예의바른 몸가짐이 어찌나 진지한지 나를 깊이 환영하고 존경을 표하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식전에 손을 씻는 일은 하나의 신성한 의식인 듯 결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진행됐다.

손을 씻은 사람들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어둠 속에서 식탁 위의 흔들리는 두 개의 촛불만이 미약하게 빛을 발했다. 배구공만한 우부갈리 몇 덩이가 놓여있고, 탕가니카 호수에서 잡히는 멸치를 닮은 생선요리가 차려져 있었다. 떡 반죽을 닮은 우부갈리를 향해 아직 땟물이 덜 마른 오른손을 스윽 뻗는다. (왼손은 절대 안 된다.) 갓 만들어낸 음식의 뜨끈한 온기가 느껴지고 하루의 피로가 손끝에서 찌르르 녹아내린다. 우부갈리를 뜯어 손 안에서 주물주물 굴려 밤톨 크기로 만든다. 그리고 짭짤한 반찬 국물을 찍어 꿀꺽 삼킨다. 씹지 않고 한입에 넘기는 게 핵심이다. 말랑한 반죽덩어리가 식도를 꽉 채우며 부드럽게 내려간다.

한국인들이 밥상에서 찌개를 나눠 먹듯 부룬디 사람들은 커다란 우부갈리를 나눠 먹는다. 허기지다고 해서 혼자 다 먹어서는 안 된다. 옆 사람이 배가 고파 보이는지, 남은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보아가며 적당한 속도로 음식을 취해야 한다. 주인은 노력하지만, 음식은 언제나 부족하기에 사람들은 눈에 띄지 않게 양보하며 다른 이들을 배려한다. 나는 귀한 손님이 되는 바람에 다른 이들보다 두 배는 더 많이 우부갈리를 먹은 것 같았다.

식사를 하는 동안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나이 먹은 아저씨들이 밥 먹으면서 수다를 떤다. 차분하게 흐르는 대화 속에 기쁨과 근심이 한 상에 올라 어우러지며 모두의 이야기가 된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며 식사는 작은 토론의 장이 된다. 우부갈리를 씹지 않고 삼키는 것도 아마 이야기를 더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닐까싶을 정도다.

한국에서의 시간을 되돌아보면 허기를 면하려고 마지못해 밥을 먹을 때가 많았다. 식사는 업무, 과제, 게임 등등 여러 바쁜 일을 하는 사이에 서둘러 끝내야 하는 귀찮은 일이었다. 혼자 먹을 때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을 때도 깊이 있는 대화는 없었다. 사실, 그 대화가 부담되어 김밥이나 빵 같은 패스트푸드로 어린이혼자 대충 해결할 때도 있었다. 하루 24 시간, 일은 열심히 했지만 누군가와 천천히 마음을 주고받는 여유는 갖기 힘들었다.

 
 

부룬디에서 식사는 단순히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위 속으로 집어넣는 일이 아니다. 서로 연결되는 시간이다. 손을 씻어주고 같은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며 마음이 오고간다. 성질 급한 한국인이 볼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진행된다. 그러나 그것이 부룬디 사람들의 밝은 미소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 노란 촛불에 비친 사람들의 환한 얼굴과 둥그런 우부갈리 덩어리. 그 따뜻한 느낌을 아는가. 돈 한 푼 없는 불청객 두 명을 포용해주고 배려하는 마음을 감각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행복의 한 방식인 것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다.

도전한다며 시작한 냔자락 무전배낭여행은 오히려 부룬디 사람들과 마음이 연결되며 그들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전을 가장한 3박 4일 간의 호강이었다.


 
 
송태진
그는 아프리카를 행복으로 가득 채울 꿈을 품은 맹랑한 공상가이다. 2012년 손정아와 결혼한 후, 현재 아프리카와 청소년을 위한 방송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

 
 
손정아
2007년 부르키나파소로 해외봉사를 다녀오며, 아프리카에서 얻은 행복으로 살고 있다. 해외봉사로 맺은 인연을 따라 필자인 송태진과 결혼했다. 현재 일러스트레이터로 청소년들을 위한 따뜻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