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벌어진 종족전쟁으로 100일 만에 100만 명이 살해됐던 르완다.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참혹한 상처를 갖고 있다.
‘돈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벼르던 이정훈은 이곳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던 걸까?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그는 불과 5,6년 전만 해도 유흥주점을 밥 먹듯이 출입했다. 굿뉴스코는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희망’이었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갖고 있지만 그는 불과 5,6년 전만 해도 유흥주점을 밥 먹듯이 출입했다. 굿뉴스코는 그런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 ‘희망’이었다.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나는 학창시절 소위 불량아였다. 내가 비뚤어지기 시작한 건 IMF 경제 위기가 불어 닥쳤던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다. 큰 목장을 운영하시던 아버지가 소값 폭락과 사룟값 폭등을 감당치 못해 파산 하셔서 나와 어머니는 졸지에 작은 단칸방에 살게 됐다. 1년 후에는 집 건물 전체에 불이 나서 모든 살림을 잃고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어머니는 돈을 벌기 위해 타지로 떠나셨고, 나를 친할아버지에게 맡기셨다. 가족이 모두 흩어지며 홀로 남겨진 나는 연이은 전 학에 외로움을 느끼며 자연스레 탈선했다. 그 무렵 전학생이었던 내게 불량 학생들이 싸움을 걸었는데, 내가 주먹질에서 이기면서 한 패거리로 어울렸다. 그때는 고락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내게 가족보다 가까웠다.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할 때는 속이 뻥 뚫리는 듯했다.
매일 술에 취한 채 귀가했다. 어머니는 만날 때마다 방 안이 연기로 자욱하도록 담배를 피워대는 나를 혼내셨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었다. 부모님과 부딪힐 때면 나는 집을 나가 며칠이고 들어오지 않았다.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더러운 세상!’
뭐가 그리도 서럽고 원망스러웠는지. 그때 나의 관심은 오로지 돈벌이이었다. 식당 서빙, 야식 배달, 막노동…. 15살 때부터 해보지 않은 종류의 아르바이트가 없다. ‘부모님은 더는 내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여겼기에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움켜쥐고 싶었다. 공부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르완다Rwanda
전체 면적이 우리나라의 경상북도만 한 작은 나라. 본래는 커피, 차, 담배 등을 수확하며 ‘아프리카의 지상낙원'이라 불렸다. 벨기에의 식민지배를 받으며 국민의 90%를 차지하는 후투족이 10% 의 이민족이었던 투치족에게 강압통치를 받으며 두 종족 간 갈등이 심해졌다. 이후 독립과 함께 1994년 후투족 출신의 대통령이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이때 투치족은 물론 내전에 반대하는 일반인들까지 학살되며 전체인구의 10%가 사망했다.


물질문명을 벗어나 만난 세상
대학에 가서도 공부하는 친구들이 유치하게 보였다. 그래서 수업을 듣기보다는 유흥업소를 출입하며 웨이터로 용돈을 벌었다. ‘왜 이렇게 사는 걸까’ 나중에는 모든 게 지겨워진 나머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결국 한 학기만 간신히 이수한 채 바로 군에 입대했다.
휴전선 최전방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을 때면 지금껏 살아왔던 날을 저절로 되돌아보았다. 간절히 변하고 싶었다. 마침 친하게 지내던 이웃 누나가 위문편지로 내게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소개했다. 3기 굿뉴스코 단원으로 에티오피아를 다녀온 그 누나는 평소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1년간의 해외봉사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문득 고등학생 때 우연히 접했던 르완다인의 사연이 떠올랐다. ‘내전이 일어나 간신히 이웃나라 콩고로 도망쳐서 살았다’는 당시 ‘가족들이 내전 당시 눈앞에서 잔인하게 죽었다’ 고 고백했다. 더 흘릴 눈물이 없다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던 그의 표정이 종종 떠올랐다.
‘나 같은 사람도 해외봉사를 갈 수 있을까?’
‘지금껏 힘들게 살았는데 어딘들 이보다 고생스럽지 않을까!’ 나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어디든 기꺼이 떠나고 싶었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며 위안을 얻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도 지금껏 살아온 것처럼 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두려웠다.
나는 전역 후 굿뉴스코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친구들은 ‘너 답지 않게 무슨 봉사냐’며 웃었지만, 개의치 않고 워크숍에 참석했다. 복학하지 않고 몇 달 간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르완다로 갈 비행기삯을 냈다.

매주 IYF 지부에서 진행했던 어린이교실을 마치고. 티없이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찰칵!
매주 IYF 지부에서 진행했던 어린이교실을 마치고. 티없이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함께 찰칵!
정훈이는 이곳에서 다시 태어납니다
르완다는 수도인 키갈리 도심에 는 유럽식 건물이 많지만, 조금 만 떨어진 외지에 가도 도시 전 체에 전기가 나가 몇 시간이나 복구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지부장님을 비롯한 다른 단원들과 근교의 유적을 견학했다. 퀴부카Kwibuka 성당은 르완다 대학살 당시 5,000여 명의 투치족을 잡아 가두어 놓고 불을 질렀던 곳. 지금도 창고 같은 집단 묘지에는 3단 철제 선반에 그때 죽었던 사람들의 유골이 빼곡하다. 학살자들은 당시 총알이 떨어지면 성당 벽으로 사람을 던져 두개골을 깨뜨려 죽였다고 한다. 산적한 유골 앞에서 나는 함께 간 단원들과 한참을 할 말을 잃은 채 서 있다 돌아왔다.
르완다의 아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여기저기에서 느껴졌다. 팔 다리를 잃은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었다. 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국경에서는 경찰들이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무기 반입을 검사 했다. 무엇보다도 대부분 국민에게 내전으로 인해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중에는 ‘가족들이 모두 죽은 시쳇더미 속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이렇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구나!’
몇 년 전 입대하던 날 아침이 떠올랐다. 나는 당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아침 버스를 타고 부대로 향했다. 어머니는 버스 정류장까지 쫓아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그런 나를 배웅 하셨다. ‘나는 정말 철이 없었구나!’ 부모님께 못할 짓을 하고 산 것 같아서 가슴이 뻐근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출국 전날, 키갈리에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한국으로 떠나는 출국 전날, 키갈리에서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과 작별인사를 나눴다. 웃고 있지만 마음은 아쉬움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살고 싶다!
열악한 환경에서 성장해 온 나는 다른 단원들에 비해 현지 적응이 월등히 빨랐다. 시골 여행을 가서 빗물을 받아 씻을 때도 곤욕스러워하던 단원들에 비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담담했다. 이제껏 불행으로만 여겼던 ‘가난이 도움 되는 부분도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현지 교육원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맥가이버MacGyver로 통했다. 어린 시절 레고 장난감을 조립하며 놀았던 덕분인지 나는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전자제품은 물론, 주방기구 등 물건이 고장 났을 때마다 무엇이든 수리했다. 교육원 바닥이 부서졌을 때도 시멘트 보수공사를 도맡아 했다.
아프리카에 온 뒤 나는 성격이 참 부드러워졌다. 르완다 사람들 속에서 서툰 영어로 대화하며 웃고 떠드는 동안 나도 모르게 성격이 바뀌었다. 르완다 사람들은 “한국에서는 전기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 밤에도 거리가 환하다” “음식을 남겨 쓰레기로 버리기도 한다”라는 나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 뜨며 놀랄 정도로 순수하다. 복지시설이 없어서 교육원에서 인형극과 종이접기 교실을 열 때면 인근에 사는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컴퓨터 교실을 열 때도 마찬가지이다. 생전 처음으로 구경하는 컴퓨터에 키보드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무척 감사해한다. 노트북 1대당 8명이 들러붙어 실습하면서도 마우스를 만져보는 것만으로 신기해한다. 되는 대로 살아온 나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 가 되는 것 같아 뿌듯했다. 한국에서는 늘 먹고살 걱정으로 전전긍긍했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자연스레 떨치게 됐다. 오히려 ‘르완다에 머물 동안 어떻게 현지인에게 봉사할 수 있을까?’ 함께 생활하는 단원들과 연구했다. 행복했다. 피부색은 달랐지만, 르완다 사람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며 참 평안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누리고 싶었다.

 
 
호텔 르완다 Hotel Rwanda(2004)
테리 조지 감독이 연출한 영화로 르완다 대학살 중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르완다 수도 키갈리의 밀 콜린스 호텔의 지배인인 폴 루세사바기나가 고군분투하며 내전 동안 1268명의 목숨을 지켜낸 내용. 2004년 아카데미 글든글로브상 후보에 올랐다. 감독 폴 루세사바기나는 2005년 미국 정부로부터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수상했다.

다시 돌아가고 싶은 르완다
한국에 돌아온 뒤 친구들은 모두 나를 보고 놀라워했다. 열악한 아프리카에서 1년을 보냈다는 것도 그랬지만, 내 인상이 이전보다 보다 훨씬 순해졌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뒤 나에게는 이전에는 없었던 마음이 생겼다. 가난은 더 이상 나의 근심거리 가 아니었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르완다에서도 1년을 건장히 살다 왔기에 취업, 연애, 학 점관리 등의 문제쯤은 넉넉히 극복할 만큼 마음이 강해졌다.

나는 몇 년 전 한국수자원공사의 임원 수행원으로 취업했다. 회사에서도 봉사활동을 통해 생긴 이타심과 희생정신들이 특별한 자격보다도 더 큰 시너지를 발휘할 것을 믿어주셨기에 나를 뽑아주셨다. 지금은 한국가스공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 마음의 힘은 지식보다 강하기에, 해외봉사로 얻은 신념은 지금도 내가 원활한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주변 분들도 나의 이런 점을 칭찬해 주신다. 나는 앞으로도 이런 봉사 정신으로 다른 사람들을 돕고 싶다.


사진 |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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