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왜 인류의 기업들은 인문학에 주목하는가>,모기룡著

4명의 천재 음악소년들이 밴드를 결성, 거대 음반사의 토너먼트식 오디션에 도전하는 내용의 만화 <오디션>. 그 <오디션>에 ‘이노무시키’라는 남자가수가 나온다. 무리한 활동으로 생긴 성대결절로 가수생활을 접을 위기에 처한 그는 티벳으로 날아가 피를 쏟는 수련 끝에 몇 옥타브를 넘나드는 창법을 터득한다. 오디션에서 그는 악보를 마음대로 뜯어 고친다. 자신의 ‘절대고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그 목소리에 방청객들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지만, 그는 탈락한다. 영혼이 빠진 그의 하이 옥타브는 더 이상 예술이 아닌, 천박한 자기과시에 불과했다. 노래의 본질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반면 주인공 팀은 노래의 분위기에 딱 맞는 음역과 특유의 미성美聲을 살려 4강 진출에 성공한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애플과 다른 업체들에 관한 기사를 볼 때면 <오디션>의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2015년 1분기 애플의 시장점유율은 17.9%, 그러나 영업이익은 92%를 독식했다. 비결이 뭘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잡스는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있는 기업’임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다. 이 발언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도 잡스와 인문학 배우기 열풍이 불었다. CEO나 정치인들은 잡스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터틀넥에 청바지 차림으로 강연을 진행했고, 인문학 강좌가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잡스의 인기에 편승한 얄팍한 시도에 지나지 않았다.
연세대 인지과학연구소 모기룡 박사의 책 <왜 일류의 기업들은 인문학에 주목하는가>는 인문학이 어떻게 애플의 경쟁력에 기여했는지를 보여준다. 애플의 MP3 아이팟을 보자. 글 첫머리에 소개한 ‘이노무시키’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IT기업들은 스펙, 즉 ‘어떻게 하면 보다 큰 용량과 빠른 처리속도를 갖춘 MP3를 만들 것인지’에만 집착한다. 애플은 다르다. MP3는 물론 그 MP3로 다운받아 즐길 수 있는 음원과 콘텐츠를 공급하는 시스템을 함께 개발해 새로운 시장을 창조한다. 이른바 ‘아이튠즈 스토어’다. 제품이 소비자에게 어떤 새로운 경험과 즐거움을 선사할지 생각하는 스토리 지향적인 사고思考, 그 바탕에는 인문학이 자리 잡고 있다.

 
 
문학, 역사, 철학 등 ‘문사철’은 인문학의 대표영역이다. 이 셋은 어떻게 애플의 경쟁력에 기여했는가? 문학은 그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로, 상상력을 촉진시킨다. 역사는 과거라는 거울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힘을 키워준다. 세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철학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때로는 자신이 정확하다고 믿고 있는 것들마저 뒤집어보게 함으로써 틀에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을 가능케 한다. 휴대전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아이폰 역시 ‘휴대전화에 MP3 기능을 넣은 폰은 많지만, MP3에 휴대전화 기능을 넣을 수는 없을까?’ 하는 비판적 사고의 결과물이다.
정교한 공예품과도 같은 애플 제품의 디자인도 인문학적 접근법에 힘입은 바 크다. 무조건 화려한 디자인은 개발의 편자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산업디자인은 아름다우면서도 절제된 맛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제품을 만들려면 사람들의 심리와 역사적 배경,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게 모기룡 박사의 설명이다. 역사·철학·문학·미술·음악 등 인문학적 소양으로 무장한 디자이너라면 심오함과 품격이 묻어난 제품을 만들 확률도 높을 것이다.
애플뿐만이 아니다. 벤츠, 레고, 스타벅스 등의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들도 이미 인문학적 접근법을 경영에 활용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취업포털 ‘커리어’가 선정한 2014년 취업시장 10대 키워드 중 하나가 ‘전화기 vs. 문사철’이었다고 한다. 전기전자·화학·기계 전공자는 취업이 잘되는 반면, 문학·역사·철학 전공자는 취업이 안되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다행히 몇몇 대기업을 중심으로 입사시험에 지원자의 인문학적 소양을 묻는 질문이 출제되는 등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최근 출시되는 스마트폰들을 보면 제조사에 상관없이 CPU나 메모리, 카메라 등 스펙이 점점 상향평준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업계 관계자들마저 ‘더 이상의 스펙경쟁은 무의미하다’고 할 정도다. 이제 스펙으로 경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바라보는 인문학적 감성과 창의성을 갖춘 인재가 주효한 시대인 것이다.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