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민이 발견한 행복의 법칙

지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얼마 전에 예쁜 딸도 낳았지만, 나는 어린 시절 무척 비딱한 편이었다. 오랫동안 아들을 바라셨던 부모님 밑에서 세 번째 딸로 태어난 탓이었을까. 가족에 대해 소외감과 피해의식이 많았다.

화려하지만 속이 텅 빈 삶
어머니는 나를 낳으시고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할 만큼 집안 어른들의 구박을 받으셨다고 한다. 생후 18개월 만에 바로 남동생이 태어났기에 나는 늘 동생에게 가려 집안 어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두 언니가 있었지만, 터울이 커서인지 좀처럼 어울리기가 힘들었다. 나는 동네 말괄량이로 말썽을 피워서 남동생과 비교당하며 어른들에게 야단맞기 일쑤였다.
우리 집은 자수성가하신 아버지 덕분에 꽤 부유한 편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고가제품이 집에 수두룩하고, 가족 모두가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즐기며 살았다. 어머니는 자식을 잘 키우려는 욕심으로 우리 남매에게 어려서부터 비싼 과외를 시키셨다. 사교육비가 많이 나온다 싶을 때는 직접 장사를 해서 돈을 버시며 우리를 열성 적으로 지원하셨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쁜 우리 집에는 언제나 적막이 흘렀다. 비슷한 시기에 아버지의 외도가 시작됐는데, 중학교 시절에는 부모님의 부부싸움으로 매일 집이 시끄러웠다.
결국, 부모님은 오랜 별거 끝에 내가 대학생 때 이혼하셨다. 언니들마저 모두 시집을 가버린 지라 외로워지신 어머니는 얼마 안가서 우울증에 걸리셨다. 나는 매 학기 학과 수석을 놓치지 않을 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늘 마음이 슬프고 공허했다. 그때는 친한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이 힘든 내 마음에 그나마 위안이었다. 나에게는 엄마나 동생보다도 친구들이 더 가족같이 느껴졌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선택
대학원 진학을 핑계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그저 집을 벗어나고 싶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진 어머니가 아들보다 편히 여기는 내게 매일같이 히스테리를 쏟아내셨던 탓이었다. 두 세 명이 살아도 널찍한 오피스텔에서 자취를 시작했지만, 나는 상경한 후에도 하루에 몇 번씩이나 어머니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아야 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며 불면증이 생겼는데, 어렵게 잠이 들어도 악몽을 꾸기 일쑤였다. 1년이 넘도록 같은 증상에 시달리며 나 또한 어머니처럼 우울증이 생겼다. 술에 취하지 않고서는 한숨도 잠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소개로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알게 되었다. 그날도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는데 매일 울먹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웬일인지 밝았다. 나는 어머니가 소개해주는 굿뉴스코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래,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먼저 가나와 케냐에서 개최하는 월드캠프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곳에서 한 달간 캠프를 참석하고 현지인들과 지내며 무전여행도 다녀왔다. 신기한 것은 아프리카에서 지낼 동안 불면증이 씻은 듯 없어졌다. 온종일 현지인들과 웃고 떠들고 뛰놀다 보면 밤에는 여지없이 피곤함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이게 얼마 만에 꿀잠이던가!’ 나는 다시 삶의 의욕을 찾고 싶었다. 2009년 겨울,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통해 본격적으로 아프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다.

가나 월드캠프에서 봉사하던 중, 현지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가나 월드캠프에서 봉사하던 중, 현지 음식을 만드는 모습을 구경했다.
가족의 의미를 알아가다
이번에 간 나라는 아프리카 서부의 카메룬이었다. 막상 현지에 도착했을 때는 좀 무서웠다. 세계 최빈국답게 거리에는 누추한 차림의 사람들이 돌아다녔고, 걸인들이 나를 보고 돈을 구걸해왔다. 다른 단원들처럼 천천히 현지에 적응하고 싶었지만, 도착한지 얼마 안 돼 큰 비보를 들었다. 한국에 있는 남동생이 심장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었다. 남동생은 당시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뇌사상태로 식물인간과도 같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내가 한국에 돌아가려 하자, 어머니는 ‘네가 귀국한다고 동생의 상태가 바뀌는 것도 아니니 그 곳에서 활동을 계속하라’며 만류하셨다. 매일 눈물을 흘렸다. 늘 동생에게 가족의 사랑을 질투했지만, 큰 사고를 당한 상황에서는 미워하는 마음도 사라진 듯했다.
현지 봉사활동에 마음을 쓸 여력조차 없었지만, 알고 지내는 카메룬 사람들은 오히려 나를 위호하며 기적을 함께 기원해 주었다. 한 친구는 남동생의 쾌유를 함께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금껏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을 숨기고 살았던 나는 카메룬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에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한 달 후 ‘동생이 기적적으로 뇌사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마음이 날아갈 듯 기뻤다. 한국에 전화를 해보니 아버지도 집으로 돌아오셔서 동생을 돌보신다고 했다.
이전에는 그냥 까맣게만 보였던 현지 사람들의 마음이 한 명 한 명 느껴져 눈물 나도록 감사했다. 나는 그렇게 카메룬 사람들과 가족이 됐다. 세련된 도시문명은 아니었지만, 현지 사람들은 가난 속에서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며 이따금 한국에 있는 우리 가족도 떠올랐다. 나는 약점을 내보이면 금방 무시를 당할 줄 알았는데, 함께 사는 단원들과 카메룬 친구들은 오히려 이런 내 모습을 반기며 감싸주었다.

무일푼 행복의 노래
한번은 무전여행을 떠났다. 가나와 케냐에서도 무전여행을 간 적이 있지만, 고생 없이 자란 나는 작은 배고픔도 잘 참지 못 했다. 여행을 떠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아 친구에게 ‘비상금으로 챙겨간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자’며 졸랐다. 완고했던 친구에게 거절당했을 때는 짜증이 났다.
“보민, 네 동생이 아플 때 내가 얼마나 기도를 했는데 이렇게 화를 내니? 섭섭하다.”
친구의 말을 들은 후 나는 부끄러워졌다. 스물아홉,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내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였지만 그렇게 다른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마주하게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해서 은근히 나를 과시하면서도 성숙한 인격체처럼 행동하려고 애써 겸손한척했던 김보민…. 한국에서는 이런 내 모습을 감추고 살았지만, 가족처럼 지내는 카메룬 교육센터에서는 나의 철없는 모습이 여과 없이 터져 나왔다. 생각해보니 나의 불면증의 원인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잠들기 전에는 항상 이런저런 걱정들로 속을 앓았는데, 내 문제만으로도 너무 심각했기에 가족들의 마음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와 이별하신 후 내게 의지하시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회피하려고만 했다. ‘지금 마음처럼 모든 걸 그냥 인정하면 될 것을….’ 나는 상처로 점철된 나의 과거와 화해했다.
한국에 돌아올 때쯤 나는 간식을 먹고 있는 동네 아이들에게 ‘누나도 한 입 달라’며 장난을 칠 만큼 넉살이 생겼다. 도도한 모습들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카메룬에서는 그렇게 어떤 것으로도 치장하지 않고, 나 그대로의 나로 자유롭게 웃고 찡그렸다. 마음이 참 편했다.

매주 주말에 컴퓨터 아카데미를 열어 카메룬 대학생에게 컴퓨터 사용을 가르쳤다. 알면 알수록 질문을 쏟아내는 이들과 배움의 열정을 함께하며.
매주 주말에 컴퓨터 아카데미를 열어 카메룬 대학생에게 컴퓨터 사용을 가르쳤다. 알면 알수록 질문을 쏟아내는 이들과 배움의 열정을 함께하며.
상처는 진솔한 대화로 치유된다
한국에 돌아온 나를 제일 먼저 가족이 맞아주었다. 끈기가 부족한 나를 아는 언니들은 ‘아프리카에서 길어봐야 3개월이겠지’라며 내가 금방 돌아올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카메룬에서 보낸 1년은 내 삶의 어느 때보다도 가장 평온했다. 또 이후 나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꿔버릴 만큼 밝고 따듯했다. 복학한 뒤로 나는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공부했다. 비싼 옷, 좋은 가방들은 이전보다 무의미했다. 뉴스코로 경험한 따뜻한 마음이 내 속에 가득했기에, 사소한 일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던 까칠한 성격도 바뀌어서 주변 사람들과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결혼해서 가정도 꾸렸다. 얼마 전 예쁜 딸도 태어나서 요즘은 아이를 돌보느라 하루하루가 분주하다. 행복한 가정생활의 비결은 소통에 있다는 걸 알기에 무슨 일이든 남편과 서슴없이 대화하려 한다. 카메룬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할 때에는 남편도 흥미로워하며 귀를 기울여준다. 가끔 카메룬 친구들이 한국행사 참석차 찾아오는데, 남편도 나와 함께 아프리카 친구들을 만난다. 카메룬 사람들과 거리감 없이 웃고 떠드는 남편을 볼 때면 나도 행복해 진다. 훗날 내 딸이 성장하면 가족이 다 함께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싶다. 나를 다시 살게 한 아름다운 그곳으로.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