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르토리코 카를로스 M. 몰리나 로드리게스 시장

그는 교도소 경비대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일을 배우는 태도는 유별났다. 남들은 교도소의 재소자가 도망가지 않도록 감시만 할 뿐이었지만 그는 교도소를 행복한 공간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시장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아본다.

1994년 푸에르토리코 아레시보시市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의 청년 로드리게스는 극단적인 범죄자가 수용되어 있기로 소문난 백곰 교도소로 첫 발령을 받았다.
“어이, 이봐 자네는 저기 탑으로 올라가서 일해야 해. 그것이 자네가 할 일이야.”
경비대원으로 첫 출근을 한 그에게 한 감독관이 이야기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탑은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지저분했던 것. 온통 칠이 벗겨진 채로 쓰레기통이 따로 없었다. ‘앞으로 근무해야 하는 공간이 왜 이리도 더럽지?’ 그는 당장 무전기로 감독관에게 연락했다.
“감독관님, 이 탑을 깨끗하게 색칠하고 싶은데요. 페인트 한 통, 쓰레기통, 솔을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이봐,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게 아니야. 우리는 그냥 아무도 이곳을 도망가지 않도록 감시할 뿐이야.”

10년간 꿈을 품은 청년
청년 로드리게스는 그날부터 교도소의 모든 곳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반드시 기회가 된다면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고민은 시작됐다.
“재소자들이 잘못해서 범죄자가 됐는데 그 가족까지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었어요. 교도소에 들어와서 교류하기를 원한 종교인들에게도 차별대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도소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 마음에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꿈이 있기에 배울 수 있는 것처럼 10년간 한 번도 결근한 적이 없는 그는 경비대원으로 근무하며서도 교황청 카톨릭대학을 다니며 형사사법을 공부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백곰 교도소의 모든 부서도 한눈에 들여다볼 만큼 잘 알게 됐다.
뒤늦게 공부하며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그에게도 때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루이스 뽀르뚜뇨 주지사의 서기관이 되어 교도소를 바꾸는 프로젝트의 면접을 보게 된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저에게 박사도 박식한 사람도 아니므로 그 자리에 서 있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어요. 다방면으로 많은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는 유능한 사람을 위한 자리라고 말이죠. 하지만 ‘자네가 어떻게 교도소를 바꿀 수 있는가?’ 하는 도지사의 물음에 저는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저는 변호사도 아니고 박사도 아닙니다. 물론 저보다 학구적으로 더 준비된 사람을 세우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온전히 제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열정이 있습니다. 저만큼 교도소의 조직도를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만큼 교도소를 바꾸고자 열의를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제가 반드시 교도소 안의 시스템을 바꾸고 사람들을 변화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리고 그동안 구상해온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백곰 교도소는 극단적인 범죄자 수용소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청년 로드리게는 교도소 재소자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부단히 연구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학교, 병원, 빵 공장 등 재소자들을 위한 재활 시스템을 만들었다.
백곰 교도소는 극단적인 범죄자 수용소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청년 로드리게는 교도소 재소자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부단히 연구하고 공부했다. 그리고 학교, 병원, 빵 공장 등 재소자들을 위한 재활 시스템을 만들었다.

재소자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2009년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그는 3년간 교도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정부의 내각에서 교도소 및 재활센터의 서기관으로 임명되어 4곳의 기관을 관리하게 되었다. ‘청소년 기관 관리, 가석방위원회, 기업 주식회사 고용 및 교육기관, 심판 사전 서비스 지점 및 교도소 관리 사무소’를 담당하게 된 그는 특히 교도소 내에 대대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백곰 교도소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와 병원을 세웠고, 빵을 만들 수 있는 빵 공장도 만들었다. 여성 범죄자들이 감옥 안에서 재소자 본인의 자녀와 함께 머리를 자를 수 있도록 미용실도 세웠다.
로드리게스 씨를 통해 시작된 3년간의 변화는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그를 무시했던 이들도 먼저 다가와 사과하기도 했다.

“한번은 재소자들의 가족을 다 모아서 풀장으로 갔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을 모두 풀어놓았습니다. 물론 교도관을 배치해놓았지만요. 그들이 좁은 공간에서 겪었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마음의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800명의 재소자들이 교회에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리도 마련했어요.
그들 가운데 음악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뽑아 밴드도 만들었습니다. 자주 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가졌는데, 특히 15년간 수용되어 한 번도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했던 한 딸의 소원이 이뤄졌습니다. 딸과 아버지는 교회에서 만났고, 서로 눈물을 흘리며 재회했습니다. 그 장면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옥 안에서 점점 재소자 간의 싸움이 줄고 사람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재소자들이 학교에 가서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처럼 감옥에 들어오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실천해온 섬김의 세월이 반증하듯 시민들은 그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제5회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가브리엘 로드리게스 아길로Gabriel Rodríguez Aguilo 국회의원(왼쪽), 카를로스 M. 몰리나 로드리게스Carlos M. Molina Rodríguez 시장(오른쪽)이 참석했다. 시장의 아내와 딸도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제5회 세계청소년부장관포럼에 가브리엘 로드리게스 아길로Gabriel Rodríguez Aguilo 국회의원(왼쪽), 카를로스 M. 몰리나 로드리게스Carlos M. Molina Rodríguez 시장(오른쪽)이 참석했다. 시장의 아내와 딸도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푸에르토리코 시골에서 자라
로드리게스 시장은 1974년 8월 27일 아레시보의 사바나 오죠스Sabana Hoyos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도시에서 일하는 어머니와 떨어져 조부모 아래 성장한 그는 아레시보의 극한 가난 속에서 그는 배를 곯았던 적도 수없이 많았다. 그의 가족 중에는 정계에 연결된 사람도, 공인도 없었다.
“하지만 저는 교도소에 들어선 그 날부터 왜 제가 그곳에 있는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교도소 건물 안에는 넓은 복도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범죄자와 문신을 한 사람들 가운데 지내면서, 저는 경비대원이었지만 끝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시작했지요. 국회 산하의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 관청도 담당하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이 사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지, 그곳에서 무엇을, 왜 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생각했다. 그런 그에게 아레시보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애정과 존경심을 가졌다.

 
 
도시를 일으키기 위해, 다시 뛴다
로드리게스 씨가 시장으로 당선된 지난 2013년, 이미 푸에르토리코의 아레시보 시는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현재도 푸에르토리코는 디폴트 상태이다. 각계에서는 ‘최저 시급과 빈곤층 보조금을 지나치게 높게 책정한 것’을 재정 파산의 원인으로 꼽는다.
그는 ‘이런 어려움에 봉착한 국가를 위해, 시市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로드리게스 시장의 페이스북을 열면 도시 곳곳을 다니며 상권을 살리기 위해, 농업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활력을 가질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려가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위기에 봉착한 도시에 활력과 영감을 불어넣는 그의 표정은 밝다.

“저는 경제 도시로 성장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 다닙니다. 시청에 속한 숙박소도 열고, 레스토랑도 오픈하며, 호텔도 지을 계획입니다. 이미 해변에는 3층짜리 전망대와 레스토랑을 짓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아레시보 시의 젊은이들을 인재로 키워내기 위해 7명의 인재를 뽑아, 그들이 각각 학교 탈선, 임신, 예술교육, 농업 기술 교육 등의 문제를 논의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교육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음악으로 젊은이들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 음악 박물관 학교도 세우고 있으며, 마을마다 운동 시설도 만들고 아레시보 시민들을 위해서 8월에 야외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체육관과 트랙도 오픈했습니다. 환경을 생각해 재활용 센터에 대한 시각도 바꾸려고 센터도 오픈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모든 시설물의 사용료도 저렴하게 책정해서, 시설이 운영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41살로 젊다. 그만큼 해야 할 일도 많다는 의미다. 그가 만난 가난과 시련이 그에게 항상 소망의 꽃을 피우는 기회가 되었듯이 현재 겪는 경제적인 난관은 그가 공복公僕으로서 지혜롭게 헤쳐야 나가야 하는 관문이 될 것이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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