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근로장학사업 우수사례 수기공모전 우수상

전역 이후, 아버지가 대장암에 걸려 복수가 찼을 때는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집안이 기울어 가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부모님께 손 벌리기가 죄짓는 기분 이었습니다. 새벽부터 농사일을 하느라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을 볼 때면 저는 말없이 눈물만 삼켰습니다. 힘들어도 단기간에 돈을 벌고 싶어서 공장 아르바이트에 대해 이것저것 조사하고 있었습니다. 하계방학집중근로에 신청은 했지만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서 포기라는 수식어 가 쉽게 입에 붙어버렸습니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자기 위안을 하는 게 유일 한 행복이었지요.
학기가 다 끝나갈 때쯤 알 수 없는 곳에서 “국가근로 하실 건가요?”라고 전화가 왔을 때 친구 놈이 장난치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신청했다는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고, 합격후보라는 말에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습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나에게 다시 오나 싶은 그 간절함에 울고불고 수화기에 매달리며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담당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계방학집중근로가 도약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고규형 (금오공과대학교 전자공학부 3학년)
고규형 (금오공과대학교 전자공학부 3학년)
No pains, No gains
2014년 7월 1일 7시, 버스를 타고 첫 출근을 하였습니다. 제가 찾아간 곳은 경상북도 교육연수원으로 유치원 교사부터 중학교 교사까지 그들에게 참된 교육이 어떤 것인지 가르치는 곳입니다. 외부로부터 초청한 강사들도 오기 때문에 수업준비에 만전을 기해야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혹여나 문제라도 생기면 2~3시간을 허투루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교육기관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근로학생도 그곳에서 스파르타 교육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전자교탁이 어떤 시스템으로 작동하는지와 고장 났을 때의 대처법, 수업에 필요한 물건들은 어디서 공수해오는지 등 기본적인 것들을 배우고, 엑셀과 PPT, 포토샵까지 배우면서 문서작업들을 도맡아 했습니다. 3천 개가 넘는 명찰을 만들 때는 직원들의 위로와 관심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몸은 힘들지 않았지만 이것저것 신경써야할 것이 많아서 정신은 피폐해졌고 교육준비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직원들이 우리를 항상 가족처럼 대해주고 존중해주어 감동과 전율이 느껴졌고 덕분에 더 큰 존경심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는 연구사들을 보며 열심히 배웠고 밝은 교육계를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싶었습니다. 국가근로가 끝나고 되돌아보니 가족 같은 분위기에 즐겁게 일할 수 있음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집단 소속감이 어떤 것인지 배울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_루이 파스퇴르
두 달의 시간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지나가버렸습니다. 많은 것을 알려주신 연구사들과 주무관님들에게 감사했고, 서로 의지하며 정을 쌓았던 근로학생들과 이별할 생각을 하니 섭섭한 마음이 교차하였습니다. 그래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내딛어야 했습니다.
책값, 밥값, 학생회비, 기숙사비 등 많은 돈 이 필요해서 학기 중에도 국가근로에 몸담고 싶었습니다. 이곳저곳 교내의 여러 기관을 살펴보다가 교육기관인 인적자원센터Human Resource Department를 알게 되었고 물 만난 물고기 마냥 그곳에 지원을 했습니다. 교내 근로에 합격하기 어려운 이유는 면접으로 사람을 뽑기 때문입니다. 입사시험은 아니지만 11대 1의 경쟁률을 뚫기 위해서는 절실 한 마음으로 하고 싶다는 것 을 표현해야만 합니다. 교육연수원에서 일했던 경력사항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지 못 할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던 저는 패기가 넘쳐났고 면접에서도 긴장하지 않아서 좋은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습니다. 일반 아르바이트와 비교했을 때 한국장학재단 시스템의 가장 좋은 점은 근로시간을 기록으로 남길 수 있어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면접을 볼 때 이때까지 했던 모든 근로시간을 프린트해서 가지고 갔는데, 센터 팀장님이 저의 준비된 자세를 높이 평가하였고 전자교탁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센터에서는 문제가 생긴 전자교탁을 다른 업체에 맡기기가 부지기수라 제가 일하면서도 전자교탁을 고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저는 국가근로를 통해서 근로 학생이 아닌 전문적인 인재가 되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PAS 해외봉사 단체에 소속되어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해외봉사를 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던 엔학꼬레 초등학교 벽에 벽화도 그리고, Heaven 고아원에 있는 놀이기구 보수도 했다.
PAS 해외봉사 단체에 소속되어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해외봉사를 했다. 페인트칠이 벗겨져 있던 엔학꼬레 초등학교 벽에 벽화도 그리고, Heaven 고아원에 있는 놀이기구 보수도 했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_톨스토이
하계방학집중근로를 하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이 제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PAS라는 해외봉사 단체를 알게 되었고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이라 지원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태평양아시아협회PAS는 원조가 필요한 태평양아시아지역 12개 국가에 가서 우리나라 문화를 전파하고 한국어와 영어, 컴퓨터 등을 가르치는 교육봉사단체입니다. 어릴 적에 컴퓨터를 고칠 돈이 없어서 혼자 이것저것 뜯어보며 수리하기를 수십 차례, 자연스레 컴퓨터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고 컴퓨터 활용능력 1급도 취득했기에 그 나라 꼬마들에게 저의 지식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교육연수원에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자기소개서를 작성했고 남다른 봉사활동이 없어서 걱정했지만 무난하게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가 유일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악착같이 노력해서 장학금을 탔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났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장학금과 아르바이트에 매진해야 했지만, 이런 것은 봉사단체에 뽑히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서 합격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연수원에서 일한 사실이 교육봉사경력으로 인정되어 절망과 좌절을 딛고 꼭 가고 싶었던 해외봉사에 갈수 있었었습니다. 한국장학재단 덕분에 눈에만 아른거렸던 그림의 떡을 먹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도 국가근로의 활용성은 무궁무진합니다. 제게 튼튼한 돌다리가 되어준 것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고규형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사회적 기업을 세우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시제품 개발로 밤새도록 고민하다 맞는 새벽이슬에 삶을 느끼는 그는 연구실에서 레지던트를 하며 특허개발 준비를 돕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애로사항을 해결하는 수업으로 성현C&T에서 디지털장력디스플레이를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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