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 완전탐구 9회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인 송태진은 굿뉴스코 출신으로 2008년에 아프리카 부룬디에서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왔다. 지금은 인터넷방송국에서 뉴스 팀장으로 재직하며 본지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대학생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이번 달에는 그가 여름방학을 맞이한 독자들을 위해 무전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

 
 
케냐 나이로비에 자리잡은 동아프리카 교육원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들이 모였다. 케냐, 르완다,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곳곳에 흩어져 활동하던 동기들은 부쩍 성장한 서로의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각자 겪은 배꼽 잡는 체험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아프리카 사람인양 이를 드러내고 깔깔대며 웃었다.

9월 1일, 해외봉사단원들에게 내려진 특별 임무
동아프리카 지부장님은 우리에게 특별 임무를 주셨다. 바로 케냐 시골 배낭여행! 교육원이라는 익숙한 둥지를 떠나 낯선 곳에서 아프리카를 더 느끼고 오라는 것이었다. 얼핏 복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룰루랄라 놀러 가자는 말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이 여행에는 가져갈 수 없는 게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돈, 다른 것도 아니고 돈을 두고 가야한다. 길가의 허름한 화장실에서 힘 한번 줄 때도 사용료를 내야하는 케냐인데 빈 주머니로 어떻게 돌아 다니라는 건지!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해도 고생길이 될 게 뻔하다.
긴장한 우리에게 IYF 동아프리카 지부장님은 말했다.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마음가짐은 전혀 다릅니다. 이번 무전여행에서 많은 고난을 경험하며 여러분이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새로운 마음을 얻길 바랍니다.”
피해야 할 번거로운 방해물로 여겼던 고생은 사실 우리를 성장시킬 관문이었다. 생각이 바뀌고 나니 단원들은 불평하거나 뒤로 빼지 않았다. 오히려 가까운 지역으로 가게 된 팀은 더 먼곳으로 목적지를 바꿔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집 앞 마트 가는 것조차 귀찮아하던 평범한 대학생들이 아프리카 무일푼 유랑의 고생길에 뛰어드는 용감한 모험가가 된 것이다.

 
 
9월 2일 첫날, 느려터진 고물 트레일러
다음 날 아침, 20여 명의 단원들은 둘셋씩 짝을 이뤄 각자의 목적지―음팡가노, 카펭구리아, 미고리 등 이름도 구수한 시골 마을들로 출발했다. 나도 우간다 봉사단원 배정수, 박인환과 한 팀이 되어 ‘롱고’로 향했다. 짐이라고는 옷가지 조금과 수첩, 그리고 지도 한 장뿐.
차비가 없는 우리-여자 단원들은 차비를 받았다(!)-는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괄괄한 성인 남자 셋에게 자기 차의 뒷좌석을 맡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었지만, 케냐의 운전자들은 관대했다. 털털털 소음을 내는 낡은 화물 트레일러가 멈춰 섰고, 운전 기사와 조수가 환히 웃으며 우릴 손짓했다. 악수하고 껴안고 왁자지껄한 케냐식 인사를 나눈 후 좁은 운전석을 우리의 엉덩이와 어깨로 빈틈없이 채웠다. 뿡짝뿡짝 귀를 때리는 아프리카 음악이 흥겨웠다.
“잠보(케냐의 인사)! 태워줘서 정말 고마워요.”
“고맙긴. 외국인들이랑 같이 가니 좋은 걸. 카리부 케냐(케냐에 온 걸 환영해)!”
“롱고? 거기가 어디야? 처음 듣는데?”
그렇다. 우리의 목적지는 케냐 전국을 돌아다니는 화물운전기사에게도 생소한 촌동네였다.
“음… 그러니까 ‘나이로비’에서 ‘나쿠루’와 ‘케리초’를 지나면 ‘롱고’가 있어요.”
“하하. 잘됐네. 우리는 지금 ‘케리초’로 가고 있는 중이야. 같이 가면 되겠어.”
이런 횡재가 있나. 케리초는 우리의 목적지 롱고와 가까운 도시였다. 처음 잡은 차에 얌전히 앉아 있기만 하면 여행이 마무리될 판. 고생을 단단히 할 맘으로 출발했는데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일이 진행 되려 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이놈의 차가 이상했다. 속도계 바늘이 고작 시속 10킬로미터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고물인 건 알았지만 예상을 깨는 상식 밖의 속도였다. 백만 대 정도(!) 되는 슈퍼 카들이 우릴 추월해 달려갔고, 심지어 갓길로 타박타박 지나가는 당나귀 수레도 우리보다 빨랐다. 드라이브의 시원한 속도감 대신 달팽이가 끄는 유모차에 탄 듯한 갑갑함만 있었다.
결국 얼마 못 가 화물 트레일러와 작별했다. 운전기사는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어차피 같은 방향인데 함께 가자고 설득했지만, 우리는 아직 젊은 나이에 속 터져 죽을 것이 두려워 그의 호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화물 트레일러 기사들은 유쾌한 사람들이 많다. (왼쪽부터) 박인환 단원, 배정수 단원, 필자.
화물 트레일러 기사들은 유쾌한 사람들이 많다. (왼쪽부터) 박인환 단원, 배정수 단원, 필자.
나쿠루에서 보냈던 위험한 밤
느림보 트레일러를 떠나보내고 새롭게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친절한 케냐의 운전자들은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을 기꺼이 받아주었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차를 바꿔가며 이동했다. 우리가 봉사단원이라고 소개하면 케냐를 위해 애써주어 고맙다며 여비나 음식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매 끼니를 부족함 없이 보낼 수 있었다.

우리는 중간 기착지인 나쿠루에서 밤을 맞이했다. 밤 9시가 넘도록 히치하이킹을 시도했지만 더 이상 우리를 태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낮의 활기가 사라진 컴컴한 거리에는 왁자지껄한 양아치들과 음침한 걸인 몇 명만 서성였다. 저들이 언제라도 우리를 불시에 습격할 수 있다는 끔찍한 상상이 들어 간절하게 길 위에서 춤을 추었다. 그때 우리 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섰다. 조그만 중년 아주머니가 혼자 운전을 하고 있었다.
“잠보! 저희는 한국에서 온….”
“야, 이 녀석들아. 지금이 몇 시인데 길에서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야!”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우릴 꾸짖기 시작했다.
“케냐가 위험한 나라인줄 몰라서 이러고 있는 거야? 저쪽에 여관이 있으니까 빨리 가!”
“그게… 사실 저희가 무전여행 중이라 여관비가 없거든요. 헤헤.”
“맙소사. 왜 돈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아주머니는 취조하는 형사처럼 까칠한 질문을 여럿 던지더니 차를 몰고 가버렸다. 태워주지도 않을 거면서 잔소리만 진탕 늘어놓고 떠난 아주머니가 미웠다. 그런데 30분 후, 그녀가 돌아왔다. 길에 남겨진 우리가 걱정되어 남편과 함께 다시 온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남편은 우리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우릴 자기 집으로 초대한다고 말했다. 진짜로? 우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축구 선수가 골 세리머니 하듯 방방 뛰며 감사하다고 고함을 질러댔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위해 딸이 쓰는 방을 내주었다. 시원한 샤워도 할 수 있었고, 그 늦은 밤에 따뜻한 식사까지 대접받았다. 메뉴는 귀한 닭고기 요리. 까칠하게 우릴 혼내던 아주머니는 간데없고 무지개 너머에서 온 천사가 눈앞에 있었다. 자식 같은 젊은이들의 철없는 모습이 안타까워 화를 내던 아주머니의 마음이 우리 어머니와 닮아 더 가깝게 느껴졌다. 자정이 넘도록 아주머니 가족-우리에게 방을 빼앗긴 딸도 함께-과 우리들은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한 밤을 보냈다.

롱고의 길을 걷는 나.
롱고의 길을 걷는 나.
시골 마을 롱고의 귀한 식수.
시골 마을 롱고의 귀한 식수.
9월 3일, 롱고의 밤하늘은 어둡지 않다
아주머니 집에서 잘 먹고 잘 잔 우리들은 다음날 순조롭게 최종 목적지 롱고에 도착했다.
롱고는 면 소재지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현지 IYF 자원봉사자 ‘말로바’를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마을 주민의 집에 숙소를 얻어 여독을 풀었다.
말로바가 차려준 조촐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마당으로 나왔다. 가로등 하나 없는 케냐의 깡촌에서 맞이한 밤.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본 나는 갑자기 숨이 막히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밤하늘이란 까만 도화지에 흰 참깨 몇알 뿌려 놓은 듯 작은 별 몇 개 반짝이는 그런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적도 아래서 본 밤하늘은 어둡지 않았다. 지평선 끝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크고 작은 수천, 수만의 별빛으로 촘촘히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를 흐르는듯 환하고 거대한 빛의 물결이 있었다. 놀랍도록 밝고 광활한 광채-말로만 들었던 은하수-가저 높은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보지 못했던 장엄한 자연의 위압에 입을 벌린 채 경탄하고 또 경탄했다. 아프리카 시골에서 받은 잊지 못할 선물이었다.

9월 6일, 아프리카의 슬픔을 느끼며
롱고에서 휴식을 마친 우리는 나이로비로 돌아가야 했다. 오는 길에 받은 돈은 우릴 돌봐준말로바에게 모두 건네주고 다시 빈손이 되어 여행을 시작했다. 마을을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튼튼해 보이는 지프차가 멈췄다. NGO에서 일하고 있는 토마스는 고향에 들렀다가 회사가 있는 나쿠루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이동했다. 마침 달리는 차 창 너머로 새하얗고 엉성한 천막 수십 개가 밀집해 있는 게 보였다.
“토마스, 저기 하얀 천막들이 보이세요? 저곳은 뭐하는 장소예요?”
“저곳은 난민촌이에요. 작년에 케냐는 대통령 선거 이후 부족 간에 폭력 사태가 일어났어요. 그때 집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 임시로 만든 거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네요. 안타까워요.”
“… 사실, 그때 내 아들이 죽었어요.”
담담하게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는 토마스의 모습에 우린 숙연해졌다. 그는 말을 이었다.
“폭도들이 우리 집을 약탈하고 아들을 죽였어요. 아내는 그 충격으로 정신이 나가버려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어요. 사실 지금도 아들의 무덤에 갔다 오는 길이에요.”
토마스는 감정을 절제하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하루아침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슬픔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라도 공감해보려 귀를 기울였다. 책이나 매체를 거쳐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이곳이 아프리카임을 느꼈다. 유쾌함 속에 슬픔을 감추어 놓은 곳, 우리가 봉사해야 하는 곳….
나쿠루에 도착한 토마스는 우리 셋을 위해 나이로비로 가는 고속버스를 잡아주었다. 토마스와 헤어지며 그가 슬픔에서 자유로워지길 빌었다. 그에게 받은 은혜를 갚는 건 내 곁의 제2, 제3의 토마스에게 온 마음을 쏟는 일일 것이다.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는 기묘한 여행
여행은 단순히 다른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내게 없는 새로운 것을 배우는 시간이다. 출발 전날, 지부장님이 했던 말처럼 우리는 여행에서 어려움을 경험하며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마음을 배울 수 있었다. 무전 배낭여행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묘한 여행이다.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물살의 흐름에 몸을 맡긴 종이배처럼, 바람을 따라가는 풍선처럼 막연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나를 위해 내미는 그들의 작은 친절과 거기에 배어있는 따뜻함,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날 지에 대한 기대감, ‘세상에는 좋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는 당연한 깨달음.
분명 어려움 가득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한 걸음씩 발을 뗄때마다 감사를 느꼈고, 눈앞에 나타난 고난은 기쁨으로 덮어 넘어갔다. 돈이 없더라도, 어려움 앞에서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힘, 다른 사람이 베푸는 배려와 친절을 감사하게 받을 수 있는 낮은 마음. 여행은 우리에게 없던 새로운 마음을 알려주었다. 4박 5일 간의 무전 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일러스트 | 손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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