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봉사에서 의료봉사까지 이 부부가 사는 법

해외봉사 다녀온 지 어느덧 8년이 지난 박진영 씨. 그녀는 세상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남다르게 살아간다. 병원에서 쉴 사이 없이 환자들을 상대하고 파김치가 되어서 집으로 돌아가기를 10년 넘게 해온 그녀가 또 해마다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아시아로 의료봉사를 다녀온다니. 그녀를 지켜보는 지인들은 그녀야 말로 ‘아프리카의 나이팅게일’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발을 내딛고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성공하고 잘살아보겠다는 인생의 항로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마음의 목소리를 따라 다소 역행하는(?) 삶을 산다. 그녀가 독특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

 
 

 
 
박진영, 이 여자가 사는 법
6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착한 학생, 기특한 장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응급 구조사로 소방서와 병원에서 일하며 돈을 벌어 집안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20대 초반인 그녀가 응급실에서 겪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사건 현장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사람이 어느 날 쉽게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습니다. 일은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있었지만 행복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를 더 깊이 생각하게 됐습니다.”
박진영 씨는 26세가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지친 몸과 마음으로 더 이상 버텨낼 수 없는 자신을 보았다.
“그때 친구들이 한창 굿뉴스코로 해외봉사를 다녀왔는데 굉장히 의미있고 행복하다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선뜻 반기지는 않았지만 제 뜻을 이해해주셨어요. 그리고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퇴근하면 숨가쁘게 집으로 향해 잠을 자고 다시 출근하는 그런 일상에서 벗어나 가난한 아프리카에서 봉사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치있는 인생을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막상 아프리카 카메룬에 도착해서 생활해보니 힘들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그녀는 성격 좋게 너털 웃음을 날렸다.
“카메룬에 도착해서 처음 들은 이야기가 한국에서 되는 게 카메룬에서는 안 되고, 한국에서 안 되는 게 카메룬에서 되는 게 있다고 들었어요. 지부장님은 기준을 먼저 버리라고 하셨어요.”

피해갈 수 없었던 말라리아
두 달이 지난 후 음푸에 갔을 때 그녀는 자신이 경험한 정확한 기준과 관념(?)을 버려야 하는 일을 겪었다.
“첫날 피곤한 몸으로 잠을 자는데 현지인 친구 두 명과 잠을 잤어요. 저를 중앙에 두고 양 옆으로 누운 두 친구는 몸에 자신의 팔다리를 올리고 자기 시작했어요.
하루, 이틀… 날도 덥고 현지인에게서 나는 냄새도 익숙하지 않아서 결국 짜증을 냈어요. 그러자 현지 친구들이 말하는 겁니다. ‘진영은 백인이기 때문에 말라리아에 걸리면 힘들텐데 이곳은 시골이라 말라리아 모기가 많아. 그래서 우리가 보호해주고 싶었어. 우린 아파도 괜찮으니까.’ 피부색, 나라, 나이, 언어 그 어느 것 하나도 같은 게 없는데 그들이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그런데 친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에 걸렸고 심한 몸살을 앓으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버렸어요. 며칠 입원해 있으면서 친구들의 간호를 받았답니다.”
진영 씨가 오해했던 친구들은 집에서 음식을 해오고, 과일을 사 오고 밤새 곁을 지켜주었다. 진영 씨는 한국과 달리 아프리카 친구들이 순수하고 진심을 다해 자신을 대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 덕분에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지만 그 병원비는 그들의 월급이었고, 식비였고, 학비였습니다. 제가 먹고 토했던 음식은 그들이 끼니를 거르고 준 음식이었어요. 제가 아프다는 소식에 카메룬 야운데 본부에서 단원들이 라면과 김치를 들고 찾아왔어요. 아프리카에서는 볼 수 없는 소중한 음식이었답니다.”
그녀는 자신이 봉사를 하러 갔지만 오히려 민폐를 끼치는 부족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쥐구멍을 찾아 숨고 싶을 정도였다고.
“그렇게 아프리카에 있는 동안 저는 늘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입어야 하는 사람이었어요.”
현지 친구들과 지부장님, 단원들의 진심어린 사랑과 관심이 그녀의 황무지 같던 딱딱한 마음을 따뜻하게 적셨다.
“아프리카에서 지내는 동안 마음에서 미안함과 서운함, 고마움이 엇갈릴 때가 많았어요. 그렇게 참 많은 생각들이 제 마음에 아프리카를 심었습니다.”
 
 
또다시 아프리카를 찾은 이유
해외봉사를 다녀온 그녀는 꼭 다시 아프리카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때 아프리카 의료봉사단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카메룬 병원의 열악한 실정을 누구보다 속속들이 보고 온 그녀. 치료나 시설에 비해 터무니없이 비싼 병원비, 의료진 중 최고라는 간호사가 팔을 10번은 넘게 찔러서야 겨우 혈관 주사를 놓을 만큼 열악한 아프리카의 의료 실정이 생각났다.
“생계조차 어려운 그들에게 병원의 문턱은 너무 높아 아파도 제대로 의사를 만나 진료를 받아본 사람이 드물어요. 우리 의료봉사팀이 간다고 광고를 하면 2~3일 걸어서 찾아오는가 하면 밤새 문앞에서 자면서 기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뙤약볕에 서너 시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그들은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만나면 기뻐했고 행복해 했어요. 언제 또 올 거냐며 꼭 와달라고 손을 잡고 두손 모아 부탁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러 매년 가나, 토고, 베냉, 카메룬, 코트디부아르, 케냐, 말라위, 아이티, 도미니카, 피지를 방문해 의료봉사를 했고, 의료봉사로 매년 최고의 여름 휴가를 보냈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불행한 그들의 어떤 점이 그녀를 다시 아프리카로 가게 했는지 묻자 진영 씨는 아이티에서 만난 어느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이티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딸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 딸의 정강이는 심하게 꺾여있었다. 아버지는 이야기했다. 딸이 뛰어가다가 넘어져서 큰돈을 들여 병원에 갔는데 살이 찢어졌다며 꿰매주었다고. 하지만 그 이후 아이는 다시 걸을 수가 없게 됐다. 다치면서 뼈가 부러진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치하는 바람에 골절된 채로 굳어버린 것.
‘우리가 조금만 더 빨리 그곳에 갔더라면, 아이는 최소한 걷지 못하는 불행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그 안타까움이 그녀를 해마다 세계의 오지로 이끈다.
“토고에서는 한 할머니가 천으로 둘둘 만 남자아이를 품안에 꼭 안고 우리에게 왔어요. 아이의 이름은 안토니오였습니다. 태어난 지 5~6개월 이라고 했지만 누가 보기에도 너무 작고 힘없어 보이던 아이였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17세이고 아이가 젖도 제대로 빨지 못하고 축 처져 있으니 더 이상 재미없다고 아이를 두고 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아이는 아무것도 삼키지 않고 모두 뱉어낸다며 할머니는 이러다 죽을까봐 두렵다고 말했어요. 우린 안토니오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어요. 안토니오는 바늘에 찔려도 울 기력이 없어서 울지도 못했어요.
제 두 손가락보다도 가느다란 팔에 주사를 놓기 위해 수없이 바늘을 찔러야 했고, 할머니는 구슬픈 기도의 노래를 부르며 그 곁을 지켰습니다. 수액이 들어가는 동안 우리는 상자로 옷으로 찬바람을 막아주었고, 안토니오를 꼭 안고 너를 사랑한다고, 너는 살아야 하는 아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몇 시간 뒤 입을 열어 죽을 삼키기 시작했고, 우리와 눈을 맞추고 소리 내어 울어주기도 했어요. 정말 놀랍고 신기했어요. 우리 봉사단은 안토니오가 살아난 반응 하나 하나에 감동하고 기뻤습니다.”
안토니오의 할머니는 다음날 그녀를 찾아와 ‘너희가 이 아이를 살렸다’며 고마워했다. 어떤 특별한 약을 쓰거나 비싼 치료를 한 것이 아닌데, 한번 더 안아주고 만져주고 말을 걸어준 것뿐이었는데 아이의 상한 마음이 회복된 것을 알게 되었다.
 
 
 
 

 

 

 

 

 

 

 

 


박진영 씨는 사실 자신에 대해 ‘지독한 개인주의자’였다고 고백한다.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장애를 갖든지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수천 명 중 만난 한 명 한 명의 아이들이지만 자신의 손길이 그들의 상처를 아물게 하고, 상처입은 마음에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삶의 존재감을 깨닫게 됐다고. 해마다 그렇게 여름이 되면 그 먼 아프리카로 지난해 만났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기 위해 간 지가 벌써 수년째다.
“타인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타인의 행복이 나에게 더 큰 행복을 전해준다는 사실을 아프리카에서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것이 그녀가 봉사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인생 길에 그녀는 자신을 위해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고 행복한 길을 걷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를 본 주위 많은 사람들은 그녀 때문에 걱정했다. 어떤 이는 누가 당신같은 사람과 인생을 함께하겠느냐고 그만 정착하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진영 씨는 주변의 그런 우려를 깨뜨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좋은 남편을 만났다. 남편 이통영 씨와는 결혼한 지 올해로 만 2년째가 된다. 한창 깨 쏟아질 신혼이다. 그녀는 남편의 손까지 끌어 의료봉사길에 손잡고 나선다.

 
 
“남편과 지난해 11월 피지를 다녀왔습니다. 맑고 순수한 현지 환자들을 대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우리 또 오자. 전부는 아니지만 당신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아. 피지에서 의료봉사에 함께할 수 있어서 고맙고 행복해’ 하고 말하는 겁니다. 지금도 가끔 남편과 그때의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올가을 아이가 태어날 예정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셋이 함께 봉사를 하러 다녀오자고 다짐하곤 한다.
“너무 다른 두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사니 하나하나 서로의 것을 받아들이고 공유하며 이해의 영역을 넓히고 만들어가야 되더라고요. 상대가 행복하지 않으면 저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상대가 기쁘면 내게 더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향한 배려로 행복합니다.”

이통영, 이 남자가 사는 법
통영 씨가 결혼할 당시 박진영 씨는 이미 굿뉴스의료봉사회 활동으로 이름을 꽤 알려져 있었다. 통영 씨는 그런 아내에 비하면 부족한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일 때문에 해외에 다닌 적은 있어도 아내처럼 봉사를 하기 위해 해외에 가본 적은 없었다. 통영 씨는 결혼 후 2달이 지나서 아내로부터 “아프리카 의료봉사를 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던 그는 아내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
“아내가 의료봉사회 시즌이 되면 도와줄 일이 많다며 짐을 챙겨주고 지친 모습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계속 몸이 좋지 않아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의료봉사를 간다고 하길래 사실 조금 불편한 마음이 있었어요. 다음에 가라고 했죠. 마침 에볼라가 국제적 이슈가 되면서 의료봉사회의 아프리카 행이 취소되었다는 것을 아내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아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겁니다. 왠지 제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아내의 몸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면서 아이도 갖고 좀 편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11월, 의료봉사 이야기가 또 나오게 됐습니다. 지난 번엔 반대를 했으니 이번에는 보내주자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아내가 미얀마와 피지를 다녀온다고 말하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아내가 좋아하니 나도 같이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비행기 값이 부담되더군요. 좀 갈등이 됐어요. 그런데 아내가 의료봉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다녀오면 뭔가 얻어오겠다는 마음도 들었어요. 그래서 준비를 해서 갔어요.”
회사에서 휴가를 받는 일부터 출국하는 일정까지 준비하면서 내심 긴장됐다는 그였다. 고등학교 때 내신을 올리기 위해 봉사를 해본 적이 있다는 그의 솔직한 이야기. 한편 봉사활동을 해본 적이 없는 그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염려가 되어 아내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의료봉사에 필요한 짐을 나르는 일, 환자가 오면 줄을 세워야 하는 일, 시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환자들 가이드하는 일까지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도착한 날부터 환자를 분류하는 작업에, 안과, 내과, 부인과 등등 환자의 상태에 맞게 보낼 수 있도록 분류작업을 했어요. 진료를 받은 사람들이 약을 받도록 약국에도 보내는 일을 하면서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정말 순수하게 보였습니다. 의료봉사를 돕는 현지인들도 순수하고 참 똑똑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해달라는 것을 모두 수용하고 협조적으로 일하는 태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피지는 남태평양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강한 자외선의 영향으로 안질환을 겪는 환자들이 많다. 통영 씨도 환자들의 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현지인들은 한국에서 준비해간 선글라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피지에서 선글라스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부유층이다. 피지의 선글라스 가격은 50만 원 이상으로, 이는 현지인의 한 달치 월급과 맞먹는 금액이다.
“동행한 안경사님도 예상치 못한 인기를 누리며 정말 좋아하셨어요. 하루에 몇 번씩 비가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했는데, 그럴 때마다 의료봉사 접수데스크를 몇 번씩 바꾸기도 했어요. 바람도 많이 불어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짜증이 날 만한데, 밖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은 전혀 그런 내색 없이 아무말 않고 기다렸습니다.”
피지는 의료혜택이 없는 가난한 나라여서 인구 약 4만명 당 1명의 의사가 있는 정도의 수준이다. 의료 혜택이 절실히 필요한 나라인 만큼 의료봉사팀의 활약이 사람들의 가슴에 크게 남았다.
“제가 평소 생각했던 아내와 환자들에게 계속 도움을 주는 아내의 모습은 전혀 달랐어요. 어린 아이의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의료봉사에 열성적인 아내가 점점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런 아내와 함께 의료봉사를 온 사실이 너무 뿌듯했고 마음 한켠에 알 수 없는 힘이 생겼습니다. 아내처럼 남에게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정말 감사했어요.”

 
 
박진영, 이통영 부부는 결혼한 이후 서로 싸우거나 다툰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 약간의 서운함 때문에 속이 조금 상할 정도라고. 아내와 함께 1년 남짓 보내면서 그 자신이 아내보다 부족하다는 것을 참 많이 느낀다고.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배울 점이 참으로 많다. 때때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친구처럼 느껴지는 아내는 그 누구보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배필이라고.
“자동차로 운전해서 목적지까지 가다 보면, 좌회전, 우회전, 유턴, 후진, 멈춤, 출발 등의 조작을 통해서 목적지로 가죠. 결혼생활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가다가 잘못 들어서면 유턴도 하고, 좌회전도 하고, 멈추기도 하잖아요. 아무리 좋은 차라도 브레이크가 없으면 멈출 수가 없어서 쓸모 없듯이, 양보한다는 것이 결혼이라는 자동차에 있어서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중요한 포인트 같아요.”
두 사람은 서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 한 몸을 이루며, 서로에게 귀 기울여주고, 서로의 삶에 길잡이가 되어주는 부부여서 행복해 보인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정신을 발휘해 보니, 자신의 주장보다 서로의 입장을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지혜까지 얻었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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