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morrow 손편지 대회' 대상 수상, 박민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에게도 잊고 싶지만 도저히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불안정했던 제 어린 시절 일들입니다. 저와 아버지, 둘 모두에게 아픔을 주는 기억들이지만, 더 이상 피하지 않고 편지의 힘을 빌려 진작해야 했던 이야기들을 해볼까 합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부모님’ 하면 포근함, 따스함, 자애로움, 사랑 등과 같은 긍정적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모님 하면 불화, 싸움, 두려움, 대립, 복수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 저의 생활은 부모님의 잦은 갈등으로 크고 작은 풍랑의 연속이었고, 안락해야 할 집은 풍랑을 못 이기고 매번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살벌한 육탄전에 평소 우리 가족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던 그릇과 접시들은 바닥으로 튕겨져 나갔습니다. 바닥에 내리꽂혀 더 이상 자신들의 본분을 수행하고 싶지 않은지 자연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두 분이 매일 입에 달고 살던 소주병들은 산산이 조각나 보석처럼 아름다운 초록색 빛을 띠며 바닥에 흩뿌려졌습니다. 할머니께서 추운 겨울날 오로지 식구들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시린 손을 비벼가며 담근 신김치가 담긴 통마저 부서져 바닥을 발갛게 적셨습니다. 집에서 진동하던 김치의 신내는 할머니의 정성을 비웃는 듯했습니다.

아버지와 엄니는 다투실 때면 항상 서로에게 잘못을 떠넘기기 바빴습니다. 잔혹하게 어질러진 집은 그런 두 분의 당당함을 상징하듯 며칠 동안 방치된 채 아무도 치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풍경에 익숙해져 아무렇지 않게 생활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유리조각 사이를 헤치고, 아직 깨지지 않은 밥그릇에 전날 남은 밥을 담아, 반숙을 한 계란 프라이를 얹어 간장을 넣고 비벼 먹으며 끼니를 때웠습니다. 저는 허기를 달래면 집안에서 저만의 ‘태풍의 눈’이었던 컴퓨터 앞에 앉아 사이버 세계를 방황했습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컴퓨터 앞에서 보냈습니다. 제게 유일하게 행복한 순간은 컴퓨터 속 세계를 모험할 때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직면하기에 너무나 가혹했던 가정환경을 회피했습니다. 그런 나날들이 반복되다가 한두 해씩 시간이 흘렀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교 겨울방학, 제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힘들었던 사건들을 맞이합니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두 분은 결국 크게 다퉈 별거하게 되었습니다. 두 분은 인내심이 한계치에 도달했는지 이혼까지 결심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두 분이 다투시면, 항상 멀찌감치 떨어져 방관하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혀 딴 세상 일이던 부모님의 갈등은 이혼을 앞두자 저에게 선택의 기로를 만들었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이 만들어 낸 선택의 무게는 어린 제게 너무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두 분의 결심은 확고했고, 저는 두 분의 결심에 마침표 역할을 해야만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고민 끝에, 어머니에 대한 애착 때문에, 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행사하던 폭력에 대한 강한 인상 때문에 어머니와 이후의 삶을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민오야, 너를 잘 키우고 싶었지만 돈 문제 때문에 너를 키울 형편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민오야. 미안하다”라며 저를 친할머니 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어머니의 사정을 이해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어머니에 대한 혹은 저에 대한 시선이 좋지 않았던 고모들은 제가 미처 아버지와 대면하기도 전에 저를 다시 어머니 품으로 보내버렸습니다.
 
 

두 번씩이나 버려지자 어렸던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나라는 사람의 존재 의미가 무가치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가지 않고 무작정 갈 곳 없이 떠돌아다녔습니다. 이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하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만 같았습니다. 수중에는 단돈 몇 만 원밖에 없었고, 추운 겨울을 버티기엔 한없이 모자란 잠바 하나뿐이었습니다.

낮엔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밤엔 어머니가 살고 있는 아파트 계단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아무에게도 그 처량한 신세를 들키고 싶지 않아 인적이 드문 곳만 돌아다녔고, 쪽잠을 자다가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일어나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나를 우연히 발견해 구원해주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기대감에 잠은 항상 한때 우리 집이었던 아파트의 계단에서 잤습니다. 아파트 계단에서 보내기에 겨울날의 새벽은 무척이나 춥고 길었습니다.

아버지, 이때 제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도둑질도 해봤습니다. 저는 남의 물건을 탐내본 적은 있으나 단 한 번도 훔쳐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노숙 3일째가 되는 날, 여기저기를 무작정 떠돌다가 우연히 허름하게 생긴 낯선 주택가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주택가 사이를 걷고 있는데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구멍가게는 문이 열려 있었고, 열린 문틈으로 진열된 빵들이 보였습니다. 언제까지 노숙을 할지 기한이 없던 저는 수중에 돈이 있음에도 빵을 훔치고 싶은 강한 욕구에 휩싸였습니다. 가게 주인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위에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저는 무언가에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들어가 진열대 앞으로 갔습니다. 손만 뻗으면 빵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비행을 지켜보던 양심이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잠시 주저했지만 곧 빵이 손에 있었고 저는 골목들을 헤치며 가게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뛰었습니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발을 멈췄습니다. 인도 가장자리 턱에 앉아 오랜 시간 동안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렸지만 쉴 새 없이 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손에 들려있는 빵을 확인하자 뒤늦게 양심의 가책이 밀려왔고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너무 후회됐고 제 자신이 초라해졌습니다.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했고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문득 아버지가 떠올랐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저를 직접적으로 내치신 적이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고모들이 결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 아버지에게 연락했습니다. 솔직히 아버지에게마저 버려질까 봐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긴 말 않고 저를 데리러 바로 와주셨습니다. 저를 걱정해주셨고 미안해하셨습니다. 본인 일처럼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저에게 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냥 제 자신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저를 뒷바라지해 주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휘두르던 폭력이 싫었습니다. 아버지가 제 얼굴에 부벼대던 까슬까슬한 턱수염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를 똑바로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저를 아들로 사랑해주시고 인격체로서 존중해주셨습니다.

사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폭력적이었지만 저에겐 체벌 한번 해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매번 제가 잘못할 때면 “너! 아빠 화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제!” 하며 겁만 주실 뿐이었습니다. 말투는 매우 험하고 거칠지만, 언제나 저를 응원해주시고 제가 힘들 때면 버팀목이 되어주셨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들어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는데도 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주시고 자랑스러워해 주셨습니다.

솔직히 제 어린 시절은 아직도 저에게 상처로 남아있지만 원망하진 않습니다. 무척이나 험난했던 과거가 저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기 때문입니다. 힘든 일들을 버틸 수 있는 인내와 끈기를 주었습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저를 생각해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꿈과 목표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사실 심리학과에 진학한 이유는 상담사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상담사가 되어 저와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그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그들에게 밝은 미래를 비쳐주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의 꿈을 응원해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절 믿어주셨으니까요.

 
 
그리고 아버지, 실은 아버지에게 고백할 게 있습니다. 고등학교때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면 가금씩 “너, 느그 엄마랑 연락하지?” 하며 저를 넌지시 떠보셨죠? 네. 사실 연락했었습니다.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왔습니다. 그러곤 울면서 잘못했다고 미안하다고 사정하는데, 아들로서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나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용서하고, 아버지가 사주신 휴대폰으로 간간이 연락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연락하면 어머니는 계속 저의 안부보다 아버지의 근황을 물어봤습니다. 약점이라도 하나 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마치 제가 스파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엄마, 나 내가 무슨 스파이가 된 느낌이야. 제발 아빠 얘기 좀 그만 물어봐 줘. 부탁이야. 아빠에 대한 미련을 그만 버려”라며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잠시 잠잠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위해 노력하시는데 저는 어머니의 스파이 노릇을 하는 그런 상황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예전에 형편이 어려워서 나를 아버지에게 보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했던 말들도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를 도구로 이용하려고 했던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머니와 크게 다투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 후로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어머니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정말 완전히 정을 떼고 인연을 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사랑이 그립습니다. 전우들이 휴가 나갔다가 복귀해선 “역시 집밥이 최고야.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맛있는 건 없지” 하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말들에 부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연락이 끊겨 이젠 연락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역하면 어머니를 직접 찾아 나서볼까 합니다. 어머니를 만나서, 다시 어머니의 스파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미련을 떨치게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아버지, 죄송합니다. 아버지가 싫어하실 거란 걸 알지만 더 이상 비겁하게 숨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라면 언젠간 꼭 후회할 것입니다. 피하기만 한 저를 자책할 것입니다. 제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머니와 나누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에게도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그만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밝은 미래만 보고 부족한 인생에서 마음속 깊이 상처로 남은 과거가 매번 저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니 마음속 깊은 곳의 묵은 응어리를 토해낸 느낌입니다. 벌써 계절은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완연합니다. 이제 저도 제 인생에서 무척이나 추웠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따스한 봄을 맞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이상하게 그리운 것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어렸을 때 제 얼굴에 부벼대던 까슬까슬한 턱수염이 그립습니다. 아버지 고유의 냄새가 돼버린 퀴퀴한 담배 냄새가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약주 하신 날이면, 근엄한 모습을 버리고 친구처럼 장난을 걸며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주사가 그립습니다. 아버지가 서투르게 표현하는 진한 사랑들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다시 기회가 오면, 아버지의 사랑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싶습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온몸에 새겨 넣고 싶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쓰고 나니 아버지가 더 보고 싶어집니다. 아버지, 다음 휴가 때를 기약하겠습니다. 아버지 혼자 기울이고 있을 외로운 술잔을 함께 거들기 위해 금방 찾아뵙겠습니다.
아버지, 이번 휴가 때는 그간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던 애정표현들을 해볼까 합니다. 아버지의 까슬까슬한 턱수염을 부비러 가겠습니다. 당황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거니 마음의 준비하고 계시길 바랍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2015년. 3. 29일
아버지의 아들 민오 올림
 

 
 
손자를 보면
뭐라도 해주고 싶답니다

남들 다 가는 학원 한번 다닌 적 없는 우리 민오가 광주에 있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줘서 고맙고, 이번에 손편지 대회에서 대상을 탔다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지금은 두 다리 뻗고 잠을 자요. 민오는 동네에서 다 칭찬을 할 정도로 순해요. 특별히 손자 때문에 마음고생 한 적은 없는데요. 민오를 볼 때마다 엄마가 있으면 집에 올 때 다독거리고 반갑게 맞아주겠지만, 이야기는 안 하지만 속으로 참 짠해요.
착하디 착한 우리 손자, 고맙구나!

 


취재 도움 | 정수연, 서영란, 이소영, 김경순 객원 기자
디자인 | 이가희 기자  만화 | 손정아
마케팅 | 윤태현 실장, 이순영 팀장, 전미경, 박경희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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