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의 추억

현재 IT 프로그램 개발회사의 금융부서팀에서 일하는 전엘림. 6년 전인 2008년 그녀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황열병에 걸렸다. 황열병은 100% 치사율을 가진 아프리카 현지 병으로 당시 그녀는 죽음 직전에서 헤맸다. 무엇이 그녀에게 죽음보다 강한 생명력으로 다시 걷게 했는가?


소프트웨어 개발이 전공이었던 전엘림 씨는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 가기 전에 ‘반드시 전공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예술과 인문학 성향이 강해 자퇴까지 결심했던 그녀는 잠시 휴학하고 코트디부아르에 다녀왔다. 그녀의 심경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한편 아프리카로 떠난 전엘림, 그녀에게 닥친 큰 시련의 풍토병, 100% 치사율을 가진 황열병에 걸렸는데....

어린 시절 나는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 학급 게시판의 급식 미납자 명단에는 항상 내 이름이 있었다. 물려받은 교복 치마는 다 닳아서 항상 번들거렸다. 내 주위에서는 내가 가장 가난했다. 그게 마음에서 한이 됐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뭔가 베풀어줘도 입으로만 ‘감사하다’고 말했지, 마음에서는 당연하게 여겼다. 난 가난하니까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날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유독 감사함에 무감각했다. 그냥 그렇게 철없이 살았다. 중학교 때는 이런 상황이 너무 싫어서 학교도 안 가고 엄마한테 울면서 떼쓰기도 했다.
“엄마, 나도 쟤처럼 멋진 옷 입고 싶어요.”
나는 항상 남을 부러워했다. 뭘 해도 만족하지 못했다. 대학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못 가고 지방의 국립대에 들어갔다. 그런 현실 속에 불만이 컸다. 나는 변하고 싶었고 돈에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가려고 워크숍에 참석했다. 선배들의 아프리카 체험담을 듣다가 나도 사랑을 경험하고 싶어서 코트디부아르를 지원했다.
 
 
 
 

 

 

 

 

 

  

 

 

 

 




이것이 진정한 아프리카 체험
코트디부아르에 도착한 저녁 8시, 공항에 내렸을 때에 한증막에 온 것처럼 뜨거운 기운에 숨이 막혀왔다. 굿뉴스코 센터에 도착했을 때, 현지 학생들이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다. 그들은 사탕목걸이를 만들어 우리에게 걸어주었다. 우리는 그들이 준비한 공연을 보면서 즐거웠다. 우리를 위해 춤을 추면서 행복해 하고, 만날 때마다 밝은 웃음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벌써 그들의 마음에 반해버렸다.
2008년 4월, 나는 다른 단원과 코트디부아르의 ‘뽀부웨’라는 지역으로 갔다. 아프리카 밀림을 상상하며 갔지만 의외로 그곳은 작은 도시여서 차도 다니고 기대했던 것보다 잘 살았다. 하지만 아프리카가 왜 어렵다고 하는지 알게 되었다. 세탁기로 빨래했던 것,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었던 것 등 내가 한국에서 누린 모든 것들이 그곳에서는 사치였다.
그곳에서 나는 우물물을 사용해야만 했다. 물을 펐는데 노오란 소변 색이었다.
“웩, 이 물 왜 이래? 언니, 이거 안 쓰는 우물인가 봐요. 색깔이 이상해요!”
노란 우물물을 보니까 손도 씻기 싫고 그 줄을 잡기도 싫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물로 밥을 해서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체념하고 그 물을 썼다. 시간이 지나자 물이 부족한 그곳에서는 그 물조차 다 소중하고 좀더 깨끗한 물이었다. 손도 씻고 목욕도 했다. 샤워할 때는 물 한 양동이를 받아서 둘이 씻었다. 막상 처음에는 그물을 어떻게 퍼서 씻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양이 모자라서 샤워 도중에 비눗물이 들어가서 씻어도 찝찝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물 한 동이로 샤워하고 머리 감고도 물이 남았다.

처음 맛 본 말라리아?!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열이 났다.
“나도 드디어 말라리아에 걸렸구나! 아프리카에 오면 으레 걸린다고 하던데.”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일단 아프기 시작하니까 몸이 힘들었다. 낮에는 열 때문에 견딜 만했지만, 밤에는 열이 내려가서 자고 있으면 온몸이 얼음장이 됐다. 그래서 옷을 많이 껴입어도 계속 추워 벌벌 떨었다. 허리가 너무 아파올 때면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할지 몰라 두렵고 견딜 수 없어서 펑펑 울었다.
옛날에 내가 아프면 아빠가 기도해 주시던 게 생각나서, 언니한테 기도해 달라고 했다. 기도하려고 엎드렸는데, 그것조차 힘들어서 침대에 폭 쓰러져버렸다. 하지만 너무 아파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0분 이상 잠을 못 자니까 정신과 체력이 많이 저하되었다. 지부장님이 계신 아비장으로 돌아갔지만 증세는 더 심해졌다. 그때부터 먹기만 하면 모두 토했다. 나중에는 위액을 토했다. 입맛도 쓰고 힘도 없고 머리도 어지러웠다. 사람들이 말하고 일하는 것을 볼 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행동 같았다. ‘윙, 윙’ 소리가 들리고 움직임도 흐릿하게 보였다. 지부장님이 링거 주사를 놓아 준다며 의사를 불렀다. 주사약이 일시적으로 배를 좋게 만들어 밥을 먹게 만들어줬다. 그래서 모두들 내가 다 나은 줄 알았다. 지부장님의 사모님은 나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물었다.
“뭐 먹고 싶니? 지금 많이 먹어야 빨리 말라리아가 낫는 거야.”
“사모님, 요플레 먹고 싶어요.”
사모님은 한마디에 정말 기뻐하시면서 당장 우리 형편에 먹을 수 없는 최고급 요플레를 사다주셨다. 그런 음식은 지부장님 가족 누구도 먹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친부모님도 아닌데 나를 위해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다. 하지만 증상은 계속되었다. 속이 울렁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일어설 수도 없었다. 토하고 싶은 기분이 계속 들었다. 정말 죽을 맛이었다. 토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결국 그 전날 먹었던 음식을 다 토했다. 너무 힘들어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도 없던 나를 같이 있던 언니가 씻어줬다.
‘내가 왜 이런 곳까지 와서 다른 사람이 나를 씻어줘야 하며, 난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해야 하지?’내가 너무 비참해 보여 생애 처음으로 그렇게 한스럽게 펑펑 울어 봤다. 그날 밤도 나는 다시 찾아온 고열과 씨름을 해야만 했다. 말라리아를 고쳐보려고 전통치료법, 식이요법 등 온갖 수를 다 썼지만, 나는 더 심각해져갔다. 이제 방법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들이 과일과 삶은 달걀, 엄청 매운 아프리카 고추를 주면서 권했다. 그들이 정성스레 가져온 음식 앞에서 나는 싫다고 소리만 질렀다. 이런 일들이 반복됐고 체력은 바닥이 났다. 나중에는 피를 토하기도 했다. 나는 그냥 ‘말라리아 때문에 힘들어서 그런 걸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선교사님은 심각하게 여기셔서 링거 주사를 다시 놓으려고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아내가 아이를 낳는 바람에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나를 개인병원으로 데려가셨다.


 
 
치사율 100% ‘황열병’!
“엘림아, 우리 피 검사를 해보자. 이렇게 검사하고 약을 처방 받으면 빨리 나을 거야. 여기에 한국 대학생들이 많이 오는데, 걔들이 말라리아에 걸릴 때 이렇게 하니까 빨리 회복되더라.”
우리가 개인병원에 도착해서 피 검사를 받으려고 하니 그 의사는 우리에게 노발대발하면서 검사를 안 해주려고 했다.
“나는 이곳에서 10년 동안 의사생활을 했어요. 이 소녀가 말라리아와 장티푸스로 아픈 게 너무 확연하게 보이는데, 왜 검사를 해야 하나요?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겁니까? 왜 못 믿는 겁니까?”
검사를 안 해주려는 의사와 실랑이를 벌여 결국 피 검사를 했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작은 병원에 입원했고, 거의 기절한 듯이 잤다. 갑자기 내 주위에서 조금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눈을 살짝 떴는데, 사모님이 거의 울먹이듯 현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엘림아, 일어났니? 지금 네 피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혈소판과 백혈구에 문제가 있대. 너 한국 가면 병원 가서 꼭 검사 다시 받아봐. 알았지?”
사모님이 정신 못 차리면 안 된다고 하면서 깨웠는데, 너무 졸려서 다시 잠이 들었다. 자는 동안 나는 다른 병원으로 이동됐다. 정상인의 혈소판 수치가 13만인데 내 수치는 그 10%인 13,000밖에 안 되었다. 말라리아로는 이런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면서 병원 측에서 혈액을 프랑스로 보내서 다시 정밀검사를 의뢰했다고 하셨다. 지부장님도 서부 아프리카에서 제일 큰 ‘피잠PISAM 병원’에 나를 입원시켰다. 피잠 병원으로 이동할 때 힘이 없어서 가다가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당시 내 혈소판 수치는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해서 다시 진찰을 받았을 때 모든 사람이 경악했다.
“이 혈소판 수치는 막 죽은 사람에게서 뽑아낸 피에서 나오는 수치와 비슷합니다. 이 수치에 이르면 목에서 피가 나올 수 있는 구멍에서 피가 다 나와서 죽어야 합니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에 계신 박옥수 목사님의 전화를 받았다.
“엘림아, 네 소식을 듣고 내가 기도했어. 그러던 중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이 모든 일 안에 너의 병도 들어 있어. 너는 그 병을 넉넉히 이길 수 있단다.”
‘왜 박 목사님이 이런 얘길 하시는 거지? 내 병이 심각한 건가?’
비몽사몽 중에 전화를 받아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목사님의 기도와 말씀으로 신기하게도 마음에서 힘이 났다.
다음날부터 죽도 조금씩 먹기 시작해서 점차 회복되었다. 퇴원했을 때에는 프랑스 병원으로부터 내가 황열병에 걸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아프리카에 가는 모든 사람들은 황열병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기에 나도 예방주사를 맞아서 황열병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보건소에서는 내가 옮겨 다닌 병원을 다 소독하고 전염검사를 하기 위해 집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의 피를 뽑아갔다. 지역 도시에서 만난 사람들 모두가 전염되지 않도록 피를 뽑고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나에게 왔다.
“엘림, 넌 부활한 아이야. 우리 옆 동네 사람이 똑같이 황열병에 걸렸는데, 그 사람은 이미 죽었어. 그거 알아? 황열병은 치사율 100%야. 이건 기적이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사랑
만일 그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면 나는 죽어야 했다. 병원 오기 전에 내가 코피가 나서 지부장님이 목 뒤를 주물러주셨을 때 피가 멎었다. 그때 내 혈소판의 수치로는 절대 지혈이 불가능한 일인데 말이다. 황열병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 사랑이 내 마음을 녹여주었고, 드디어 내 마음에 사람들의 발자국이 나기 시작했다. 겨울에 땅이 얼면 아무리 발로 밞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 것처럼 내 마음은 딱딱하고 삭막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밥을 먹을 수도 없었고, 혼자 볼일을 볼 수도 없었다. 건강할 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아프니까 모두 고맙게 느껴졌다. 스스로의 힘으로 밥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감사했다.
알배라는 친구는 내가 아무 생각없이 던진 말에 온 마음을 보여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배가 내 차비인 200프랑(500원)를 내줬는데 나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물었다. 장난치듯 물어보는 그에게 나도 가볍게 “설탕빵”이라고 대답했다. 돈이 없다는 그의 말에 그날 내 차비를 내느라고 돈을 다 써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돈을 다 쓰면서 기쁜 마음을 갖는 그에게 고마웠다. 순수한 아프리카 사람들의 마음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게, 또 한없이 감사하게 만들었다.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
코트디부아르에서 나는 치사율 100%인 황열병에 걸려 사경에서 겨우 살아났다. 병원비 때문에 현지 사람들의 돈을 많이 썼다. 그 돈은 센터를 지으려고 가난한 형편에 아껴 쓰고 모아둔 돈이었다. 퇴원하고 나서 그들이 다시 그 부지 비용을 걱정할 때마다 내 어깨가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내가 나은 것을 기뻐하며 나를 더 챙겨주었다.
온몸의 구멍으로 피가 나와 죽어야만 했던 나는 사랑에 크게 힘입어 살아났다. 1만 3천으로 내려갔던 혈소판 수치도 14만 9천으로, 정상인 수치보다 높았고 나았다. 이 일을 통해 내가 얼마나 하찮고 작은 존재인지 알았다. 나보다 더 가난하고 불쌍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나를 품어주고 사랑해 주는 것을 보면서 조건 없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보낸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 또 받은 마음은 내 인생 중 가장 큰 선물이었다.

 

 
 
 
 

사랑하는 우리딸 엘림이에게
엘림아 벌써 2015년 봄이 가고 있네~
엘림이가 황열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가 어제 같은데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때가 많아. 그런 우리 엘림이가 건강하게 서울 한복판에서 소프트웨어 개발을 해가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견스러운지.... 코트디부아르를 잊지 못해 소프트웨어 개발 기술을 익혀 그들에게 전수해주고 싶어하는 너를 보면 아프리카가 너에게 준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어.
엘림아, 엄마는 우리 엘림이가 있어서 너무 행복할 때가 많아. 엄마는 너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도 통하는 것이 많아서 그게 좋아. 그런 건강하고 사려깊고 폭 넓은 마인드를 우리 엘림이에게 형성시켜 준 그 어떤 배경이 무엇일까?
굿뉴스코가 우리 엘림이에게 준 마음가짐이 나는 정말 감사해. 얼마 전 사이판에 휴가를 가서 직장 동료들이 저녁 시간에 술자리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고 허망했다는 네 이야기가 생각나. 굿뉴스코 안에서 보낸 몇 년이 우리 엘림이 마음을 그렇게 폭넓게 사고하고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었구나.
엄마는 우리 딸을 그렇게 키워준 굿뉴스코가 정말 고마워~ 엄마는 가끔 너를 보면 놀라울 때가 많아! 직장 상사들도 잘 섬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잘 따라주는 너를 보면 어디에서도 잘 적응하고, 어떤 책임을 맡아도 해내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해! 엘림이 얼마 남지 않은 봄, 마음껏 즐기고 봄의 연초록 기운을 마음껏 저장해보렴~ 건강하고 밝은 한 해 보내길 바래
                                                                               
                                                       2015년 4월 29일 엘림이를 사랑하는 엄마가


사진 | 홍수정 기자  디자인 | 김진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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