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근로장학사업 우수사례 수기공모전 우수상

“엄마, 저는 그래도 서울로 가고 싶어요.”
대학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내가 엄마에게 드렸던 말이다. 그때 당시 나는 내가 살던 광주의 국립대학교의 사범대학과 강원도 춘천의 국립대학교의 사범대학, 그리고 서울의 사립대학교의 일반학과 이렇게 세 곳에 지원하여 합격했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도 잠시, 넉넉지 못한 형편의 집안 상황을 고려하며 어머니와 오랜 상의를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학비부담이 커 내가 광주에 머무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나는 확신에 찬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다. ‘서울로 가서 많은 경험을 쌓고 싶다’고. 어머니는 고심 끝에 이내 ‘알겠다’고 짤막하게 대답하셨다. 자식을 더 좋은 곳에서 공부시키고자 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똑같을 것이다. 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서울행을 재고할 것을 권유했던 어머니의 그 마음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하신 후 어머니는 형과 나를 줄곧 뒷바라지 해오셨다. 이미 형은 나보다 4년 먼저 서울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어머니는 나까지 서울로 보내는 것이 아마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탓에, 나는 나 스스로와 한 가지 약속을 했다. 내가 강력하게 원해서 어머니가 허락해준 만큼, 어머니의 학비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자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어떤 식으로라도 어머니가 나를 서울로 보낸 것을 자랑스러워하도록 노력하자고. 이런 나의 결심을 현실로 만들어 준 것이 바로 한국장학재단의 국가근로장학생이었다.

징검다리에 내딛은 첫 발걸음, 교외 근로장학생이 되다
나는 방학 중 집중근로 프로그램에 지원하여 처음으로 국가근로장학생이 되었다. 실제 기업체에 가서 일도 배우고 회사 경험도 쌓을 수 있으면서, 높은 시급을 장학금으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그래 바로 이거구나!’ 하며 지원했다. 큰 결격사유가 없어 다행히 선발이 되었고, 이후 2009년 12월부터 2월까지 약 2달 동안 롯데로지스틱스 주식회사라는 물류/운송을 주로 담당하는 회사에서 회계업무를 보조하는 근로장학생으로서 근무하게 되었다. 실제 서울의 중심부인 종로구에서, 많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회사에 다니는 것이 쉬운 경험은 아니었다. ‘이게 바로 회사구나’라는 부담감도 느끼고, ‘폐를 끼치면 안 될 텐데’라는 생각도 하면서, ‘무조건 의욕적으로 열심히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근로에 임했던 것 같다.
근로는 나와 총 세 명이 함께 하였는데,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서로 도우며 차근차근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또한 회사 분들도 긴장과 부담으로 굳어있는 우리에게 친절하고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우리는 곧 편한 마음으로 열심히 근로에 집중할 수 있었고 또한 실무자 분이 직접 회사 업무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고, 회사가 돌아가는 시스템에 대해 교육도 해주셔서 자연스럽게 직접적인 직업 현장 체험을 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회사의 인턴 시험에 응시하여 면접을 보고 치열한 경쟁 끝에 직접 현장에서 업무도 배우고 회사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근로장학생으로서 높은 시급을 받으면서 이런 경험도 할 수 있다는 것에 ‘지원하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2개월 후, 근로가 모두 무사히 마무리 된 후 받게 된 장학금 200만 원을 어머니에게 송금해 주었을 때, 그 뿌듯한 마음을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나와 전화 통화를 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나에게 연신 “고마워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도 어머니에게 이렇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내 자신이너무 자랑스럽고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두 번째 발걸음, 교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단편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단편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근로장학생으로서 나의 두 번째 경험은 군대를 다녀온 후에 진행한 교내 근로장학생이었다. 나는 복학 후 자취를 해야 했기에 각종 공과금과 방세에 큰 부담을 안고 학교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 나는 당장 나의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했다. 교내 근로장학생 활동은 학기 중에 학교를 다니면서 병행해야 하는 프로그램이기에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나는 교수학습지원센터에서 처음으로 근로를 시작하였는데, 그 곳에서 주로 강의촬영을 보조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복학 후 언론정보학과로 전과하면서 영상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나의 적성과 관심분야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일반 아르바이트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시급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학교 근처 카페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용돈과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만일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일하지 못했더라면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노동 강도가 높은 일을 하며 보수는 훨씬 적게 받았을 것이다. 국가근로장학생 일은 학교 내의 기관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용이했고 노동 강도도 그렇게 높지 않았다. 또한 교직원분들과 함께 일을 하다보니 분위기도 좋았다. 일을 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었고 더욱 더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복학 후 지금까지 매학기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을 한 푼도 내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런 나를 언제나 자랑스러워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셨다고 했다. 나도 더 이상 어머니에게 의지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제는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늠름한 아들이 되었다. 나는 대학생활을 하면서 국가근로장학생으로서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한 것이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할만한 유일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돌아보면,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참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다. 등록금도, 생활비도 모든 것이 부담이
되는 나를 비롯한 많은 대학생들은 학생이지만 학생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형편이 여유로운 가정의 학생이라면 이렇게 생활비를 벌어 쓸 필요도 없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어머니나 우리 집안의 상황을 원망한 적이 없다. 오히려 나는 이런 일들을 하면서 여유로운 가정의 학생들은 평생 겪어보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하며 많은 것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어머니에게 내가 처음으로 일해서 벌어본 돈을 보내드린다거나 용돈 한 푼 받지 않고 내 스스로 생활을 해 나가는 뿌듯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타지에서 어려운 형편에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는 모든 대학생들에게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선발된다는 것은 주경야독하며 꿈을 잃지 않게 박차를 가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힘든 상황이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간절했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려는 나의 이러한 간절한 발걸음에, 국가근로장학생이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 나의 꿈을 위해 기꺼이 징검다리가 되어준 한국장학재단에 큰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 이 징검다리를 디딤돌 삼아 더 높이 비상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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