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_외국어를 즐기는 사람들, 전쟁도 끄지 못한 배움의 열기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이기도 한 송태진은 아프리카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마친 후 자신이 겪은 진솔한 경험들을 활자를 통해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가 겪은 파란만장한 스토리들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해외봉사라는 기회가 단순히 도전이 아닌 인생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될 것임을 말해준다.

 
 
내 영어가 어때서
“쏭, 한국 사람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해?”
부룬디에 살면 종종 받는 질문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어를 사용하지.”
“그럼 학교에서는 어떤 말로 공부해?”
“학교에서는 한국어로 공부하지. 부룬디는 어떤데?”
“우리는 고등학교까지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고, 대학에서는 영어 수업을 하는 곳이 많아.”
부룬디에서는 여러 언어가 사용된다. 먼저 토속어인 부룬디어.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이제 그만 놀고 잠 잘 시간이라고 토닥일 때나, 시장에서 가격을 깎으려 입씨름 할 때처럼 언제 어디서나 쓸 수 있는 부룬디 사람들의 정겨운 모국어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너 죽을래?’ 같은 간단한 부룬디어 몇 마디만 알아놓아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금방 친해질 수 있다.
정부에서는 벨기에 식민지배의 영향으로 프랑스어로 공식적인 업무를 진행하고 기록을 남긴다. 방송과 출판도 프랑스어의 비중이 높고, 학교에서도 불어로 교육을 한다. 최근에는 세계화의 바람을 따라 영어도 빈번하게 사용된다. 젊은이들은 프랑스어 보다 영어로 대화하는 걸 즐긴다. 지금 나와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 역시 영어로 진행되는 중이다. 여기에 동아프리카 공용어인 스와힐리어도 널리 쓰인다. 부룬디어와 문법과 단어가 비슷해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다. 부룬디 사람이라면 두 가지 언어는 기본이고, 4개 국어,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이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나마 부룬디는 토속 언어가 부룬디어 하나이기에 망정이지 이웃나라인 케냐는 50개 이상, 콩고민주공화국은 200개 이상의 토속어가 사용된다. 다양한언어를 구사하는 게 일상인 이들에게 전 국민이 하나의 언어만 쓰는 나라가 있다는 말은 마치 걸리버가 하늘을 나는 섬나라에 갔다 왔다는 것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생소한 개념이다.
“쏭, 학교에서 한국어로 수업을 한다고 했잖아. 그럼 너희들은 외국어를 안 배우니?”
“외국어도 배우지. 영어는 반드시 해야 하고, 일본어나 독일어 같은 제2외국어 수업도 있어.”
“정말이야? 그런데 너도 그렇고 한국 사람들은 왜 영어를 잘 못하니? 너 대학교 다니는 거 맞아? 사실 공부 되게 못 하지? 큭큭큭.”
공대생들을 제외하면 부룬디의 대학생은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안다. 대학에서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학에 갈 정도의 지성이라면 이미 프랑스어에 능통하기 때문에 조금만 노력하면 영어도 쉽게 배우곤 한다. 부룬디에서 대학생이 영어를 못한다는 건 곧 공부를 엄청 못한다는 뜻과 마찬가지. 이 친구들, 은연중에 나를 돌고래 수준으로 여기고 있었던 거 아닌가?
“아니야. 한국 사람들 영어 공부 열심히 하는데 단지 말하기가 좀 약할 뿐이야. 그리고 내가 특히 못해. 다 못하는 거 아니야. 차라리 나를 욕해라.”
“에이, 내가 본 한국인들 대부분 영어 더듬거리던데. 혹시 학교에서 영어도 한국어로 배우는 거 아니야?”
“그렇지. 영어도 한국어로 배우지.”
함께 대화를 나누던 친구들이 동시에 배꼽을 잡고 뒤로 넘어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 영어를 한국어로 배운다고? 도대체 어떻게 한국어로 영어를 배워?”
“뭐가 우습다는 거야. 그럼 너희들은 어떻게 영어 공부 하는데?”
“책을 읽고 선생님이랑 영어로 대화하고 친구들이랑 영어로 이야기하는 거지.”
“그런다고 공부가 돼?”
“그렇게 공부해서 우리가 너보다 영어 잘 하잖아. 깔깔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부러워할 만큼 세계적으로 경쟁력 높은 대한민국 교육의 총아가 아프리카에서도 가난한 축에 속하는 최빈국 부룬디에서 공부 못한다고 무시를 잔뜩 당했다. 이 굴욕을 어떻게 갚으리오. 하지만 찬찬히 돌아보니 다른 부분은 몰라도 외국어 교육 만큼은 부룬디가 한국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 방식이나 제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부러운 것은 학생들이 외국어를 대하는 태도였다.

 
 
대화로 즐기는 부룬디의 외국어 교육
부룬디 사람들에게 언어 공부는 일종의 놀이와 같다. 외국어를 잘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기만 하면 자연스레 지식이 쌓이는 유익한 놀이다. 대학생 큰 형, 우등생 친구, 옆집 사는 한국인 봉사단원 등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아가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나불나불 풀어 놓는다. 비용은 무료. 그저 열심히 수다를 떨기만 하면 되니 가난한 부룬디 사람들에게 이보다 좋은 과목도 없다. 특히 외국인은 수준 높은 영어를 쓴다는 소문이 있어서 당돌한 마을 초딩들은 하루에도 몇 번 씩 ‘Mzungu, How are you?'(외국인, 안녕하세요?) 하며 나에게 말을 걸곤 한다.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고 주눅 들지 않고, 듣는 사람도 핀잔을 주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누구나 부담 없이 한 마디씩 던질 수 있는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되든 안 되든 주절주절 떠들다보면 어느덧 제법 그럴듯한 영어가 나온다.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즉석 가정교사가 되어 어설픈 발음을 교정해주고 문법과 단어의 깊은 의미를 알려준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나 또한 눈치 보지 않고 영어를 내뱉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실력도 자연스레 자라났다.
부룬디는 미국이나 호주처럼 영어가 모국어인 나라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어를 익히고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다. 언어의 기본은 대화임을 알기에 그들은 주저없이 외국어로 말을 꺼낸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영어를 못하는 게 아니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틀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영어로 마음을 말해보자. 그리고 주변에 그런 환경을 만들어보자. 부룬디 사람들도 하는데 우리라고 왜 못할까. 그저 입을 열고 떠들기만 하면 되는데.

전쟁도 끄지 못했던 배움의 불씨
‘펑 퍼엉! 타탕 타다다다당!’
2008년 4월 25일. 며칠 전부터 밤만 되면 먼 산에서 산발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들이 심상치 않다. 어두운 하늘을 찢는 쇠붙이의 날카로운 소리, 묵직한 울림에 섞여 전해지는 둔중한 폭음. 파르르 떠는 손으로 담장을 짚고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니 저 멀리 산 중턱에서 차가운 총소리와 함께 예광탄의 길쭉한 불빛이 날아다닌다. 한동안 잠잠하던 반군들이 수도 부줌부라로 진격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즉, 나의 코앞에서 전쟁이 터져 버렸다.
태평스러울 줄 알았던 해외봉사활동 도중 전쟁이 일어날 줄이야.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 소식이 전해져 오고, 국립 대학교 기숙사에 포탄이 떨어져 사상자들이 발생했다는 속보도 들렸다. 밤에만 들려오던 총성과 폭음은 낮에도 간간히 이어졌다. 나는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현지 친구들이 전해주는 소식을 들으며 그저 사태가 빨리 해결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계속되고, 마을의 시장도 문을 닫는 상황에서 나는 우리의 무료 교실 수업을 계속 진행해야 할 지 의문을 품었다. 개울 건너 옆 마을에서 반군과 정부군이 시가전을 벌이는 판국에 어떤 간 큰 사람이 영어 문장 몇 개 배우러 여기까지 찾아올까? 학생들이 얼마나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안고 수업을 강행하느니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수업을 잠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난리 통에도 학생들은 무료 교실에 공부를 하러 왔다.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학생들은 전쟁 전과 똑같이 빳빳하게 다린 깔끔한 옷을 입고 손에는 볼펜과 공책을 들고 대체 전쟁과 공부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듯한 밝은 얼굴로 교육원의 문을 열었다. 전쟁으로 버스 운행이 줄어들어서 그런지 오토바이나 자전거 택시를 타고 오는 학생들이 평소보다 더 많이 보였다. 택시를 운전하는 나이 많은 학생은 자신의 차에 인근에 사는 학우들을 잔뜩 태워 함께 수업에 오기도 했다. 전쟁은 그들이 품고 있는 배움의 불씨를 끄지 못했다.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평소의 절반 정도만 무료교실의 자리를 지켰다. 그 학생 한명 한명은 위험을 무릅쓰고 총소리와 포성을 가로질러 교실까지 찾아온 간절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낡은 전구 아래 모인 부룬디 무료교실의 학생들은 교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흡수하며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야외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동안 중간 중간 포성이 울려 선생님의 말이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배움의 즐거움에 취한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이처럼 뜨거운 열정을 가진 학생들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함부로 수업을 멈추니 마니 했던 나의 속단이 부끄러웠다.
수업이 마칠 즈음, 군복을 입은 남자가 눈에 띄어 그에게 전쟁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지금 전투 상황이 어때요? 심각한가요?”
“매우 위험해요. 제 동료 중에도 다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런데도 학생들이 수업에 참여 하러 오네요. 정말 놀라워요.”
“그렇죠. 다들 계속 공부를 하고 싶어 해요. 오늘 못 온 사람들은 아마 너무 먼 곳에 살기 때문일 거예요. 이럴 때 늦게까지 돌아다니면 위험하거든요. 전쟁이 끝나면 모두 교실로 돌아올 거예요. 그러니까 그들을 위해서라도 수업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해 주세요.”
“실례지만 당신도 군인인 것 같은데 전쟁터에 나가야 하나요?”
“네, 오늘 이 수업을 듣고 부대에 복귀를 하면 내일 아침에 저도 그곳에 가야해요.”
“아….”
내일 전장에 나가야 한다는 군인. 어쩌면 생의 마지막 저녁이 될 수도 있는 귀중한 시간을 그는 무료 교실 수업에 할애했다. 그에게 공부는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하루하루 살기 급급했던 사람들. 펜 한 번 쥐어 본 적 없었던 이들에게 ‘공부를 한다’는 것은 목숨이 걸린 위험한 순간에도 마지막까지 잡고 있어야 하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타고 있는 배움을 향한 간절함에 깊은 존경심이 일어났다.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군인에게 부디 전쟁터에서 안전하게 돌아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쟁이라는 큰 두려움 앞에서 그와 함께 울며 눈물을 훔쳤다. 서로를 향한 따뜻한 위로는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여러 학생들이 내게 다가와 부룬디의 평화를 기원해줘서 고맙다고 말하며 나의 안전도 빌어주었다. 그들의 고마운 진심을 느끼면서 나 역시 전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큰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전투는 몇 주간 계속되다가 결국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의 중재로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어 나와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며 행복을 분출했다. 자동차들은 하루 종일 신나게 경적을 울렸고, 누구든지 눈만 맞으면 포옹을 하고 춤을 추며 식민지배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평화를 만끽했다. 부룬디 전체에 가득했던 행복한 웃음과 기쁨의 물결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이후 나는 그 군인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날의 경험은 내 가슴에 진한 자국을 남겼다. 나는 다른 사람을 배려 해주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봉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무료교실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만나면서 나의 안일한 생각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나로부터 아주 작고 미약한 위로라도 얻고 싶어 한다는 것, 내 눈앞에서 너무나 간절하게 무언가를 요청한다는 것. 내가 베푼 작은 행동이 그들에게는 소중하고 커다란 행복이 된다는 것. 그것이 내게 커다란 행복을 준다는 것.
그들의 마음을 알게 된 후 내가 마주한 해외봉사활동은 더 이상 ‘젊을 때 한 번 열심히 해볼 만한 좋은 경험’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절박한 간절함과 조건 없는 사랑에 보응하기 위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을 쏟아 부어야 했다.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는 해외봉사단의 구호가 단순히 듣기 좋은 문장이 아닌, 뜨거운 삶으로 내게 다가왔다.

담당 | 송혜진 캠퍼스리포터   디자인 | 전진영 기자   일러스트 | 손정아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