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메이카 해외봉사

나는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 학과를 졸업하고 무대 조명 스태프로 일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가 관련 학과 출신이라 고개 끄덕일지 모르겠지만 사실 나는 불과 몇 년 전까지 캄캄한 어둠 속에서 괴로워하며 살아갈 사람이었다. 색소망막 변소증이라는 병에 걸려 20대 중반에는 앞을 볼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눈이 밝아진 이후 새 삶을 살며 사람들이 무대의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물론 그들의 마음에도 빛을 비추고 싶은 꿈쟁이다. 어떤 계기를 통해 절망에서 벗어나 새롭게 달라졌는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방해 받는 내 인생
“내가 소경이라고 나를 아주 우습게 봐?” 엄마는 화가 나서 옆집 아주머니의 머리채를 잡고 소란을 부리셨다. 아빠가 군인이셔서 우리 가족은 군인아파트에서 살았는데, 엄마가 문제를 일으키는 바람에 쫓겨났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막내인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력을 잃어 앞을 보지 못하는 엄마는 정신도 좋지 못했다. 내가 잘못만 하면 사람들은 ‘쟤네 엄마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애들한테는 놀림 받고, 어른들한테는 손가락질 받았다. 엄마는 내 인생의 방해꾼 같았다. 엄마가 너무 미워서 한 번도 엄마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엄마가 말을 걸면 대충 ‘어’라고 대답만 하고 가버렸다. “아빠, 내가 오늘 말이야….” 내가 아빠와 대화할 때면 엄마는 아빠 옆에 조용히 앉으셨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으셔서…. 엄마에 대한 미움과 반발심에 나는 비뚤어졌다. 애들이 많이 놀리니까, 나는 강해져야만 했다. 너무 강하고 무서워서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하길 바랐다. 그래서 나쁜 아이들하고 어울리면서 싸움도 많이 했다. “쟤네 엄마 이상하대.” “야! 너 뭐라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무서운 대상이 되니까 더 이상 놀림도 안 받고 편했다. 망막색소 변소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시력을 잃은 엄마는 암까지 걸리셨다. 암 치료를 받아야 했지만, 엄마는 장애인이라 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다. 어마어마한 병원비 때문에 빚이 쌓여갔고 아빠가 많이 힘들어 하셨다. 미대에 들어가려면 학원에 다니면서 입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빠는 더 이상 내 학원비를 대줄 수 없다고 하셨다. 엄마 때문에 내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다. 엄마가 정신 나간 것도 화가 나고, 암에 걸린 것도 짜증나고, 대학에 가는 것마저 방해하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작은 희망 때문에
더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입학 장학금을 받고 대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생이 된 후, 엄마는 내게 대학생 월드캠프 참석을 권하셨다. 항상 엄마한테 미안해하고 엄마를 딱하게 여기시는 아빠는 웬만하면 엄마 말을 다 들어주셨다. 그래서 아빠도 내가 월드캠프에 가기를 권하셨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월드캠프에 참석했고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다녀온 어느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해외봉사 어디로 갔다 오셨어요?” “난 중국에 갔다 왔어. 그런데 지금 내 동생이 자메이카에 가 있는데 그렇게 좋다더라. 너도 가면 좋겠다.” 캠프기간 동안 언니와 지내면서 굿뉴스코 해외봉사에 끌리게 되었고 얼마 뒤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에 지원했다. 곧 이어진 굿뉴스코 워크숍. 그곳에 모인 친구들은 이상했다. ‘어떻게 저런 말들을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을까?’ 내가 그 동안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한 창피했던 이야기,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놓은 부끄러운 과거들. 모두들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도 조금씩 내 마음속 이야기를 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나보다 더 비뚤어진 삶을 살았던 선배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굿뉴스코에 다녀오면 변하겠다는 희망이 생겼고, 그 작은 희망 때문에 자메이카에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 봉사단원들은 토요일마다 자메이카 학생들을 위해 무료 아카데미를 열었다.아카데미를 마치고 고교생들과 함께.
우리 봉사단원들은 토요일마다 자메이카 학생들을 위해 무료 아카데미를 열었다.아카데미를 마치고 고교생들과 함께.
어떤 상황이 닥쳐도 도망가지 마
“사우나가 따로 없네! 한겨울에 왜 이리 더워?” “매일 하는 공사 진짜 힘들어 죽겠어!!” “설거지, 힘들어서 못 하겠어!” 한국과는 다른 환경과 사람들, 평소 집에서는 겪어보지 않았던 일을 하려니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메이카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날, 가필드가 내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승아, 나랑 같이 내 친구들 만나러 가자.” ‘하이, 헬로우 밖에 못하는 내가 가서 뭐해?’ 가필드는 나를 한 현지인 앞에 데려갔다. “안녕? 얘 이름은 승아야. 한국에서 왔어. 지금은 영어를 잘 못하지만 너와 만나면서 영어가 조금씩 늘 거야.” 가필드는 나를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현지인들과 대화하도록 시켰다. “승아야, 내가 말하는 거 빨리 받아 적어.” 가필드가 내게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면, 나는 한글로 막 받아 적었다. 나는 원래 영어를 싫어했다. 이곳에서의 생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막둥이라 집에서 매일 어리광만 부렸었는데, 자메이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기 싫은 것은 절대 안 하고, 사고 치고, 투정만 부렸다. 하지만 가필드는 그런 나를 다그치지 않았다. 내 손을 붙잡고 앞에서 이끌며 뒤에서 밀어주었다. “승아야, 앞으로 어떤 상황이 닥쳐도 절대 도망가지 마. 불가능해 보여도 반드시 헤쳐 나갈 수 있는 법은 있으니까.”

외로운 자메이카에 행복을
자메이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다. 정부가 땅을 다른 나라에 다 팔아버리기 때문이다. 땅을 팔아서 남는 돈은 국민들이 아닌 정치인들의 사유재산이 된다.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농산물을 다 수입하는데, 수입한 농산물도 너무 비싸서 가난한 국민들은 쉽게 사먹지 못한다. 게다가 정부보다 더 큰 실권을 가진 갱들 때문에 일어나는 잦은 내전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많다. 가정 하나하나도 자세히 살펴보면 자메이카의 참담한 현실을 느낄 수 있다. 어려운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 당장 의지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아무 남자나 유혹해서 사는 여자들. 이들 대부분은 돈이 없어 결혼은 못하고 아이만 낳고 사는데, 책임감 없는 남자들은 그런 처자식을 버리고 도망가기 일쑤이다. 버림받은 여자는 또 다시 다른 남자를 찾아 밖으로 돌아다닌다. 아이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식은 못 살아도 나는 잘살아야 하니까. 혼자 남아 외롭게 사는 아이들을 위해 토요일마다 IYF 센터에서 무료 클래스를 열었다. 아이들은 공부, 그림 그리기, 종이접기 등을 배우고 그 동안 받지 못했던 사랑을 느끼며 조금씩 꿈을 키워간다.

자메이카 월드캠프 때 나를 보러 오신 아빠와 함께.
자메이카 월드캠프 때 나를 보러 오신 아빠와 함께.
엄마, 사랑…해요
“여보세요.” “아직도 감…기 안 나…았어? 감기 빨…리 나아야지…?”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숨이 찬지 헐떡거리며 이 한마디만 남기고 아빠한테 전화를 바꿔주었다. 며칠 전에 통화를 했을 때도 감기에 걸렸었는데, 아직도 감기가 낫지 않은 내 목소리를 들으시더니 걱정된 모양이다. “승아야, 아빠다. 엄마가…지금 많이 아파. 곧…돌아가실 것 같다.” “….” 하지만 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사실 내 인생의 방해꾼인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컸으니까. 한 달 뒤, 지부장님께서 조심스레 나를 부르셨다. “승아야…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전화하셨던 날 기억하지? 그날… 그 통화 30분 뒤에….” “30분 뒤에 뭐요?” “너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네?!” 믿기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미워했던 엄마. 너무 미워서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던 엄마. 내 인생의 방해꾼이라고만 생각했던 엄마가 막상 돌아가셨다고 하니 혼란스러웠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난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울고 또 울었다. 그날 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돌아 가시면서까지 내 생각을 하셨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 걱정이 먼저 앞섰나 보다. “여보, 승아에겐 알리지 마세요. 그러지 않아도 그 먼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텐데…. 나중에… 나중에 한국 돌아오면…, 그때 전해줘요. 우리 승아… 더 힘들어하지 않게….” 지부장님과 현지인 친구들은 슬픔에 빠진 나를 계속해서 살펴주었다. 오늘 하루는 어떻게 지냈는지, 오늘도 많이 울었는지 계속 물어 보기도 하고, 없는 돈으로 초콜릿도 사주고, 매일 밖에 데리고 나가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모두들 내게 세심하게 마음을 써주었다. 그들이 마음 써준 덕분에 나는 조금씩 슬픔을 떨쳐 버리고 마음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유이 대학교에서 클럽활동을 홍보하다가 나요카라는 친구를 사귀게 되었다. “나는 아빠가 일곱 명이고, 엄마도 일곱 명이야. 내 동생은 열 명이 넘어. 그런데 아무도 동생들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내가 다 먹여 살려야 돼. 내 인생 참 저주스럽지?” 부모님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수많은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나요카. “나요카, 난 엄마가 없어. 얼마 전에 돌아가셨거든. 엄마는 나를 무척 사랑했는데… 나는 그 사랑을 다 무시했어.” “바보야, 사랑을 주는데 왜 거절하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그토록 사랑하는 막내가 엄마의 마음을 몰라주어서. 엄마의 소원은 내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나를 낳기 전에 시력을 다 잃어버려서 언니의 얼굴만 보고 내 얼굴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우리 엄마, 그곳에서는 내 모습을 볼 수 있겠다. 엄마, 이제 소원 풀었겠네? 내가 자메이카에서 현지인들을 만나고, 같이 생활하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모습 다 보고 있겠다. 엄마, 내가 전에 엄마 마음 무시했던 거 정말 미안해. 나 정말 나쁜 딸이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고, 자메이카에 오게 해주고, 내 인생에 복을 준 엄만데. 엄마, 정말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카미샤의 사랑이 담긴 빡 주스
하루는 너무 아파서 누워 있었다. 때마침, 카미샤가 나를 찾아왔다. 카미샤는 땀이 나는 내 머리를 만졌다. “머리가 뜨끈뜨끈해.”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거야? 어떻게 하지? 잠깐만 기다려.” 카미샤는 계속 걱정하더니 밖으로 막 뛰어 나갔다. 잠시 후, 빡 주스를 한 봉지 가득 사왔다. 빡 주스pack juice는 물, 딸기시럽, 색소, 소다를 섞어서 만든 주스로 봉지에 담겨진 것이다. 빡 주스 하나에 한국 돈으로 80원인데, 그 돈은 카미샤의 하루 밥값이었다. 이 빡 주스를 사려면 자신이 굶어야 할 텐데…. “이 주스, 시원해서 열을 가라앉혀 줄 거야. 승아가 아픈데 내가 이 정도는 사줄 수 있지.” 카미샤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하며, 내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주고 꽁꽁 얼어 있는 빡 주스를 손으로 계속 녹여주었다. “미안해. 먼 곳까지 와서 고생하는 거 알면서도 이거밖에 해줄 수 없어서. 돈이 없어서 약을 살 수 없었어. 대신 대학교 졸업하고 건강한 몸으로 꼭 다시 와. 그때는 더 맛있는 거 사줄게.” 평소 카미샤는 멋진 가발이나 레게를 한 예쁜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카미샤가 가난한지 몰랐다. 알고 보니, 카미샤가 사는 게토 지역(빈민가)의 사람들은 가난하게 보이는 것이 싫어서 더 잘 꾸미고 다닌다고 했다. 세금조차 내지 못하는 이들은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한다. 그것도 값이 싼 유통기한 지난 빵 정도가 고작이다. 그들이 사는 집 또한 비참하다. 나무로 만든 벽에 양철지붕을 대충 올려놓고 바닥에는 종이박스를 깔아놓는다. 벽과 바닥도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비가 많이 오거나 허리케인이 불어오면 집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다. 자신도 어렵게 살면서 어떻게 굶으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생각해줄 수 있을까. 카미샤의 예쁜 마음을 배우고 싶어졌다. 고마운 카미샤. 카미샤의 사랑이 가득 들어 있는 빡 주스 한 봉지는 나에게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무대 스텝을 하며 해외로 다닐 기회가 많아졌다. 강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2014년 10월, 미국 그랜드케년에서 기념사진
무대 스텝을 하며 해외로 다닐 기회가 많아졌다. 강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2014년 10월, 미국 그랜드케년에서 기념사진
사랑의 힘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망막색소 변소증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검사를 받았다. 망막색소 변소증은 유전이 되는 병이라서 나도 그 병을 가지고 있다. “다행이야. 60대까지 아무 문제없겠어. 엄마처럼 시력이 확 떨어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멈춘 게 얼마나 다행이야.” 의사 선생님은 내게 복 받았다고 하셨다. 망막색소 변소증은 눈에 피가 통하지 않아 시신경이 죽어서 서서히 시력을 잃는 희귀병 이다. 이 병이 있으면 햇빛을 보면 안 되는데, 1년 내내 태양이 뜨거운 자메이카로 가는 것이 사실 무서웠다. 처음에는 눈이 엄청 아팠다. 빨갛게 핏대가 서고 눈이 꼭 터져버릴 것 같았다. 친구들이 시간 나면 눈에 물을 부어주고 얼음을 대주었다. 그 상황에서도 월드캠프 홍보, 댄스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다. 마음에서 병을 이긴 것이다.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게 하고 행복을 듬뿍 준 자메이카에서. 뿐만 아니라 하이, 헬로우밖에 몰랐던 내가 이제는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현지인 친구들의 도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자메이카에서 받은 사랑의 힘이 병도, 언어의 장벽도 이기게 해주었다. 어떠한 불가능한 상황도 헤쳐 나갈 수 있고,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마음의 문을 열면 받을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자메이카에서의 1년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담당| 김민영 기자  일러스트| 유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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