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탄자니아에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다녀온 지 8년이 지났다.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는 것만 같다. 지금은 결혼도 하고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나 아버지가 되었지만 20살 나는 게임중독자였다. 그때 나는 너무 불행했고, 가족도 힘들어 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프리카에서 어둠의 긴 터널에서 벗어났다. 그곳에서 희생과 희망을 배운 뒤 나는 달라졌다. 그리고 내가 어떤 계기로 달라졌는지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게임 중독자, 변하지 않던 나
“최형근! 그만 좀 해! 게임 언제까지 할 거야?” 중·고등학생 때 부모님께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고3때 부모님의 이혼하셨지만 아픔을 느끼기엔 너무 무뎌져 있었다. 어렸을 적 우리 집은 너무 포근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중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바쁘셨지만 서로 사랑하셨고, 그 누구보다 나와 내 동생을 위하고 아끼셨다. 그런데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때부터인가, 부모님의 표정이 어두워져 가기 시작했고 흩어져가는 가족들의 마음이 순식간에 서로에게서 멀어져 버렸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그런 가족을 회피하고 싶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게임을 접하게 된 나는 무서울 정도로 빠져들었다. 그땐 몰랐다.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오락실에서 처음 접한 조이스틱 게임이 마냥 좋았다. 학교에서도 늘 게임을 생각했고 그럴 때마다 아프다고 조퇴를 하거나 학교를 빠졌다. 어느새 한 학기에 조퇴만 20번 이상을 했다. 아버지는 오락실에서 살고 있는 나를 질질 끌어내어 때리고 혼내셨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심하게 맞고 온몸이 멍들어도 다음날 아침 게임기 앞에 앉았다. 아버지는 타일러도 보시고, 때려도 보시다가 결국 안 되자,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포기하셨다. 늘 내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셨는데, 어렸던 난 그게 이해가 안 되고 그런 부모님이 지긋지긋하고 원망스러웠다.
고3이 되어서도 늘 그랬듯 게임에 미쳐서 놀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심각하게 싸우셨고, 원인 제공이 나였다. 우리 집은 아파트 11층이었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창문을 열고 베란다 앞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내 눈 앞에서 뛰어내리려고 하셨다. 너무 놀란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어머니는 그렇게 괴로워하시면서 사셨다. 결국 그 해 5월, 부모님은 이혼 하셨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게임에 빠졌다. 출석 부족으로 F를 8개나 맞고 학사 경고를 받았지만 난 이미 벗어날 수 없었다. 사실 나도 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나를 신뢰하는 마음을 다 잃어버렸기에, 그런 작은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내 의지와 달리 늘 번번이 되돌아가는 생활 패턴을 멈추고 싶었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서서히 변하는 나
내 행동은 결코 변하지 않았지만 변하고 싶다는 마음은 실낱같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굿뉴스코 해외봉사 프로그램을 알게 됐고, 아프리카를 다녀온 대학생들이 행복해 하는 고백을 들었다. 아프리카에 다녀온 뒤로 말라리아, 풍토 병도 아닌 아프리카를 잊을 수 없는 병에 걸렸다며 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들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그런 아프리카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가기까지 나는 또다시 게임의 유혹 때문에 어머니를 힘들게 했다. 조금 변했다 싶으면 어느새 난 고질적인 게임 중독자로 되돌아가 있었다. 아무리 죽도록 달리고 달려도 결코 원점을 벗어날 수 없는 다람쥐처럼. 그래서 내 인생의 마지막 보류처럼 아프리카로 갔다.
탄자니아의 2월은 무지 더웠다. 방 온도가 35도. 방안의 벽은 불가마인 듯 뜨거워 이글댔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온몸에 땀이 비에 맞은 듯 흘러 순식간에 내 얇은 옷을 적셔버렸다. 하루에 몇 번을 갈아입는지 셀 수 없었다. 한동안 낮에는 비루먹은 개 마냥 비실거렸고, 밤에는 부엉이 부럽지 않게 눈이 반짝거렸다. 다행히 음식에는 잘 적응 했다. 그래서 그런지 3주 정도 지나자 내 몸은 아프리카의 기후도, 시차도 거뜬히 뛰어넘었다.
영어도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엔 지옥이 따로 없었다. 영어와 문법은 비슷했지만 어던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단어들, 게다가 발음은 말이 많은 아주머니나 수다쟁이들에게나 딱 맞는 듯했다. 억양은 땍땍 거리듯 말하는 것이 꼭 경상도 사투리 같았다. 아프리카에 오기 전 이미 스와힐리어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제 느낌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안주하고 싶었지만 함께 간 단원들 사이에서 낙오자가 되기는 싫었다.
“하바리(안녕하세요)?” 겨우 스와힐리어로 인사 정도 가능할 즈음, 무전전도여행을 갔다. 다행히 나와 같이 가는 친구는 스와힐리어를 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한 마을에 도착했다. 무척 시골이었는데, 한 집에서 다른 집에 가려면 30분 넘게 걸어야만 하는 곳이었다. 엉성하게 짠 흙 집이 있었는데, 그곳 아주머니가 백인인 우리를 보고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겐 황인종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흑인 아니면 백인이다). 그런데 웬일이야? 예상 밖이었다. 음 식이 차려져 있었다. 이가 다 빠진 그릇에 엉성하게 담겨 놓여 있었지만,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하루 종일 많이 걷고, 식사를 한 지 꽤 시간이 지나 있었다. 우리 모두는 뛸 듯 환호했다. 누가 뺏어먹을 듯 입에 하나씩 물고 그 사이 또 하나 집고. 접시 주변에 너저분하게 흘린 음식들. 그리고 빈 접시들이 나오자 그제야 입을 닦을 여유가 생겼다. 매우 감사해서 아주머니께 음식이 맛있다고 이야기했다. “마마 아싼테. 차쿨라 타부 싸나! MAMA ASANTE. CHAKULA TAABU SANA! 아주머니, 감사합니다. 음식이 너무 문제예요!” 내 이야기를 들은 아주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는 게 아닌가. 친구가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내가 스와힐리어를 잘 몰라서 그랬다는 걸 아시고 이해하셨다. ‘TAMU(타무, 맛있다)’라고 해야 하는데 ‘TAABU(타부, 문제)’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듯 실수할까 봐 입을 여는 것이 더 부담스러웠지만 내가 언어를 잘 못할지라도, 나를 어리석다고 수군댈 사람도 문제되지 않았다. 우선 말도 안 되는 문장에, 단어만 나열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떤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말하기 시작하니 내 마음은 날개를 단 듯 자유로웠다.

 
 
도둑과 말라리아
탄자니아에서 지내며 가장 마음에 남는 일은 내가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도둑과 말라리아는 내가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충분히 제공해 주었다. 굿 뉴스코 훈련을 받을 때, 탄자니아에는 도둑이 많다는 것과 말라리아에 대해서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나는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도둑이야 한국에도 많고, 말라리아는 약이 있으니까. 충분히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도전하고 싶은 마음까지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난 아프리카를 지원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만이요 나만의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나는 정말 나를 잘 몰랐다. 내가 두려운 생각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 사람인지를. 남자로서 약하다는 건 굉장히 큰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나를 이제까지 직면하려 하지 않았다. 내 마음 한 켠에 몰래 숨겨놓고, 아니 덮어놓고 살았다. 나조차도 잊어버렸던 그런 내 모습이 탄자니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탄자니아에는 도둑이 참 많다. 그런데 탄자니아에서는 도둑으로 잡히면 경찰서에 갈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린다. 돌을 던져서 죽이기도 하고, 몽둥이로 때려서 죽이기도 하고, 타이어 같은 데에 매달아 태워 죽이기도 한다. 도둑질하다가 잡혀 사람들에게 밟히고 몽둥이로 맞아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나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들은 도둑질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성을 잃고 그 마음에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대다수가 목숨을 걸고 도둑질을 감행하는 것이다. 잡히지 않으려고 사람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외국인들이 있으면 보는 앞에서 물건을 슬쩍 가져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자기 것인 양 집어간다. 그리고 훔쳐가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집 밖에 설치되어 있는 물탱크부터 집안 주방 살림살이까지. 그런 일이 많다 보니 나는 늘 긴장했다. 가끔 권총강도가 온다는 말도 들었다. 저녁에 와서 총을 들이대고는 이사하는 것처럼 짐을 다 빼내 가져간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밤에는 불을 켜놓고 자려 했는데, 유난히 전기가 잘 나갔다. 새벽 내내 열매 떨어지는 소리에조차 민감했는데, 발소리 같은 것이 나는 듯해 잠도 잘 수 없었고, 눈을 감는 것조차 무서웠다. 감기만 하면 도둑이 찾아와서 나를 죽일 것 같았다. 그렇게 잠들다 보면 악몽에 시달리는 건 다반사였다.
시간이 흘러 11월에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 살람에서 800km 넘게 떨어진 도시 ‘음베야Mbeya)로 나 혼자 전도여행을 갔다. 원래 가기로 약속했던 친구가 말라리아에 걸려 치료받고 있어서 갈 수 없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그 도시에 호기심이 생긴 내가 가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곧 연락할 수 있는 핸드폰과 짐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 처음 1주일은 그곳에 먼저 도착해 있던 형과 함께 있었다. 그러다 사정이 생겨 형이 먼저 돌아가 홀로 남게 되었다. 전기도 없는 방에서 혼자 밥 해먹고, 시장 다니고, 여기저기 둘러 보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지만 밤이 되면 두려운 마음이 커졌다. 조금이라도 사람 소리가 나면 내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렸다. 게다가 그 마을에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금을 뺏으려고 도둑이 집주인의 목을 완전히 베어버린 사건이었다. 내 마음은 더 졸아들었다. 식사도 대충 때우고 두려움 때문에 마음이 무척 곤비해 있던 때에 나는 설상가상으로 말라리아에 걸렸다. 몸이 으슬으슬 춥고 아프고 관절도 쑤셨다. 처음엔 ‘기후가 바뀌어서 그러겠지’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치고 싶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심해져 너무 아팠다. 핸드폰으로 본부에 연락했다. 모두들 무척 걱정하셨다. 나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 몸으로 12시간이나 버스를 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어쩔 수 없이 본부에서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잠깐 밖에 나갔다가 쓰러져 누워있는데, 온몸에 통증이 계속해서 찾아왔다. 하필이면 혼자 있을 때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이러다 죽는 거 아닌가? 죽음의 공포까지 합세해 너무 힘들었다. 몸이 아픈 것에 절망까지 더해지자, 고통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처음으로 이해되었다. 내 옆에는 나를 지켜줄 사람도, 무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 밤,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 불편한 몸을 간신히 가누어 나가 보니 옆집에 사는 윌리엄(William)이 서 있었다. 내 안색이 무척이나 안 좋았던지 동그래진 눈을 하고는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몸이 으슬으슬 춥고 토할 것 같다고 하자 그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출신의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그의 어머니 덕분에 가장 좋고 비싼 말라리아 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 후에도 아주머니가 종종 불편한 데는 없냐고 물으며 신경 써 주시고, 설사를 많이 해서 탈수증이 있을 때에도 약을 무료로 가져다 주셨다. 또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윌리엄의 가족과 늘 함께 저녁을 먹게 되었다. 내가 돈이 없을 땐 빌려주기도 하고 갚으려고 하면 당장에 정색을 하며 안 줘도 된다고 손사래를 쳤다. 아주머니는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마음의 어머니가 되어 주셨고, 윌리엄은 형이 되어 주었다. ‘이상하다. 나는 내 젊음을 팔아 그들의 마음을 사려고 왔는데...’ 아프리카에 사는 동안 그들이 도리어 내 마음을 사고 나를 섬겨주었다. 주객이 전도된 그 자리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너무 고맙고 감사했다. 병에서 회복된 것보다 그들의 마음을 느끼고 얻었다는 것이 더 감사했다. 내가 먹은 건, 약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이었다. 그들에게 난 그저 잠깐 머물다 가는 이방인이 아니었고 내게도 그들이 더 이상 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가족이 되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사람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만나는 것을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함께한다는 것’은 만나서 그저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도, 시시껄렁한 음담패설을 하며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서로의 숨겨진 마음을 느끼는 것이었다. 내가 나와 함께한 이들의 마음을 보았을 때, 가장 행복함을 느꼈다. 어둠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드디어 그 귀한 마음을 발견했을 때, 내 마음은 놀라운 기쁨에 벅차 올랐다. 난 몰랐다.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키는 삶이 얼마나 피곤한 것인지를. 나를 보호하면 할수록 좋은 게 아니었다. 그럴수록 내 마음은 오그라질 대로 오그라져만 갔다. 현지에서 오랫동안 생활하시고, 평생 사시는 지부장님은 어떻게 이토록 생명을 내놓고 사람들을 섬기며 지낼 수 있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을 아프리카 사람들의 밑거름으로 삼으며 살고 계셨다. 그래서 이 메마른 땅도, 마시기는커녕 냄새만으로도 역겨운 식수도,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도둑도, 말라리아도,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 된 것이었다. 내 마음에서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느꼈다.
아프리카 사람에 대해 처음 가졌던 이러한 내 편견이 틀렸다는 것도 금방 드러났다. 가난한 삶 속에서 우리에게 대접해주는 음식들이, 비록 궁색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삶에 비추어보면 세상 어디에서도 먹을 수 없는 진찬이었다. 한 입 두 입 먹을 때마다 기뻐하며 따라오는 그들의 눈동자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 맛있게 먹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때때로 자신과 그 아이들도 평생 먹기 힘든 쌀과 고기를 어디에서 구했는지 내어놓았을 때, 우리는 그만 눈을 땅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렇게 특별한 사랑을 받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는 아프리카에서 한인(韓人)을 한 사람 만났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한국 사람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어느 단체에서 파송된 사람이었는데, 나를 만나자 계속 불평하며 후회한다고 했다. “물도 제대로 안 나오고 밥도 맛이 없고.” 원망이 쏟아졌다. 이틀 후 우리는 그분 집에 초청 받아 갔는데, 아프리카에 사는 것치고는 꽤 좋은 집에서 잘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비록 그보다 나쁜 환경에 거하고 있었지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무척 좋은 형편에도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런데 그런 내가 바뀐 것을. 누가 날 바꿀 수 있겠는가? 아프리카가 아니라면! 이 순수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어머니, 사랑합니다
탄자니아에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가 오시는 일주일 내내 마음이 구름 떠다니는 듯해서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일할 때 실수도 유독 많이 해 꾸중도 들었지만, 어머니를 만난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입가에 마냥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머니가 얼마나 변했는지, 식사는 제대로 하셨는지, 더 늙으신 건 아닌지, 망나니와 다름없던 나를 기다려 준 어머니가 먼 아프리카까지 오시겠다니,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큰 힘이 되었다. 어머니가 도착하실 때 지부장님은 굉장히 몸이 안 좋으셨다. 그런데도 13시간 걸리는 사파리를 오고 가는 데 꼬박 운전하셨고, 아프리카 음식에 적응 못 하실 어머니를 위해 한식당에도 갔다. 그런 지부장님의 마음이 내게 더 큰 감동으로 남았다. 지부장님이 건강이 안 좋은 걸 아는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아버지를 마음에서 잃어버렸던 내게 선교사님은 아버지가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프리카에서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어머니 앞에서 말이 많아졌던 나는 한국어 하랴, 영어 하랴, 스와힐리어 하랴 정신이 없었지만 내가 알고 있던 현지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개도 시켜드렸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보시고 아무 말씀 없이 연신 웃음만 지으셨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에스 살람은 동쪽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그래서 우리 센터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해안이 있다. 그곳에 어머니와 난 다정하게 앉았다. 조금 어색했지만 그런 시간은 처음이어서 속내를 꺼내놓았다. 아프리카에서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는지, 처음엔 냄새 나는 것 같았던 아프리카 사람들의 아름다운 마음을 만나고 나니 아무렇지도 않게 된 일들. 기쁨과 감사라는 말이 진심으로 우러나오게 된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머니와 그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 그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이후로 난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아프리카에 다녀오기 전에 나는 겁쟁이였다. 내 안에는 어두움밖에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그런 나를 보여주기 싫어 늘 가리며 살았다. 어머니 앞에서조차. 그러나 더 많이 나를 꾸미고 가릴수록 이상하게 난 더 불행해져만 갔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그 곳에서 나를 벗어버렸다. 그곳이 나를 게임에서, 두려움에서, 홀로 갇힌 마음에서 자유롭게 했다. 그 때 놀라운 세계가 어느새 내 눈앞에 펼쳐졌다. 아프리카에서 1년간의 행복한 시간을 잊을 수 없어서 나는 다시 1년을 다녀왔고, 그 들을 향한 순수한 마음이 내 가슴에 별들이 되어 박혀 새겨졌다. 그렇게 한국으로 돌아오기 싫었지만 젊은 날 아프리카는 나에게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고 있다.


담당 | 김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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