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회_부룬디의 역사. 손가락을 잃은 아이들, 그들에게 희망을 심자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이기도 한 송태진은 아프리카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마친 후 자신이 겪은 진솔한 경험들을 활자를 통해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스토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해외봉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버리게 한다. 또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안목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부룬디의 짧은 역사
탄자니아와 콩고민주공화국이라는 커다란 나라 사이에 김 가루처럼 끼어있는 조그만 부룬디는 지도로만 보았을 때는 특별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까이 들어와 보면 각각의 개성을 가진 8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유쾌한 문화가 있고, 진지한 역사가 있다.
문자가 없던 시절 부룬디의 역사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14세기경부터 르완다와 부룬디 지역을 아우르는 왕국이 형성되었다는 것이 알려졌을 뿐이다. 현지인들은 ‘관다우룬디’라고 기억하는 이 왕국은 제국주의 시절, 지금의 탄자니아 지역과 함께 ‘독일령 동아프리카’로 묶여 식민 지배를 받게 된다. 그러나 독일은 아프리카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이 왕국을 쉽사리 통치할 여력이 없어 주둔군과 관리 몇 명을 파견하는 데 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부룬디는 벨기에의 식민지로 편입되며 ‘레오폴드 왕의 유령’으로 상징되는 잔혹한 식민통치를 겪는다. 이때 벨기에는 그들을 원활하게 다스리기 위해 종족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주민들을 다수 종족인 ‘후투’와 소수 종족인 ‘투치’로 구분했고, 10퍼센트 남짓한 투치족에게만 고등교육의 기회와 공무원 자리를 주었다. 열등한 계층으로 전락해버린 다수의 후투족은 친일파 역할을 하는 투치족에게 분노를 쏟아냈다. 이러한 분열은 주민들을 단결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벨기에의 식민통치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전에 두 종족은 우호적인 사이였지만 벨기에의 이간질로 지독스러운 원수 관계가 되어버렸다.
시대가 변하고 북부의 르완다가 1961년, 남부의 부룬디가 1962년 각각 벨기에로부터 독립을 얻었다. 독립 이후 르완다는 후투, 부룬디는 투치가 정권을 잡는다. 정권을 잡은 종족은 다른 종족을 탄압하고 불이익을 주었고, 타 종족 역시 테러와 저항으로 맞섰다. 무력 충돌, 쿠데타, 학살이 빈번히 일어나며 후투와 투치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져갔다.
급기야 1993년, 부룬디에서는 내전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6.25전쟁에서의 낙동강전선, 동부전선처럼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 마을에서 함께 농사를 짓고 음식을 나누어 먹던 이웃들이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를 죽여야 하는 생존 전쟁이었다. 투치는 후투가 자신을 죽이려 하기 전에 먼저 후투를 죽여야 했고, 후투는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투치를 죽여야 했다. 총과 포는 물론 칼, 몽둥이, 도끼, 낫, 돌 등 상대를 죽일 수 있을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손에 들고 싸워야했다. 그 과정에서 30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난민이 되었다. 약탈과 강간, 학살 등 끔찍한 전쟁 범죄가 이성을 잃은 폭도들로부터 자행되었다. 무차별 살육으로 지친 국민들은 평화를 원했지만, 극단적인 인종주의자들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 전쟁을 계속 했다. 정부는 그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고, 수도 부줌부라 이외의 산악 지역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반군 게릴라들을 두려워해야 했다.

오스카 아저씨 댁에 놀러 가서 만난 아이들. 왼쪽부터 나오미, 심바, 센티아, 송태진(필자), 벨론, 피델리테, 멕시코에서 온 봉사단원 파올라(기타를 치는 단원), 이베테, 오드리네와 함께.
오스카 아저씨 댁에 놀러 가서 만난 아이들. 왼쪽부터 나오미, 심바, 센티아, 송태진(필자), 벨론, 피델리테, 멕시코에서 온 봉사단원 파올라(기타를 치는 단원), 이베테, 오드리네와 함께.
오스카의 아이들은 왜 9명이나 되나
부룬디에서 알게 된 오스카 아저씨는 오목눈이가 아기 새를 돌보듯 굿뉴스코 프로그램이 지역 사회에 정착될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했다. 그에게는 9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마치 삼겹살을 팔지 않는 고기집이 없는 것처럼 이 아이들이 참가하지 않는 행사가 없을 정도였다. 아이들은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연스럽게 섞여 봉사에 함께하고 장난치고 까불거렸다. 20대 청년 ‘심바’부터, 아직 젖도 못 뗀 갓난쟁이 ‘나오미’까지 줄줄이 이어지는 대군이다. 밝게 자라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아 아들 ‘벨론’에게 이야기를 했다.
“벨론, 너희 가족은 숫자가 많아서 보기가 좋아. 부모님이 정말 대단하시다. 아이를 9명이나 낳다니. 한국은 많아 봐야 서너 명이야.”
“9명이라고? 9명 아닌데. 6명이야.”
“음? 내가 볼 땐 9명인데?”
“몰랐구나? 우리 중에 3명은 형제가 아니라 사촌들이야.”
오스카 아저씨의 큰형이 전쟁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자식들은 둘, 셋씩 나뉘어 친척집에 맡겨졌다. 오스카 아저씨도 세 명의 아이들의 후견을 맡고 있었다. 세 명이나 되는 조카들을 받아줄 만한 재력 있는 친척을 둔 경우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에 가족이 흩어져도 친척과 함께 살 수 있는 것은 행운이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아프리카에서 남편을 잃은 여자가 대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홀로 돌보는 건 몹시 어려운 일이다. 건장한 남자들도 일자리를 못 얻는 와중에 교육도 받지 못하고 힘조차 약한 여자에게까지 돌아갈 파이조각은 없다. 일을 구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친척에게 맡기는 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말 그대로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게 된다. 먼지가 켜켜이 낀 보자기를 머리에 두르고 처마 밑에 앉아 손을 벌리는 바싹 마른 여자와 아이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란한 가정 안에서 누렸을 이들의 행복은 미풍에 꺾인 들꽃 줄기처럼 너무나 간단하게 바스라져 버린다.

 
 
손가락 개수가 제각각인 이유
부줌부라 거리를 걷노라면 본래 색이 뭔지 모를 만큼 허름한 흙빛 누더기를 걸친 아이들이 달라붙어 손을 내민다. 부모의 보살핌 없이 거리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다. 부모가 죽은 아이, 가출한 아이, 집을 잃어버린 아이, 버림받은 아이……. 그 녀석들이 눈이 쭉 째진 못생긴 외국인을 신기하게 구경하며 구걸을 한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그 아이들과 나는 좀 다른 부분이 있다. 나에게는 열 개의 손가락이 있다. 발가락도 열 개가 있다. 합쳐서 스무 개가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각각 다른 수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갖고 있다. 열아홉 개가 있는 아이, 열일곱 개를 갖고 있는 아이, 열 개만 있는 아이. 모두 같은 인간이건만 손가락 발가락 개수가 제각각이다.
거리의 아이들은 반반한 신발 하나 없이, 머리 대고 누울 잠자리 없이 아무 데나 뒹굴며 산다. 그런데 그 ‘거리’라는 곳은 푸른 초장의 폭신한 오솔길이 아니다. 가시나무와 깨진 유리, 쇳조각이 널린 삭막한 고행 길이다. 그곳에서 당한 베이고 찔린 상처가 곪고 또 곪아 뼈와 신경을 파고들고 급기야 아이들의 손과 발의 가락들을 하나씩 없애 버린다. 한국의 아이들이 부모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사달라고 울며 칭얼댈 때, 동년배의 부룬디 아이들은 까맣게 썩어버린 발가락 마디를 끊어내며 아픈 눈물을 삼킨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소지. 손가락 열 개는 물론 어깨 아래로부터 양 팔이 절단된 다섯 살배기 어린애를 거리에서 본 적이 있다. 눈이 완전히 풀린 채 상점 쇼윈도 앞에 널브러져 있던 그 아이는 반 뼘 정도 남은 짧은 토막 팔과 턱을 사용해 라이터를 입 안으로 집어넣고 가스를 흡입하고 있었다. 가스라이터를 막대 사탕인양 정신없이 빨고 핥는 아이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를 쳐다보는 사람조차 없었다. 수 천 명이 오가는 시내의 대로에 버려진 그 아이는 투명인간과도 같았다. 갑자기 울분이 터졌다. 나는 길가의 사람들에게 왜 아이가 가스 마시는 것을 나무라지 않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대답했다.
“내가 라이터를 뺏더라도 저 아이는 곧 똑같은 일을 반복할 거예요. 저 아이들은 구걸을 해서 돈을 받으면 음식 대신 본드나 가스를 삽니다. 그렇다고 저 아이를 우리 집에 데려갈 수도 없어요. 이봐요, 백인 양반. 대체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 나도 저런 아이를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렇지만 이건 시스템의 문제예요. 저 아이는 얼마 못가 죽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요. 모두 그걸 알고 있어요.”
아이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할 기회도 없이 강요되는 혹독한 삶. 비어있는 그들의 손가락, 발가락 자리를 누가 채워줄 수 있을까? 그들 중 몇 명이나 연필을 잡고 공부를 해 볼 수 있을까? 성인이 될 때까지 생명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들이 범죄와 성매매, 마약의 유혹을 피해 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부유하며 나의 뇌 속을 헤집어 놓았지만 괴로움만 더해갈 뿐 시원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룬디처럼 내전의 아픔을 겪은 이웃나라 르완다의 인종학살 기념관
부룬디처럼 내전의 아픔을 겪은 이웃나라 르완다의 인종학살 기념관
아프리카에 희망을 심고 싶다
해외봉사단 활동을 하면서 만나는 아프리카의 현실은 한국에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냉정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그렇기 때문에 해외봉사단이 있다. 현실은 암담하고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우리는 꿈을 갖고 일한다. 오스카 아저씨와 그의 9명의 아이들, 그리고 아프리카의 모든 어린이들을 사랑 속에서 건강하게 뛰놀며 행복하게 살게 해주고 싶다는 꿈. 현실과 다른 무모해 보이는 꿈이더라도 그것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된다.
지금 당장 내가 거리의 아이들 모두를 구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늘 뿌리는 씨앗이 머잖아 달콤한 열매로 돌아올 것을 믿는다.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아름답게 변화될 것이라는 꿈이 있기에 현실의 절망이 눈앞에서 희롱해도 굿뉴스코 단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담당 | 김민영 기자 일러스트 | 손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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