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메모리즈 in 탄자니아

해외봉사만큼이나 자신을 되돌아보기 좋은 경험이 있을까? 낯선 환경에서 발견하는 내면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고 성찰해본다면 어느새 한층 성장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탄자니아에서 행복한 한 해를 보내고 올해 2월 한국에 돌아온 유충현씨의 따끈따끈한 성장 스토리를 들어보자.

사나이 유충현, 자아 찾기
사나이 유충현, 자아 찾기
첫인상에 활기차고 순박해보이는 그는 키 178cm에 75kg의 몸집 좋은 청년이다. 원래 씨름 선수였다는 그는 부단한 노력 결과 황소트로피를 손에 거머진 화려한 이력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대인기피증까지 앓게 된 그는 탄자니아 해외봉사를 통해 성품이 바뀌었다고 고백한다.

나약한 마음 때문에
어릴 적 유충현 씨는 왜소한 체구에 소극적인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늘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지 못하고 하고픈 말을 속에 꽁꽁 담아두기만 했던 유충현 씨는 문득 강해져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씨름부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씨름부에 지원했어요. 다행히 담당 선생님께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며 체구가 작은 절 받아주시더라고요. 그렇게 씨름 선수가 되었고 열심히 먹고 열심히 운동하다보니 몸도 많이 강해졌죠.”
당시 유충현의 인생에 있어 씨름은 전부이자 대단한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니던 회사가 옮기면서 더 이상 씨름을 할 수 없었고 생각지 못한 어려움을 만났다.
“새로 전학 간 중학교에서 저는 설레기보단 두려움이 컸어요. 씨름을 해서 또래 친구들보다 20킬로그램 정도 과체중이었는데, 저를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이 꼭 저를 놀리는 것 같았어요. 친구들이 험만 말을 할 때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죠. 그 결과 점차 친구를 보기가 꺼려졌고, 뚱뚱한 제 몸이 미웠어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서도 이러한 삶은 계속 되었다. 좋아하는 씨름을 못하게 된 뒤 삶의 목표 없이 막연하게 살아가는 한 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계속 손이 간 인스턴트식품 때문에 체중은 점점 늘었다. 몸도 몸이지만 충현 씨에게 더 힘들었던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나약함 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바꿔보고자 선도부, 도서부, 신문부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첫 번째 변화, 군대에서 얻은 자신감
결국 고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힘들게 마치고 대학에 들어갔다. 보통의 학생들에겐 대학은 자유로운 곳이지만 충현 씨에게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더 힘든 곳이었다. 자기를 놀리는 사람은 없었지만 스스로 위축되어 먼저 다가가 어울리지 못했다. 그래서 늘 혼자 지냈다. 공부할 때도, 밥 먹을 때도, 쉴 때도.
“고등학교 때처럼 무기력하게 살기는 싫어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과에서 1등을 하고, 장학금을 받고, 교수님들께 인정도 받았지만 마음 한 구석은 계속 허전했어요. 외로웠지만 엉‘뚱한 데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부모님께 효도하자’며 애써 참으며 살았습니다.”
1학년을 마치고 도망하다시피 군대에 들어갔다. 남들은 괴로워할 법한 군대이지만 충현 씨는 행복했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격려해주시는 군부님과 선임들의 격려 덕분에 힘이 났습니다. 작업병으로 많은 일을 하면서 살도 27킬로그램이 빠지고 자신감도 얻었습니다. 힘든 만큼 보람찼고 힘든 시기를 함께 하는 동료들과 어울리는 시간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군대 생활을 보낸 충현씨는 제대를 앞두고 다시 대학으로 돌아갈 생각에 걱정하기 시작했다. 고민하는 후임을 보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임이 충현 씨에게 해외봉사를 가보지 않게냐며 굿뉴스코프로그램을 추천해주었다고 한다.
“그 얘길 듣자마자 ‘바로 이거다!’ 싶었어요. 마침 존경하는 법사님께서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 책을 선물해주시면서 제가 가진 문제들은 다 얽매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날 밤 그 책을 다 읽고 나자 제가 고민했던 것이 전부 제 고립된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책에 실린 또래 대학생들의 스토리를 본 후 충현 씨는 봉사를 결심했다.

 
 
두 번째 변화, 아프리카 오지 체험기
탄자니아에 도착한 충현 씨는 다시 한 번 군대 때의 포부를 펼치려 했다. 하지만 생활은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도착하자마자 열병에 걸려 체온이 40도를 훌쩍 넘기고 원인 모를 복통으로 고생했어요. 배가 고픈데 길거리에 음식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사먹을 수 없었고, 전자기기 없는 생활도 답답하고, 현지 음식도 입에 맞지 않아 불평이 쌓였어요. 그러면서 처음 올 때 가졌던 마음가짐이 하나씩 무너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하려는 마음으로 꽉 차있던 제 마음이 비워지게 된 좋은 계기였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비워지니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사람들과 손쉬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활발하고 말을 잘해서 사람과 친숙해지는 법도 배웠고, 오픈 마인드를 가진 외국친구들과 대화하기도 수월했다.
“처음 탄자니아에 도착했을 땐 영어도 못하고 말도 잘 못하니까 별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람들과 계속 어울리다보니 대화를 잘 못해도 듣는 것만으로도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말이 안 되도 표정과 몸짓으로도 대화가 되고, 나중에 는 제가 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그동안 어렵게 생각하고 힘들어 했던 것들이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는 동안 자연스럽게 해결됐어요.”
특히 유충현 씨는 현지 어린 아이들과 얘기를 나누는 게 재밌었다고 한다. 그래서 음악과 미술, 댄스, 성경, 종이접기 등을 가르치는 어린이 캠프를 준비했다. 열일곱 차례나 어린이 캠프를 준비하면서 여러 번 밤도 샜지만, 아이들이 캠프에 참석해 행복해할 모습에 오히려 즐거웠다는 말에 ‘정말로 좋아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스펙을 쌓기 위해 영어를 배우려 했었어요. 하지만 탄자니아에는 영어를 할줄 아는 사람이 적고 대부분 현지 언어인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더라고요.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너무 얘기하고 싶어서 결국 영어를 포기하고 스와힐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스와힐리어가 한국말처럼 친근하다는 유충현 씨는 자신의 이름도 스와힐리어로 지었다. “자이디Zaidi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영어로 ‘더more’이라는 뜻인데, 아이들에게 뭐라도 하나 더 주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 지었어요. 제가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배꼽을 잡고 웃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알비노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여러 번의 어린이 캠프 중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천키로 넘게 떨어진 ‘숨바왕가’라는 국경 도시의 한 작은 마을로 무전여행을 가서 어린이 캠프를 열었을 때의 일이다. 어렵게 히치하이킹을 통해 도착한 그 마을은 백색증 환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에는 알비노 환자들의 신체의 일부를 집에 두면 행운이 깃든다는 미신이 있어서 자고 있는 알비노 아이들의 팔, 다리를 잘라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인지 충현 씨가 찾아간 그 마을 역시 외부인을 굉장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린이 캠프를 열고자 설명하는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현지인들의 모습에 과연 아이들이 올까 걱정했다고. 하지만 당일 150명 가까이 되는 어린이들이 모여들었다.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많은 아이들이 올 줄 꿈에도 생각못했어요. 아이들에게 노래와 댄스를 알려 줬는데, 모두 마음을 열고 좋아했어요. 수수깡과 색종이로 만들어준 바람개비를 손에 쥐고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면서 제 주위에서 뛰어노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충현 씨는 그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는 것 같았다고. 그래서 비극을 만나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삶에 희망을 주고 싶었다.
1년간 충현 씨는 그렇게 어두운 땅을 뚫고 봄철의 새싹처럼 생기를 더하는 마음으로 훌쩍 자랐다. 자신처럼 혼자 고립된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청춘들에게 어서 나와 마음을 나누라고 손짓한다.

사진 | 배효지 기자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