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메모리즈 in 탄자니아

우리 엄마는 시각장애인이다.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1급 시각장애인. 눈을 뜨고 일어나는 아침에도 엄마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검정색 시야가 전부다. 난 그런 엄마가 너무 미웠고, 부끄러웠고, 내 인생에서 제일 숨기고 싶은 이야기였다.

ⓒMuhammad Mahdi Karim
ⓒMuhammad Mahdi Karim
내가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던 그 해에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다. 3급 시각장애인인 아빠는 혼자서의 생활은 어느 정도 가능했는데 그런 아빠에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이었다.
자식을 혼자 키울 수 없던 엄마가 나를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는 바람에 나는 시골에서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 8살이 되던 해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외할머니께서도 병으로 쓰러지시면서 나는 서울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가게 되었다.
외삼촌 집에 살면서 늘 눈치를 봐야했고, 엄한 외숙모가 나를 때리는 일이 잦았다. 그 후에도 다른 외삼촌이나 이모들 집에 옮겨다니며 살다가, 13살 때 경기도에 있는 이모집으로 또 다시 이사를 갔다. 그렇게 원치 않은 전학을 가야만 했고, 새로운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매일 울며 엄마한테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고 애원했지만 엄마는 쉽게 ‘알겠다’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내가 있을 수 있는 곳이 없기에…. 그러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원래 살던 동네 중학교에 입학해서 다시 외할머니와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난 그 곳에서도 편안할 수 없었다. 매일 같이 외할머니와 소리를 지르며 싸웠고, 이 모든 것이 엄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와 함께 다닐 때 느껴지는 사람들의 시선들, ‘ 나는 왜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원망,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자라는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내 마음은 점점 어두워졌다.
나는 울면서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달라고 소리 지르면서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 그럼에도 늘 내게 미안해하던 엄마는 일하면서 번 돈을 내가 달라고 하는 대로 주었고, 나는 비싸고 좋은 것만 사면서 그 돈을 순식간에 다 써버렸다. 부모님과 살지 않았기에 생활에 있어서 누구보다 자유로웠던 나는 내 멋대로 행동하면서 학교에서 소위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셨다. 내 속의 이야기들을 숨기고 싶어 더욱 더 나를 꾸몄다.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 줄 알았다.

 
 
탄자니아로 떠나다
2013년 여름, 친구 소개로 한국 월드캠프에 참가하게 되었다. 굿뉴스코 프로그램을 통해 해외에서 1년 동안 해외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온 언니와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같이 그 시간이 자기 삶의 전환점이었다는 말에 나도 내 인생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와의 사이는 틀어져갔고, 내가 돌이킬 수 있는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면서 굿뉴스코 워크숍에 참석했다.
그렇게 도착한 탄자니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가 공항 안까지 느껴졌다. 안 그래도 여름을 제일 싫어하는 내가 앞으로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지낼 수 있을지 너무 막막했다. 다음날 아침, 티를 마셨는데 이게 뭔가 싶었다. 설탕물과 생강이 섞인 듯한 맛이 너무 이상했다. 점심엔 현지 주식인 ‘우갈리’를 먹는데 이게 사람이 먹는 게 맞나 싶어서 몇 입 먹다가 전부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늘 손에 달고 다니던 휴대폰이 없으니까 머릿속에선 휴대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물이나 전기가 끊기는 일은 허다했고, 밖에 나가면 중국인이라고 놀리는 현지인들 때문에 속이 상했다.

속내를 이야기를 해 봐
결국 탄자니아에 도착한 지 한 달쯤 지나서 이런 저런 일들로 한국에 돌아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고, 지부장님께 처음으로 내 마음의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다. 지부장님께서는 ‘네가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돼. 그런데 우리는 네가 정말 끝까지 굿뉴스코 생활을 마치고 돌아가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마음을 정해야지’ 했지만 뒤돌아서면 자꾸 똑같은 생각들이 올라왔다. 나는 왜 이럴까 내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지만, ‘내가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정
말 변할 수 없는 사람이겠구나’라는 마음이들었고, 굿뉴스코 활동을 다 마친 후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현지인들과 대화하는 일은 나에겐 여전히 너무 어려운 숙제였다. 우리와 다른 생김새, 까만 피부, 사고방식 때문에 나는 쉽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들을 보며 무시하고 내 생각대로 대했다. 그러다보니 현지인들을 진심으로 사귈 수 없었다. 그러다가 ‘씨야’라는 언니를 만났다. 그 언니는 늘 말에 장난기가 가득해 첫 만남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씨야와 내가 둘이서 한 팀이 되어 함께 홍보를 나가게 되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우리 둘은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시간은 점심을 지나고 있었다. 그러다 씨야가 가족 이야기나 한국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 묻기에 그저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씨야를 보니 내 이야기를 들으며 울고 있는 모습을 봤다. 씨야는 진심으로 들어주고 있었다.

 
 
엄마의 사랑을 알게 되다
한국에선 내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내 자신이 너무 신기했다. 말하고 나니 전혀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숨길만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내가 내 생각 속에 혼자 갇혀있었을 뿐. 지금 난 누구에게나 나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탄자니아에서 처음으로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웠고, 지금 씨야는 내게 둘도 없는 언니이자 친구가 되었다. 또 더 많은 현지인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었고, 소중한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작은 일에도 같이 기뻐해주고 걱정해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들이었다.
그 후 나는 엄마의 진심도 알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엄마와 통화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어느새 엄마에 대한 나의 생각도 다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엄마가 보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못난 딸인 나에게 엄마는 ‘예쁘게 자라줘서 너무 대견하고 고맙다’며 나로 인해 ‘행복하다’고 말했다. 나 역시 엄마의 딸이라서 너무 행복하다.
이 곳에서의 생활은 내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내 모든 생각을 바꿔주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준, 새로운 만남들을 만들어준 굿뉴스코 생활이 내겐 너무나도 큰 1년이었다.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
 

담당 | 김민영 기자 사진 |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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