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회_부룬디에서 좌충우돌

<태진이의 좌충우돌 자전거 여행>의 저자이기도 한 송태진은 아프리카에서 해외봉사 활동을 마친 후 자신이 겪은 진솔한 경험들을 활자를 통해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의 이 같은 스토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 해외봉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버리게 한다. 또한 세계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안목의 길잡이가 될 것이다.

친구 디방에게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배우는 중
친구 디방에게 영어와 스와힐리어를 배우는 중
“으아아! 짝! 짜짝! 짝짝! 짝!”
아프리카의 컴컴한 깊은 밤중에 비명 섞인 박수 소리가 시끄럽다. 잠옷 바람인 나는 방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박수를 치며 돌아다니고 있다. 무슨 즐거운 일이 있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모기를 잡고 있는 중이다.

잠, 잠, 잠! 잠을 자고 싶어요
노곤한 하루를 보내고 깊은 잠에 빠지려할 때면 어김없이 모기 소리가 들린다. ‘위이이이이잉.’ 달빛 아래에서 도살자가 서걱이며 서슬 퍼런 칼을 가는 듯한 음산한 기운이 청각 기관과 뇌를 흔들어 잠을 깨운다. 분명 손톱보다도 작은 곤충의 미약한 날갯짓인데 나로호 로켓 발사 소리보다 몇 배는 요란하다. 어둠 속에서 뺨을 때리고 주먹을 휘둘러보지만 녀석은 허공을 겨눈 나의 미숙한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작은 흡혈귀는 내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이윽고 천천히 내 몸에 빨대를 꽂아 나를 잡아먹는다. 만물의 영장에서 곤충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린 불쌍한 나는 녀석의 주둥이에 찔리는 따끔한 아픔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잠 기운을 번쩍 날려버린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모기장을 살펴보니, 이런, 그물에 작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아마도 며칠 전 짐을 옮기다가 긁히며 찢어진 것 같다. 거지에게 냉장고 문을 열어준 꼴과 같았다.

 
 
빼앗긴 수면 시간을 억울해하며 모기장을 수선하고 있을 때 룸메이트 페니엘이 잠에서 깨어났다.
“쏭, 잠 안자고 뭐해?”
“모기장에 구멍이 나서 막고 있어. 너는 모기 안 물렸어?”
“모기? 모르겠는데.”
“나는 엄청 물렸어. 도저히 잘 수가 없어. 왜 모기가 너는 안 물고 나만 무는 거야?”
“그야, 내 피부는 검은색이니까 밤에 안보이고, 너는 하얀색이라 잘 보여서 그렇지.”
페니엘의 농담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부룬디 모기에 유독 잘 물렸다. 우리는 같은 모기장 안에서 잠을 잤지만 모기에게 물려 호들갑 떠는 건 언제나 나였다. 모기장 안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를 모기들이 늘 서너 마리씩은 있어서 잠들기 전에 그놈들을 척살하는 것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였다. 제대로 잡아놓지 않으면 분명히 한밤중에 불을 켜고 또다시 박수를 쳐야한다. 땀 냄새와 열을 감지해 모기가 찾아온다는 말에 밤마다 찬물로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지만, 그래도 모기는 나만 골라서 물어댔다. 그 놈의 주둥이 힘이 얼마나 야문지 돌팔이 의원의 침술마냥 따끔해 몇 번 쏘이면 잠 잘 생각까지 달아나 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멀쩡하던 페니엘이 끙끙 앓기 시작했다. 병명은 말라리아. 아프리카에 오기 전부터 선배단원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그 무서운 질병에 걸린 것이다.

무료 교실에 참가한 아이들과 함께. 이 아이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하는 사실이 안타깝다.
무료 교실에 참가한 아이들과 함께. 이 아이들이 말라리아에 걸려 고통하는 사실이 안타깝다.
작은 모기의 커다란 비극, 말라리아
말라리아는 해마다 1억 명 이상 감염되는 골칫거리 전염병이다. 모기의 주둥이를 통해 몸에 들어온 말라리아 원충은 잠복기를 거쳐 충분한 숫자가 모이면 장기를 공격하고, 신장, 간, 뇌 등 몸의 조직을 망가트려 결국엔 사망에 이르게 한다. 발병부터 죽음까지 단 2~3주에 이르는 경우도 있어 서둘러 조치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치명적인 상황을 맞는다. 말라리아는 지금도 일 년에 100만에서 300만의 목숨, 특히 어린이들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프랑스의 라브랑 박사가 모기로부터 말라리아가 옮는다는 걸 밝혀낸 지 10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말라리아 백신은 개발되지 않고 있다. 관광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예방약이 있긴 하지만, 그 약은 복용하는 동안에만 효과가 있어서 여행 기간 내내 먹어야 한다. 게다가 간을 상하게 하고 온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독한 약이라 오랫동안 먹기엔 무리가 있다.
평소 건강한 사람이라면 모기에게 물려도 말라리아가 발병하지 않는다. 잘 먹고 잘 쉬고 잘 움직여 면역력을 적정히 유지하면 몸 안에 말라리아 원충이 있더라도 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늘 건강할 수는 없다. 피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등 면역력이 약해질 때 불현듯 그 것은 찾아온다. 초기 증세는 몸살감기와 비슷한데 그 때 말라리아를 곧 지나갈 감기로 오인하고 참으려하면 절대 안 된다. 약한 감기 증상이라도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야 안심할 수 있다. 말라리아 초기에 병이 확인됐다면 치료제 몇 알 먹고 며칠 푹 쉬면 대부분 회복된다. 그런데 돌쇠처럼 무작정 견뎌내려 하면 병이 깊어져 내상을 입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는 대부분 진료 받을 시기를 놓치면서 병을 키우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모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언제든지 내게도 말라리아가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병의 초기에 제압하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말라리아에 걸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우리의 페니엘은 다행히 일찍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이번이 몇 번째 말라리아에 걸린 거냐고 물어보니 어릴 적부터 셀 수도 없이 걸렸단다. 어린이들에게 너무나 흔하게 걸리는 병이다 보니 진료비가 없는 가난한 부모들은 아이가 말라리아를 앓는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 낫길 기다리다 목숨을 잃게 하는 경우가 흔하다. 부룬디의 새싹들은 진료비 1,000원이 없어서 지금 이 순간에도 바싹 말라가고 있다. 작은 모기가 가져오는 너무나 커다란 비극이다.
의학이 발달한 요즘, 많은 병들이 예방 주사 한 방으로, 혹은 작은 물약 몇 방울로 퇴치되고 있다. 나는 말라리아도 서둘러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무료교실 시작
3월 5일. 2주간의 준비 기간 끝에 부룬디 무료 교육 수업의 새로운 학기가 시작됐다. 나의 첫 수업은 태권도. 부룬디에서도 중국 영화의 인기는 대단해서 대부분 이소룡, 성룡 등 중국의 액션 스타들을 잘 알고 있다. 영화 속에서 눈 작은 동양인이 펼치는 초인적인 무술을 한번 배워보는 것은 혈기왕성한 부룬디 남성들의 로망이나 다름이 없다.
흙바닥에 지붕만 올린 부룬디 IYF 태권 도장에 모인 50여 명의 학생들. 다들 흑인 특유의 날씬하면서도 탄탄하게 근육 잡힌 멋진 몸매를 갖고 있다. 도장 여기저기에서 무질서하게 몸을 풀고, 자기들끼리 치고 박으며 황비홍을 흉내내고 있는 오합지졸 녀석들은 내가 나타나도 인사할 생각도 없이 눈치만 본다. 단전에 힘을 잔뜩 주고 인상을 찌푸린 채 큰 목소리로 호통을 질렀다.

 
 
“안녕하십니까!”
털 뽑힌 닭처럼 도장 여기저기서 퍼덕거리던 녀석들이 나를 주목했다. 나는 한국말로 다시 크게 호통을 쳤다.
“안녕하십니까! 이것이 한국의 인사입니다. 앞으로 우리 태권도장에서는 이 인사를 사용합니다. 알았나요? 안녕하십니까!”
“아...녀하시니카?”
“목소리가 그게 뭡니까! 더 크게 더 크게!”
군대에서 배운 목소리로 크게 호통을 쳤다.
“태권도는 싸움의 기술이 아닙니다. 만약 여기에 싸우는 방법을 배우려고 온 사람이 있다면 잘못 찾아왔습니다. 태권도는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정신을 수양해 나를 지키고 약자를 보호하는 무술입니다. 태권도는 절! 대! 로! 싸움질 연습하고 힘을 과시하러 배우는 게 아닙니다. 만약 우리 태권도장에서 폭력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퇴학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대답을 할 때는 큰 목소리로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스! 티처!”
다행히 학생들은 진지하게 내 말을 따라주었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태권도 수업은 첫날부터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태권도 교실의 학생들은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젊은 청년들이었다. 가난한 부룬디에서 젊은이들은 범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첫날 이후로도 매 수업 시간마다 태권도를 배우는 사람은 수련을 통해 강해진 몸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정신을 강조했다. 학생들은 차츰 태권도가 가벼운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며 자부심을 가졌고, 자발적으로 봉사 활동에 참여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절망의 길을 걷던 학생이 상담을 신청해 희망을 얻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이 무료교실에서 보람을 발견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교사로서의 커다란 행복이었다.
태권도뿐만 아니라 IYF의 모든 무료 교육 수업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작은 소망을 부룬디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다. 돈이 없어서, 기회가 없어서 공부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들에게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이다. 배울 수 있다는 것은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고,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은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즉,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절망만 바라보던 부룬디 사람들은 무료 교육 수업을 거치면서 새로운 꿈과 가능성을 품게 됐다. 그들의 가슴에 심긴 작은 소망이 싹을 틔워 새싹이 되고 나무로 성장해 부룬디를 변화시킬 것이다. 오늘도 노트와 연필을 들고 무료교실에 참석하는 학생들의 눈에서는 절망 대신 희망이 반짝인다.

호박마차를 탄 듯 유쾌한 자전거 타기
부룬디에서 지내는 동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하고 재미있는 문화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나를 설레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전거 택시. 내 마음 속에서 자전거는 언제나 따뜻하고 즐거운 이미지로 떠오른다. 자전거를 운전하는 넓은 아버지의 등 뒤에 앉아 마을을 돌아다니던 어릴 적 기억, 학교를 오고 갈 때 친구들과 정신없이 페달을 밟으며 경주하던 추억, 그리고 돈 없이 무작정 젊음 하나만 믿고 자전거 전국 여행을 할 때의 순수한 낭만 등 자전거와 관련된 기억을 되짚을 때는 언제나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자전거 택시가 교통수단이 아니라 놀이기구처럼 느껴졌다. 자전거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감성 - 가족, 친구, 여행, 우정, 꿈, 순수, 희망 따위를 주렁주렁 매달고 달리는 자전거 택시. 가까운 곳은 100원, 멀어봤자 500원 남짓하는 저렴한 가격이면 산타클로스의 썰매, 신데렐라의 호박마차를 탄 듯한 유쾌한 감성에 빠질 수 있다. 비록 앞좌석 운전사가 뿜어내는 흑인 특유의 향취에 괴로워질 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이 택시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현지인들이 ‘택시 벨로’라고 부르는 이 자전거 택시는 우리나라의 가정용 자전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탱크를 만들 때 사용했을 법한 묵직한 강철 몸체에 운전자의 편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안장과 손잡이 등 전체적인 외관은 옛 한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쌀집 배달부의 자전거와 비슷하다. 하지만 손님을 위해 마련된 안락한 뒷좌석과 앞뒤로 요란하게 붙어있는 원색의 장식품에서 쌀집 자전거와는 다른 아프리카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
자전거 택시를 탈 때는 출발하기 전에 운전사와 가격을 흥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착하고 바가지를 씌우기 때문에 미리 요금을 정하는 건 필수다. 가격은 보통 거리에 따라 정해지고 오르막길이 많으면 더 받기도 한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이 흥정하려 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부르곤 하는데 그럴 때는 ‘나 주아 우나 당가냐!’(다 알고 있어. 이 사기꾼아!)라고 말하며 옆구리를 사정없이 찔러주면 값이 조금씩 떨어진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는 요금만큼 잔돈을 준비해 정확하게 주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고 액수가 큰 지폐를 내면 거스름돈 구하느라 시간이 엄청 걸릴 수도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조잡하고 어설퍼 보이는 자전거 택시 기사는 나름 부룬디에서 잘나가는 직업이다. 한 대에 100달러 정도 되는 자전거는 가족의 몇 달치 생활비와 맞먹는 보물이다. 복잡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어도 자전거와 튼튼한 몸만 있으면 돈벌이를 할 수 있으니 생활력 있는 청년들은 돈을 모으면 제일 먼저 자전거를 사려고 한다. 꼬질한 셔츠와 달랑거리는 슬리퍼를 신고 거리를 누비는 자전거 택시 기사들은 가벼운 존재가 아니다. 한 가족을 책임지는 부모의 자랑스러운 희망, 동생들의 든든한 후원자, 자식들의 멋진 아버지이다. 그 중에 수완이 있는 사람들은 저축을 더 해서 오토바이를 사서 오토바이 택시를 하기도 하고, 거기서 돈을 더 모아 진짜 자동차 택시를 운전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맨주먹으로 일궈낸 헝그리 정신의 승리라고 할 만하다.

부룬디의 대중교통 수단인 자전거 택시를 타고.
부룬디의 대중교통 수단인 자전거 택시를 타고.
부룬디의 자전거 택시 운전사
중학생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매일 자전거로 학교를 다녔던 나는 그 자전거를 볼 때마다 한번 타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귀한 돈줄을 엉뚱한 외국인에게 선뜻 빌려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까운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려 할 참이었다. 여느 때처럼 손님 잡기에 혈안이 된 자전거 택시 기사들과 가격 흥정을 하던 나는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여러분 중에 혹시 저쪽 부룬디 센터까지 백인이 태워주는 자전거 타보고 싶은 사람 있나요?”
“저요! 내가 타보고 싶어요. (우수수 검은 손이 올라옴)”
“제가 자전거를 운전할 건데요. 대신 그 사람이 나에게 돈을 줘야 되요.”
“에이, 그건 말도 안 되지. (후두둑 검은 손이 내려감.)”
“왜요? 원래 운전하는 사람이 돈을 받는 게 맞잖아요?”
“깔깔깔, 백인이 아프리카 사람에게 사기를 치려고 하네.”
“저한테 돈을 주는 게 이상하면 그럼 내가 50프랑(우리 돈 50원 정도)을 주고 운전하는 건 어때요?”
“50프랑? 너무 싸잖아. 센터까지 가려면 150프랑은 내야지. 싫어.”
“원래 제가 돈을 받아야 되는 건데 50프랑을 내는 거면 엄청 좋은 조건이죠.”
처음 듣는 해괴한 흥정에 자전거 택시 기사들은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자기 자전거를 끌고 앞으로 나왔다.
“내가 50프랑 받고 같이 가주지.”
“좋아요. 잘 태울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운전사를 뒤에 태우고 시장에서 산 물건들을 그 앞에 싣고 자전거를 출발했다. 아, 그런데 예상보다 자전거가 엄청 무거웠다. 게다가 바닥은 비포장 울퉁불퉁한 진흙길. 넘어질 듯 자전거가 크게 휘청거렸고, 나를 구경하러 모인 사람들은 백인이 자전거 운전도 제대로 못한다고 박수를 치고 깔깔거리며 즐거워했다. 투르 드 프랑스 마지막 결승점을 통과하는 사이클 선수처럼 시장 골목 좌우로 기립한 부룬디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나는 조심씩 자전거 운전에 익숙해져 갔다. 포장도로에서는 자신감이 붙어 속도를 내며 신나게 달렸다. 모처럼 느끼는 귓가의 시원한 바람이 상쾌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흑인을 태우고 가는 백인 자전거 택시 운전수의 모습에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몇 번의 고비도 있었지만 무사히 우리들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약속대로 자전거를 빌려준 주인에게 50프랑을 건넸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청년은 재미있는 경험이었다며 활짝 웃었다. 잠시 운전해도 진이 빠지는데 매일 이렇게 무거운 자전거를 몰면서도 미소를 짓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만약 내가 평생 자전거 운전을 하며 살아야 한다면 어떤 마음일까. 나도 이 친구처럼 웃으며 일할 수 있을까? 부룬디 사람들의 땀 냄새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담당 | 김민영 기자 일러스트 | 손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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