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홈스토리 이철희

유년시절 꽤 오랫동안 어둠 속에서 지낸 이철희 씨에게 주변 사람들은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표현을 쓴다. 마치 배추벌레가 나비가 되는 현상이 너무도 신기한듯 말이다.
미얀마로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 1년간 새로운 DNA를 가지게 된 이철희 씨,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지 소개한다.

소년 이철희의 어머니는 의사로부터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함께 정상아를 가지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89년 9월 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잦은 싸움과 무관심 속에서 성장한 이철희씨는 외로웠다.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슬펐던 이철희 씨가 대학생이 된 어느 날 아버지가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그 충격적인 소식에 그는 터널처럼 긴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마음에 큰 혼란을 겪었습니다. 마음을 잡지 못해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을 마셨고, 비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허전하고 슬퍼서 술만 마셨고 어머니의 속을 꽤나 썩여 드렸어요. 사실 전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셨을 때 제게서 나오는 모습은 아버지와 똑같은 점이 많았고, 아버지를 닮았다고 생각하니 괴로웠어요.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도 괴로웠어요.”
장사에 바쁜 어머니가 한번씩 아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이철희 씨에게는 잔소리로 느껴졌고, 견디지 못한 그는 도망치듯 군 입대를 결심했지만 그는 또다시 인간관계에 갈등을 겪었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선임들과 군 복무를 함께한다는 것은 괴로움 그 자체였어요. 그 뿐만이 아니었어요. 군대에서 지뢰를 밟아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요.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기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하루는 초소를 지키는데 몸이 꽤 좋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쓰러졌고 몸이 불덩어리가 됐습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병원에 갈 수가 없었는데, 심한 고열로 시달리다가 그때 처음으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까 죽기 전에 많은 것을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해외봉사를 다녀와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미얀마에서 가슴에 꽃이 피고
제대를 한 그는 미얀마로 1년간 해외봉사를 가려고 준비했다. 그동안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한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는 그는 미얀마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미얀마는 불교의 나라로 아침에 스님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집집마다 방문을 합니다. 맨 앞줄에 서 있는 어린 동자승이 종을 치면 사람들이 문을 열어서 밥을 주는 진기한 풍경도 보았어요. 남자들은 치마처럼 생긴 옷을 입고 여유롭게 웃고 다니는데 한국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문화였습니다.”
미얀마에 한창 한류 열풍이 불어 그를 본 이들이 가수 싸이를 닮았다며 좋아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 역시 미얀마 사람들을 서서히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모두가 그를 고운눈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미얀마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준비하기 위해 지방 도시로 한 달 반 정도 다니며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캠프에 초대하는 일을 했는데, 같이 다니던 현지인 ‘애뚱’과는 서로 서먹한 사이였어요. 애뚱이 시간이 오래 걸리니 흩어져서 사람들을 초대하자고 제안했어요. 그땐 미얀마어도 잘 모르고 그 동네를 잘 아는 것도 아니어서 두려웠어요.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시간이 지나도 애뚱이 오지 않아 1시간이 지난 후에는 애뚱을 찾으러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었어요. 혼자 저를 버려두고 어디론가 갔다고 생각하니 화도 났지만 시간이 더 지나자 그런 분노도 사라졌어요. 배가 고파서 국수도 먹고 음료수를 사먹기도 하다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애뚱을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게 아주머니가 친절하게도 의자를 꺼내주기도 하고, 선풍기도 틀어주어서 굉장히 감사했어요. 미얀마 사람들의 인심이 후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나자 애뚱이 저를 찾으러 왔어요. 애뚱은 제가 한국 사람이라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막상 저를 찾을 수가 없으니 걱정했대요. 저를 꼭 다시 찾으려고 오토바이를 타고 사방팔방 찾아헤매며, 저를 다시 만난다면 ‘널 좋아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했어요. 정말 신기했어요.”

사람들의 웃음이 가장 아름다운 나라
철희 씨는 미얀마 사람 하면 손꼽을 수 있는 게 ‘웃음이 가장 아름다운 민족’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가난하지만 한국처럼 각박하지 않고 직장이 없다고 천대하지도 않는 미얀마에서 철희 씨는 따뜻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고.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보다 미얀마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한글 아카데미를 열면 미얀마 젊은이들이 평균 20~30명 와요. 미얀마 사람들이 TV만 틀었다 하면 한국 드라마를 볼 정도이고, 한국어에도 관심이 많아요. 미얀마 사람들이 한국말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정말 예뻐 보여요. 한글 아카데미에서는 가요를 부르며 한글을 가르쳤어요. 마지막 수업날에 사람들이 한국어로 노래를 불러줬는데 아직도 잊지 못하겠어요.~”
하루는 한글 아카데미에서 처음 참석한 ‘아디’라는 남자아이를 만난 철희 씨는 그 아이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 됐다고.
“아디의 아버지는 내전 때문에 반군에 잡혀 동네에 잡혀 있었어요. 아디는 어머니와 양곤으로 피난을 와서 살고 있는데 어머니는 아파서 꼼짝을 못하셨어요. 그 아이가 식당에서 한 달에 7만 원을 받으며 설거지를 하는 허드렛일을 하고 있었어요. 학교에 다녀야 하는 나이지만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한글 아카데미에 참석해서 공부를 하게 된 아디는 무엇보다 한글을 배우고 꿈을 갖게 됐다며 고마워했어요. 아디를 보면서 그동안 먹을 것도 풍부하고 학교도 잘 다닌 저는 한 번도 행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철희 씨는 불안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진 게 없고 운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투정이었는지 알게 됐다.
“행복이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찾아온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됐어요.”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동안 소원했던 어머니와도 가까워졌다.
“어머니는 항상 바쁘고 항상 건강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는 항상 늙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1년 만에 어머니를 뵈니 주름이 늘었고, 꽤 왜소하게 느껴졌어요. 어머니가 절 사랑하지 않는 다는 생각에 어머니에게 항상 불만이 있었고 저도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미얀마에서 어머니와 잠시 통화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여전히 몇 분밖에 이야기하지 않는 어머니였지만 어머니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신다는 게 느껴졌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신 것만으로 이젠 감사해요.”
철없이 세상을 향해 불평하던 그가 달라졌다. 의젓해졌고 부모님의 사랑과 감사함을 느끼는 아들이 되어 돌아왔다. 그의 마음에 행복이 가득하니 환경은 달라진 게 없지만 정말 기쁘다고 말한다.

 
 

사진 | 배효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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