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근로장학사업 수기공모전 최우수상

누군가 바닥을 쳐야만 물 위로 솟아날 수 있고 비가 온 뒤에야 무지개가 뜬다고 했던가요. 우리네 인생에 있어 누구에게나 물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험이 있고 비가내리는 시기가 있다면, 저에게 있어서는 20대 초반 청춘을 살고 있는 바로 지금이 그 순간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있어 청춘이란 조금은 잔인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현실을 깨닫고도 꿈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시기라는 것이 저의 청춘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뜻을 다르게 생각하자면 청춘이 되기 전까진 현실을 채 깨닫지 못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저에게는 그랬습니다. 저는 청춘의 시기라고 불리는 20대에 접어들기 전까지 현실에 대해 까맣게 모르고 살았습니다. 청춘이라 불리게 되는 순간 현실을 깨달았고, 현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국가근로장학금 제도를 만나기 전까진 현실의 홍수 속에서 한참을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덕였습니다.

류주연_그저 해맑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꿈을 키우던 산골소녀가 도서관 사서의 꿈을 키욱기 위해 문헌정보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날이 선 현실을 깨닫는 순간 좌절했지만 국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꿈을 되찾아 진정한 청춘의 제2막을 열었다. 현재 부산대학교 언어정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다.
류주연_그저 해맑게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꿈을 키우던 산골소녀가 도서관 사서의 꿈을 키욱기 위해 문헌정보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날이 선 현실을 깨닫는 순간 좌절했지만 국가 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며 꿈을 되찾아 진정한 청춘의 제2막을 열었다. 현재 부산대학교 언어정보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다.
해맑게 꿈을 꾸던 산골 소녀, 현실과 마주하다
흔히 말하는 산골 소녀가 바로 저입니다. 한 학년에 8명이 전부인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연달아 나왔고 읍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학생 수가 많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순수함과 순박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공기 좋은 촌 동네가 저의 집이었습니다. 일주일에 이천 원씩 받아가며 방과 후 작은 구멍가게에서 군것질거리를 사먹는 것이 작은 가슴을 벅차게 하는 행복 중 하나였습니다. 제가 행복하기에 집안 사정이 어떠한지 잘 알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을 때, 입학할 때 필요한 등록금은 장학금을 받았고 기숙사에 들어가기 위한 생활비는 국가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을 이용했지만, 다들 그렇게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던 저는 그때까지도 우리 집이 가난한지 어떤지, 아니 심지어 가난이 어떤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현실을 깨닫는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큰 도시에 나오게 된 제 손에 쥐어진 첫 달 용돈은 십만 원. 이 큰 돈을 어디에 다 쓸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제가 가난을 깨달은 순간은, 첫 달 용돈으로 받은 어마어마하게 큰 돈인 줄로만 알았던 십만 원이 교재비로 하루 만에 바닥나서 가슴이 철렁했던 순간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첫 달 용돈이 바닥이 난 다음 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교재비로 십만 원을 다 썼다고 설명을 하고 여분의 용돈을 더 요구하는 제게 어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그 정적에 이상하게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깊은 한숨 소리 뒤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이만 원 더 부쳐줄끄마, 이걸로 다음 달까지 지낼 수 있겄제, 기숙사 밥은 나온께”였습니다. ‘엄마 아닌 것 같아, 여기 커피 한 잔이 몇 천 원이고 친구들이랑 밥 한 끼 먹으려면 오천 원이 훌쩍 넘어’라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물기 어린 음성이었습니다. 예고 없이 현실이 눈앞에 닥쳐오고 숨을 힘껏 들이마실 틈도 없이 나를 물속에 끌고 들어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산골 소녀에서 악바리로, 하지만 끝내 좌절
가난을 깨달은 뒤에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뛰어 놀고 방에 앉아 자연소리를 벗 삼으며 책 읽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던 저는 원래부터 도시에서 사는 친구들에게 물어가며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러 다녔습니다. 어떤 일이 나에게 맞을지도 몰랐고 학업과 병행하기에 어떤 일이 수월할지, 어느 정도의 시급을 받아야 적당한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첫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곳은 학교 앞 번화가의 가장 바쁜, 시급 3,200원을 주겠다고 한 편의점이었습니다. 그렇게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뒤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수업이 끝난 후 평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기숙사에 돌아가서도 바로 잠들지 않고 책을 펴는 악바리가 되었습니다. 자판기 앞에서 콜라 한 캔을 뽑아먹을 때에도 한참을 서서 고민하고 편의점 폐기 직전의 김밥이 팔리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안쪽으로 슬쩍 밀어 넣는 자린고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일하다 너무 배가 고파 손님들이 먹고 남기고 간 라면 국물을 카운터 구석에서 몰래 마시다 비참한 마음이 들어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들었던 현실은 나를 치열한 세계로 내몰았습니다. 어찌 보면 남들보다 더 이를 악물고 일했던 것은 생활비를 벌기 위한 것도 있지만, 어느 날부턴가 제가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여윳돈이 좀 없냐며 걸려오는 어머니의 전화를 웃으면서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쉴 새 없이 달려 2학년 1학기까지 마친 뒤 저는 휴학을 했습니다. 스스로 모든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욕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간직해 왔던 꿈을 위해 스스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돈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일자리 부터 구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은 저녁 8시부터 새벽 6시까지 일하는 호프집 야간업무였습니다. 다른 이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퇴근을 하고 휴일 없이 일한 탓에 몸도 많이 상했지만 그저 꿈을 생각하면 즐겁고 행복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을 일했고, 내 몸 하나 누이면 발 디딜 틈도 없는, 한달에 18만 원인 고시원에서 악착같이 생활하며 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모았습니다.

드디어 꿈을 위한 여행을 떠나고자 했을때, 역시나 현실은 예고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원래부터 좋지 않았던 집안 형편은 아버지가 개인 파산을 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고, 마침 제가 돈을 다 모았던 시기와 겹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난 뒤, 물속에 빠져 있던 나를, 이제 막 헤엄치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한 나를 누군가 숨을 쉬지 못하게 머리를 눌러 내리는 듯한 좌절 속에서 나도 숨 좀 쉬어야 되지 않겠느냐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댔습니다. 저는 날이 밝자 그 모든 돈을 부모님의 통장으로 부쳤습니다.

꿈을 위한 진정한 청춘의 막을 올리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친 저는 결국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는 채로 복학을 했습니다. 그저 흘러간 1년의 시간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현실은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가혹했고 세상이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편은 어디에도 없고 가족에게마저 기대지 못하는 내게 어깨 한 쪽 내어줄 사람은 이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나를 옆에서 지켜보며 안쓰러워하던 친구가 다른 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고 이거라도 해보지 않겠냐며 추천해 준 것이 한국장학재단의 국가근로장학생이었습니다.
처음엔 무슨 소용일까 싶었습니다. 시급이 조금 더 높다 뿐이지 여전히 학업과 일을 병행하는 건 똑같다며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만 뱉었습니다. 그러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청을 했고, 내 꿈과 연관이 있는 학교 도서관으로 희망 근무지를 선택했습니다.

어느덧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일한 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근로장학생 제도를 알게 되고 시작하게 된 그 순간이 내 청춘 제2막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처음의 시큰둥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국가근로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저는 어마어마한 것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는 꿈의 모양에 틀이 잡혔습니다. 오래 전부터 간직해왔던 꿈이기는 했지만 그저 막연하게 갈망했던 꿈에 대해 현실적으로 확고한 틀을 잡게 된 것입니다. 그 계기는 처음으로 근무했던 기관인 학교 도서관에서의 근로였습니다. 글을 쓰며 사는 것이 꿈인 내게 항상 뒤따라오는 과제와 같은 질문은 ‘과연 글 쓰는 것만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처음엔 그저 도서관이 익숙한 곳이기 때문에 신청을 한 것이었지만 그곳에서 근로를 하며 내 진로로서 진지하게 사서를 선택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책과 함께 일하며 책 속에서 생활하는 근무 환경이 제 열정에 불을 붙이는 것처럼 매혹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정이 생기자 근로 장학생으로 일을 하면서 업무의 많은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울 수 있는 기회들도 생겼고, 업무의 많은 부분들이 내 적성에도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실제로 현장에 몸담고 있는 훌륭한 롤모델들이 도처에 있었으니 틈나는 대로 배우고 질문하며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절망으로 가득 찼던 제 가슴에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헤엄조차 치지 못하도록 머리를 눌러 내리는 현실만이 있을 뿐, 제가 기댈 곳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절망 속에서 우연히 만난 국가근로장학생 제도는 제게 한 줄기의 숨구멍이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장학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높은 시급과 오후 6시 이전까지로 정해져 있는 근무 시간은 제가 대학에 들어오고 난 뒤 처음으로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유시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학기 중에는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그렇게 좋아하는 책들을 읽고 글을 쓸 시간까지 생겼습니다. ‘왜 진작 이 제도를 알지 못했던 걸까’ 하고 스스로를 원망할 정도로 국가근로장학생이 된 후의 시간들이 행복했습니다. 뒤늦게라도 세상이 저를 눌러 내리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제가 기댈 어깨가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진심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국가근로장학금을 만난 뒤의 제 삶은 많이 변했습니다. 현실을 깨달은 뒤 거듭된 절망들 속에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칠대로 지쳐있던 제게 국가근로장학금은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눌러 내리는 현실에 포기하려 했던 꿈을 다시금 찾게 되었고, 그 꿈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 것이 국가근로장학금이었습니다.

저는 앞서도 말했듯이 청춘의 현실을 깨닫고도 꿈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닌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청춘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의 1막을 현실을 깨닫고 좌절하는 데에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현실의 홍수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다시금 되찾았습니다. 바로 국가근로장학금 덕분입니다. 그래서 국가근로장학금을 만난 뒤의 삶은 내청춘의 제2막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야 비로소 청춘이라고 불리기에 아깝지 않을 만큼의 용기까지 갖추게 된 것입니다.

내 청춘의 2막을 올려주고, 좌절했던 제게 기꺼이 눈물겨운 어깨 한 쪽을 내어준 한국장학재단과 국가근로장학금 제도에 깊이 감사합니다. ‘좌절은 1막으로 충분하니 너도 이제 그만 꿈을 향한 희망으로 가득 찬 2막을 올려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저 또한 얻은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앞으로도 꿈을 향해 나아갈 것입니다. 언제나 그러했듯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제 국가근로장학금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함께 있으니 더욱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바닥을 치고 물 위로 솟아날 일, 비가 그친 뒤 뜬 무지개를 바라볼 일만 남은 것입니다. 꿈을 이룬 다음에는 저와 같은 청춘을 겪게 될 많은 이들에게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고 싶습니다. 국가근로장학생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청춘으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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