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생존자 다비드 바르 메이르

인간의 존엄성을 상기시키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 유대인의 학살 속에서 나치의 잔인성과 생명을 보존하고자 사투를 벌인 장면들이 전 세계를 눈물짓게 했다. 최근 쉰들러에 대해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나치의 잔인성과 유대인의 홀로코스트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가족을 잃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은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의 인터뷰를 통해 유대인들의 고통과 희망을 전한다.

 
 
필자가 오래 전 이스라엘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당시 히브리어로 주제 발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친구가 책을 들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나의 할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나의 할아버지는 쉰들러 리스트에 이름이 올라가서 아우슈비츠로 가지 않고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후 결혼을 했고, 오늘날의 제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쉰들러 리스트의 유대인 후손입니다. 제손에 있는 것은 할아버지의 자서전입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독일 나치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절대 잊지 마라, 또한 쉰들러가 어떻게 은혜를 베풀었는지 절대로 잊지 마라.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자손 대대로 유산으로 마음에 물려주어라’ 하고 이야기했다. 친구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사람이 누군가에 게 생명의 은인이 되면 그 누군가는 평생 고마워하며 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그 혹독한 시간을 지나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헝가리의 엄격한 유대인의 집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정책에서 가족을 잃고 마우트하우젠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은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를 소개한다.

 
 
Q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먼저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예, 안녕하세요? 저는 헝가리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마을에는 32가구의 유대인 가정이 있었습니다. 유대 정통 종교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도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카톨릭 신자였어요. 저희 집안에서는 꽤나 유명한 랍비들이 배출되었어요. 네 명의 형제와 세 명의 누이가 있습니다. 저는 랍비로부터 교육을 받았고 이디시어(독일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언어)를 할 줄 알았지만 집에서는 주로 헝가리어를 사용했습니다.

Q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 헝가리의 상황은 어땠는지 그리고 가족들의 상황과 이별에 대해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1944년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헝가리를 침공했고 헝가리의 유대인들은 게토, 즉 독일이 만든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으로 이동했어요. 이미 유대인 말살 정책이 시작됐고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죠. 게토로 끌려간 유대인들이 다시 수용소로 보내지는데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젊은이들은 전쟁용 노동을 위해 차출되어 노동 수용소로 갔어요. 힘이 없는 늙은이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물론 둘 다 나중에는 죽음의 수용소로 바뀌었지만 말입니다.
당시 유럽에 사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어요. 하지만 이스라엘 땅의 주인이 유대인이 아니었고 살 수 있는 터전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에 정착해 있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이 집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고 곧 전쟁이 끝날 것을 믿고 대부분 독일과 유럽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럽에 있던 유대인들의 희생이 더욱 컸습니다.저의 아버지도 어머니의 권유로 가족을 위해 이스라엘 땅을 살펴보러 이스라엘에 다녀왔어요. 이스라엘로 가자는 어머니의 간곡한 청에 아버지는 조금 시간이 있다며 헝가리에 좀 더 머물기로 결정했는데 그것이 화를 불러오게 됐어요. 그 후 전쟁이 시작됐고 헝가리가 점령당하면서 헝가리에서도 유대인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 첫째 형은 우크라이나 수용소로 끌려가고 둘째 형은 전쟁 전에 혼자 이스라엘로 도망을 쳤어요. 저는 헝가리 수용소로, 남동생은 이스라엘로 도망치려다가 배에 자리가 없어서 헝가리로 돌아온 후 숨어지내다 잡혀서 우크라이나 수용소로 옮겨진 후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전쟁 직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큰누이는 결혼을 해서 다섯 살짜리 조카가 있었는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났어요. 작은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헝가리에 살던 많은 일가친척들이 끌려가서 수용소에서 죽고 그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이들이 무수했지요. 큰형은 헝가리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대형마트 같은 큰 유대인 상점을 경영했어요. 어느 날 외국인들에게 하루아침에 가게의 모든 물건을 약탈당했고, 가게마저 강제로 빼앗긴 채 쫓겨났습니다. 그러다가 수용소로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살기 위해 목에다 십자가 목걸이를 걸고 카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게 고통의 시작이었죠.

Q 헝가리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어떠했습니까?
우리는 일을 했습니다. 땅을 파고 독일군을 위한 군사 도로를 만들고 독일군 전투기가 다니는 공항을 짓는 일에 끌려갔지요. 거의 1년 가까이 헝가리 수용소에 있었는데 적어도 6개월 동안 독일군을 위해 군사 작업에 동원이 되었어요. 매일 적은 양의 빵과 물 그리고 수프를 배급받아 먹었습니다.

Q 독일군이 갑작스럽게 헝가리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오스트리아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을 텐데요.
전쟁이 무르익고 러시아의 반격이 세지면서 수세에 몰리기 시작한 독일은 1944년 헝가리 수용소 사람들을 오스트리아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어요. 1월말 우리는 도보로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동했어요. 목적지는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였습니다.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 맨발로 걸었고 10일 동안 철길을 따라서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걸어갔어요. 독일군들은 거칠게 다그치며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 10일 간의 죽음의 행진을 하는 동안 배급은 모두 끊기고 물 한 방울, 빵 한 조각도 공급받지 못했어요.
물론 독일군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꼬박꼬박 세끼의 정량을 챙겨 먹었지요. 독일군이 식사를 하는 시간이나 휴식시간에는 소변을 보는 척하며 겨울철에 길가에 조금씩 나있는 얼어붙은 이름 모를 풀들을 뜯어먹기도 하고 무엇이든 먹을 것처럼 생긴 것은 주워다가 몰래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걷는 동안 우리는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고 많은 사람들이 걷는 도중에 탈진하고 쓰러졌습니다. 그들은 그냥 죽거나 총살 당했어요. 특히 걸으면서 대열에서 처지는 사람은 길가에 쉬도록 앉혀놓고 뒤로 가서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누구든지 50m쯤 뒤쳐지면 무조건 총으로 쏘았습니다. 저 역시 밤낮 없이 걷는 동안 몇 번이나 쓰러질 뻔 했습니다. 너무 추웠고 배도 고팠고 목이 말랐지요. 저도 모르게 비틀거릴 때마다 뒤에서 친구들이 말했습니다.
“가자! 힘내! 걸어! 너, 걸어야 돼, 넘어지면 죽는 거야, 힘내서 걸어!!”
우리는 오스트리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도착했고 2월부터 마우트하우젠에서 지내며 5월에 미군이 올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개방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오늘날 개방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특히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광장 사진을 보며 그는 50년 전의 일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후세에는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말을 이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도착했습니다. 독일군들은 하늘이 훤히 보이고 사방이 막힌 수용소 광장에다 우리를 집어넣고 거기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막사에 더 이상 수용할 자리가 없다면서요. 제가 도착했을 당시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나 대략 1만 명이 조금 넘는 사람들이 광장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 끼 수프와 빵을 배급받았어요. 물론 고기는 일절 없었죠.
당시 제 나이 18살이었고, 젊다는 이유로 또래의 모든 젊은이들이 일터로 끌려가서 노동을 했어요. 마우트하우젠에서는 주로 채석장에서 일을 하거나 적의 탱크를 빠트리려고 큰 구덩이를 파거나 혹은 시체를 묻을 구덩이를 파는 일들을 했습니다.
특히 채석장에서 하는 일은 너무 혹독하고 힘들었어요. 하루종일 한 끼밖에는 먹지 못하고 돌산을 깨부수고, 질통에다 그 돌과 흙을 가득 싣고 가파르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 나르는 일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빽빽한 계단으로 올라가며 돌과 흙을 날랐는데 그때 어깨를 짓누르는 질통의 무게는 말할 수 없이 무거웠지요. 사람들은 그 계단을 죽음의 계단이라고 불렀고 아직도 그렇게 기억되어 부릅니다. 마우트하우젠에서의 노동은 정말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달여 동안 배급이 끊겨서 그야말로 마우트하우젠은 지옥으로 변해갔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는데 그들을 묻기 위해 구덩이를 파는 일로 노동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Q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마지막 한 달은 독일군이 모든 배급을 멈췄다고 들었습니다. 미군이 오기 전까지 마우트하우젠의 마지막은 어떠했는지요?
러시아가 진격해 오기 전에 독일군은 자신들이 러시아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독일군들은 각국의 모든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죽이기로 작정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 서 죽고 총살당했습니다. 마우트하우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는 마지막 남은 유대인들을 굶겨 죽이기로 결정하고 모든 배급을 중단합니다. 물도 먹을 것도 일체 중단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하던대로 채석장 등 노동을 계속 시켰어요. 보름쯤 지났을 때는 거의 매일 3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막사로 자리를 배치받지 못한 사람들이 광장에 빽빽하게 있었는데 정말 누울 자리가 없어서 취침시간에는 그냥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거나 서로 몸을 포개어 누워 자거나 했습니다. 노동시간에는 나가서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는 것을 먹었습니다. 수용소에 습기가 많아 달팽이들이 나오는데 달팽이를 날것으로 잡아먹곤 했죠. 작업장 주변의 물을 마시고 풀을 뜯어서 씹어 먹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옆에서 얼마 전까지 서로 이야기하며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둘 쓰러졌습니다. 헝가리에서부터 알던 친구들이.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탈진으로 쓰러져 죽어 나가고 저의 옆으로, 앞으로 쓰러져 뒹굴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면 시체가 되어 구덩이에 던져졌는데, 나중에는 쓰러진 그 자리에 놔두고 방치했어요.
저도 하루는 땅을 파는 임무를 받았는데 기운이 없었지만 맞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땅을 파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너무 힘이 없고 어지러웠습니다. 어느 군인이 철조망 옆에서 개에게 음식을 주는데 그 개가 음식을 먹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모르게 저를 데리고 간 독일군 작업반장에게 개에게 주던 음식을 나한테 좀 주면 안 되느냐고 몸짓을 하며 말했는데 그 독일군이 허리춤에서 진압용 몽둥이를 꺼내서 사정없이 두들겨 패서 정신없이 맞은 적이 있습니다. 그 독일군은 빨리 광장으로 돌아가라고 소리쳤고요.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의 이야기는 비참하고도 생생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뒤늦게 들어와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든 섭취하려고 했지만 한 달 이상 음식을 먹지 못한 이들은 실상 모든 의지가 사라지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참으로 숙연해졌다.

죽음의 계단. 하루 종일 한 끼밖에는 먹지 못한 수용소 사람들이 돌산을 깨부수고, 질통에다 돌과 흙을 가득 싣고 가파르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걸어올라가 나르는 일을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질통의 무게가 말할 수 없이 무거웠고 고통스러웠다.
죽음의 계단. 하루 종일 한 끼밖에는 먹지 못한 수용소 사람들이 돌산을 깨부수고, 질통에다 돌과 흙을 가득 싣고 가파르게 만들어진 계단으로 걸어올라가 나르는 일을 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질통의 무게가 말할 수 없이 무거웠고 고통스러웠다.
당시 그곳에는 뒤늦게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와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움직일 힘이 남아있는 사람은 계속 무엇이든 먹으려 하고 살려고 했습니다. 저 역시 하루 한 끼씩 주던 배급이 완전히 끊기고 난 후 처음 한두 주 동안에는 간절히 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살아야겠다, 무엇이든 먹어야겠다는 소망이 간절했어요. 하지만 한 달쯤 되었을 때 제 마음속에는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언제 쓰러졌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광장 바닥에 누워서 숨 쉬기조차 힘겨운 시간들이 지나갔지요.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먹어야겠다는 의지도, 그 어떤 의지도 남아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생각이 멈춰버린 것 같았어요. 두렵다는 마음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두려워할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힘이 다 빠졌고 바닥을 딛고 일어설 힘이 없었습니다. 그냥 그대로 누워서 끝이 오길 기다렸습니다. 끝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누가 먹을 것을 준다 해도 일어나서 받아먹을 힘이 없었어요.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마지막 한 달 간은 화장실을 갈 일이 없었습니다. 먹은 것이 없었기에 화장실을 갈 일도 없었어요. 간다고 해도 모두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그런 것에 신경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1945년 5월 미군은 수용소로 들어와서 점령했다.독일군은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했고 수용소 독일군 중 마지막 임무를 맡고 끝까지 남아 있다가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체포되어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미군들은 수용소 광장에 즐비한 시체, 뼈만 앙상히 남은 유대인들의 모습에 놀랐다. 사람들은 미군들에게 달려들어 먹을 것을 달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또 한번의 비극 아닌 비극이 일어났다.

미군이 들어 왔을 때 수용소의 사람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미군들을 환영했어요. 저는 시체들 사이에서 그냥 힘없이 누워 있었습니다. 미군들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했고, 미군들은 그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군용 소세지 통조림, 옥수수, 빵, 고기 등을 막 나누어 주었고 사람들은 미친듯이 받아먹었어요. 그날 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배탈이 나서 또 죽었어요. 오랫동안 굶어서 약해진 위장이 탈이 나고 장이 뒤틀려서 세상을 떠나게 됐다고 의사들은 말했지요. 안타까웠어요. 저는 이미 위장에 문제가 생겨서 전혀 소화를 못 시킬 것을 직감했고, 그들과 달리 누워 있었어요. 임시병원으로 옮겨진 저의 키는 170m에 몸무게 23kg이었습니다. 미군들이 보살펴 주었고 따뜻한 수프와 음식도 매일 잊지 않고 주었습니다. 병원에서 제 몸이 서서히 회복되었지요.

 
 
Q 다시 살아서 헝가리로 돌아가셨을 때의 감회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 살고 계신데 어떻게 오셨나요?
미국과 러시아가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우리는 걸어서 다시 헝가리로 돌아가기로 계획했습니다. 물론 옷과 신, 따뜻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받고 가도록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단체 이동을 원치 않았고 헝가리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몸이 회복되고 마우트하우젠 근처의 가시밭에서 3일간을 숨어 지내다가 기차를 타고 헝가리로 돌아왔습니다. 기차 안은 숨 쉴 틈 없이 붐볐지만 마음속엔 생명에 대한 감사와 자유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헝가리의 우리집에 도착했을 때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어요.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집 문이 열렸고 큰형과 일가친척들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서 돌아와 있었습니다. 모두가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어요. 큰형이 헝가리의 부드러운 빵과 따뜻한 우유를 주었습니다. 저희는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가기로 했어요. 하지만 큰형은 독일에서 공부를 더 하고, 둘째 형은 형수의 입국 허가증이 나오지 않아서 저 혼자 이스라엘에 왔습니다. 영국군은 우리 모두를 사이프러스로 보내서 유대인 캠프에서 적응 훈련을 받게 했어요. 다섯 달 동안 지냈고 매달 1,500명씩 뽑아서 이스라엘로 보내졌고, 저는 이스라엘에서 새 삶을 시작했습니다.

Q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예, 대부분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겪었던 일들, 특히 독일인이 우리에게 한 일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유대인들은 반드시 생각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잘못은 무엇이며,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비드 바르 메이르 씨는 전 세계에서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생존자 중 몇 안 되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인터뷰는 더욱 의미있게 다가왔다. 한 인간이 어떤 생각을 품느냐에 따라 사람을 죽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인터뷰를 마치고 야드바쉠이라는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박물관을 다시 방문했다. 히틀러와 나치의 광기, 처참히 죽어간 유대인들의 영상을 보면서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만큼 비참해질 수 있는지 여실히 보았다.

※ 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치가 세운 유대인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수가 무려 600 만 명이 넘는다. 당시 유대인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은 나치의 유대인 집단 수용소 중에 가장 잔인하게 기억되는 곳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이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우트하우젠 수용소가 있다. 희생당한 유대인들의 유족들에게는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의 광장 그리고 채석장과 죽음의 계단은 영원한 고통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도나우 강변이 있는 마우트하우젠 마을 인근에 세워진 이 수용소는 1938년 4월부터 수용소를 시작해서 1939년 봄 국립수용소로 승격되었다. 반나치주의자들과 구 소련의 전쟁포로들을 수감하기 위해 만든 감옥형 수용소로 주변의 작은 수용소들을 통합해 관리하면서 독립수용소로서의 기능도 함께 했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와 그 관할하에 있는 인근 수용소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7년간 총 33만 명 이상이 수감되었고 그 중 12만 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굶어 죽었다. 그 중에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지만 전쟁의 막바지에는 유대인들의 수용소로 이름을 남겼다.

 
 
장주현Joo-Hyun Jang
<투머로우> 특파원 장주현은 이스라엘에서 유대인과 이스라엘의 역사, 문화를 다방면으로 널리 소개하고 있다. 이스라엘 현지인들의 삶과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그는 현지어 구사능력도 뛰어나 <투머로우> 지면을 통해 이스라엘에 관한 글로벌 소식을 알리고 있다.

 

취재 및 사진 제공 | 장주현 특파원 담당 | 김민영 기자 디자인 |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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