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르의 변화 수기

새해가 되면 가장 먼저 ‘신년 계획’을 세우고 ‘다짐’한다. 하지만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달라지고 변화될 수 있다고 확신하다가도, 여전히 작심삼일로 끝나고 인생의 쓰디쓴 굴레의 쳇바퀴를 반복해서 돌게 된다. 불행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대던 한 청년이 어떻게 마음을 회복하고, 밝은 삶을 얻을 수 있었는지. 페루 청년 빅토르를 보며 새해의 비전과 용기를 얻자.

▲ 빅토르_페루의 성 토리비요 데모그로배호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년간 한국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하고, 전북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1학년으로 재학중이다.
▲ 빅토르_페루의 성 토리비요 데모그로배호 카톨릭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년간 한국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하고, 전북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현재 1학년으로 재학중이다.
페루에 정착된 개방적인 남녀 간의 연애관이 젊은이들의 무분별한 인간관계에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남미 여성들의 미혼모 문제는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청춘을 악몽에 비유하며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 이들이 생겨났다. 청년 빅토르도 바로 그러했다.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삶의 아이러니를 경험한 그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과도 같았다. 20살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달려갔지만 마치 나방이 불꽃을 향해 날아가 온몸이 타들어 가듯, 무모하고도 아픈 상처를 남겼다.
남미 사람들은 어린시절에 부모님의 헤어짐, 아버지의 재혼 등을 흔하게 겪는 편이지만, 빅토르에게는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부모님이 헤어진 것은 제가 다섯 살 때 일입니다. 엄마가 두 번째 남편인 제 아버지를 만나서 저를 낳았지만 결혼을 하신 게 아니어서 관계는 불안정했어요. 특히 아버지가 술을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엄마는 더욱 괴로워하셨죠. 엄마는 늘 아버지처럼 살지 않도록 저에게 술을 마시지 말라고 훈계하셨어요. 저는 엄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싶었고 공부도 열심히 해서 페루에 있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학 입학 축하 기념으로 엄마가 친구들과 축하해주는 작은 파티를 열어주셨어요. 그때에는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는데 그날의 술이 화근이 되어 20대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말았습니다.”
친구들과 술자리를 좋아하게 된 빅토르는 대학 1학년 때 음주문화에 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에서 3등을 할 정도로 학업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제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또한 술에 취한 상태에서 학과 시험을 볼 때에도 자신만만해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꽤 유능한 젊은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자 친구로 인해 인생이 180도 달라질 것은 알지 못했다.

벗어날 수 없는 유혹에 빠지다
“여자 친구의 불행한 사연을 알게 된 후 저는 그녀의 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만나서 정식으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피아였기 때문에, 그분 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빅토르는 당시 술을 마시지도 않으면서도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던 그녀의 아버지를 따르기 시작했다. 점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의 무리가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싸움도 곧잘 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자만심을 가지게 되며 자신이 한 편의 드라마에 주인공이 된 것처럼 생각했다. 마약에도 손을 댔지만 언제든지 싫을 땐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술을 마시면 기억이 나지 않는 사태까지 벌어졌어요. 언젠부터인가 의식을 잃은 채 마약에 빠져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주변 친구들이 저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충고했어요. 전 그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내가 스스로 조절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무언가에 홀렸는지 학교에 갈 때도, 엄마 몰래 마약을 하고 점점 불법을 저지르는 범죄자가 되어가고 있었어요.”
하루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빅토르가 엄마에게 선물 받은 시계까지 팔려했다. 이런 그를 보고 친구들은 또 만류했다.
“빅토르, 생각해 봐! 네가 10년간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 모든 것을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이젠 엄마를 실망시켜 드리고 있잖아!”
그날 그는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됐다. 그리고 엄마에게 받은 선물을 팔려고 할 정도로 자기 자신이 제어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엄마에게 이 모든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어요. 엄마에게 말하기가. 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된 형도 마약에 빠졌는데요. 저 역시 그렇게 엄마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는 생각이 드니 괴로웠어요. 하지만 정말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에 엄마에게 말씀드렸죠.”
빅토르는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히다가 이내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제 이야기를 듣던 엄마도 우셨어요. 정말 제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엄마가 저를 안아주시면서 ‘우리 예전에 많은 어려움을 만나서 이겼잖아. 잘 될 거야!’ 하고 격려해 주셨지만 쉽지 않았죠. 마약을 끊기 위해서 두문불출하며 3개월간 집에서만 있었지요. 엄마의지속적인 사랑 안에서, 친구들과의 관계를 끊고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3개월 만에 친구 생일 파티에 초대받은 빅토르는 ‘술을 마시지 말라’는 엄마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술은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빅토르가 마약을 끊은 줄 몰랐던 한 지인이 어느 날 그를 화장실로 불렀다. 그는 그곳에서 순간적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약을 흡입했다. 마음속으로 갈등을 했지만, 자신에게 마약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위안을 삼았다.

 
 
절망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과신의 결과로 다시 혹독한 1년을 보냈습니다. 마약에서 절대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사촌 동생이 대학생들을 위한 월드캠프에 참석해보지 않겠냐고 연락이 왔어요. 그런데 웬 중국인과 같은 아시아에서 온 분들이 행사를 주최하고 있었죠. 하지만 며칠 그곳에 참석하면서 저와 전혀 다른 세상을 밝고 힘차게 사는 한국인 친구들과 사람들을 만났어요.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도 그들처럼 웃고 싶었고, 행복한 인간관계를 맺고 싶었어요. 한국으로 오기엔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버지가 극적인 도움을 주셨어요. 저는 그렇게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고, 버려진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빅토르는 한때 자신이 한국에서 적응하며 사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해 페루로 돌아가려고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도착한지 3개월 됐을 때 학생 캠프에 참가해 잊지 못할 경험을 쌓았다.
“학생 캠프에 오기 싫었던 한 말썽꾸러기 학생이 있었어요. 갑자기 저에게 다가와 그 아이가 과자를 건네는 겁니다. 까만 눈동자를 가진 그 학생이 ‘형, 저는 형과 친해지고 싶어요. 외국인 형을 이 캠프에서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즐거웠어요.’ 하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적잖이 당황했어요. 그 학생의 마음을 느꼈는데, 제 가슴이 따뜻해지는 겁니다. 정말 고마웠어요. 그때부터 한국생활에 보람을 느끼게 됐어요. 한국이라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세계을 만나는데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할 마음을 가지니, 쉴 틈이 없더라고요.”
빅토르는 2014년 여름, 수천 명이 참여하는 청소년 캠프에서 스페인 언어권 통역을 담당했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아카데미를 열어 스페인 교실도 운영했다. 홍콩도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해외 대학생들을 위해 프로그램 행사 운영에 참여해 자원봉사를 했다. 한국에서 무역을 정식으로 공부하고 싶어 막노동으로 학비도 벌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한순간 삶의 벼랑 끝에 몰려 추락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배울수 있기에 기뻐한다.

▲ 한국의 초등학생들과 등산을 함께하며
▲ 한국의 초등학생들과 등산을 함께하며
제2의 고향 한국에서
해외봉사로 보냈던 1년이 지나고, 다시 한국에 남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 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2015년 24살의 빅토르의 눈은 맑고 밝았다. 시원시원하고 훤칠한 외모에 한국말 역시 능통해 남아메리카 청년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제가 한국인인 줄 착각할 때가 많아요. 제가 한국인처럼 생겼나 봅니다.^^”
필요한 단어를 구사하기 위해 이따금 눈을 찡그릴 때에야 비로서 그가 한국어를 구사하기 위해 노력하는 외국인인 사실이 실감된다. 다른 언어와 달리 외국인에게는 한국어의 발음이 쉽지 않기에 유창하게 말하는 그가 특별히 언어감각이 탁월한 게 아닌가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페루에서 영어를 배웠는데 언어를 습득하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저 자신을 잘 알죠. 언어 감각은 형편없어요.”
“한국에 처음 올 때 굿뉴스코 지부장님이 ‘한국 사람들이 다소 무뚝뚝할 수 있으니 항상 먼저 말을 걸고 밝게 인사를 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어요. 또 ‘누구를 만나더라도 먼저 다가가 친구를 사귀되라’는 조언도 해주셨어요. 막노동을 하며 만난 인부 아저씨들은 욕도 잘하시는데, 덕분에 저에게는 큰 관심을 보여 주시고 잘해주세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자세히 공부하고 알아가던 그는 한국어가 스페인어보다 훨씬 상세하고 표현할 수 있는 폭도 넓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어는 정말 매력적이에요. 한국어에는 있는 말이 스페인어에는 없어서, 가끔 스페인어로 말할 때 마음 상태나 감정, 느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가 있죠.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어에는 없는 ‘답답하다’는 단어를 처음 배웠어요. ‘정’, ‘자존심’, ‘성악’ 등과 같은 한국말은 스페인어로 대치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서 스페인어로 통·번역을 하기가 힘들어요. 아직도 문법, 글쓰기 등은 쉽지 않아요. 하지만 한국어를 배우는 게 재미있고 즐거워요.”

▲ 2014년 7월, 총장포럼에서 페루 학장님을 의전했다.
▲ 2014년 7월, 총장포럼에서 페루 학장님을 의전했다.

스페인어와 한국어의 어순 차이도 가끔 그의 머리를 지끈지끈하게 하지만 한국어를 더 정확하게 배우기 위해 2014년에는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페루에서는 건축학도였던 그가 무역업을 배우며 새로운 비전을 생각하게 됐다. 한국에서 2년 3개월 지내는 동안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해준 또 다른 가족이 생겼다.
“한국말을 잘한다고 생각하면 한국어를 더 못 배우고, 못한다고 생각하면 배움의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조언해 주셨어요. 앞으로 내 젊은 날의 에너지를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 싶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란 걸 알았어요. 저는 저처럼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청춘은 백만 송이 꽃보다 더 다양한 모습으로 피고 진다. 기자가 본 빅토르는 한국에서 자신만의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중이었다.
“저는 한국에서 다시 인생을 찾았고, 꿈과 희망을 만났어요. 앞으로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 생각하고 싶어요. 무역업도 열심히 배우고요.” 

사진 | 홍수정 기자 디자인 | 전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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