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미국을 생각)’ 하는 쫀득한 마음의 발견 (1)

사실 콜럼버스 이전에 미국을 발견한 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사업가인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 유럽에는 이미 콜럼버스의 항해보다 그의 항해가 알려져 있었다. 1507년 마르틴 발트제뮐러는 세계지도에 이탈리아 사업가의 공을 기념해 이름을 새겨넣은 넣은 것이 콜럼버스가 아닌 아메리카였다. 아메리카 발견 이후 유럽의 청교도들과 귀족,  노동자와 많은 사람이 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아일랜드에서는 인구의 1/4인 160만 명이 이주하기도 했다.

 
 

남부에 정착한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해 일을 시켰고, 북부 사람들은 청교도들로 구성되어 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청교도인들의 이주는 척박한 미국을 변화시키는 데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청교도들은 독립적이고, 정직하고 독창적이며 성실했다. 그런 그들의 성품이 미국을 일구어내는데 큰 몫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1858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더글러스와 논쟁을 벌였다. 당시 남부에서 노예로 전락한 아프리카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링컨은 노예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경제성장이 활발했던 북부와 노예를 통해 부를 축적하던 남부의 격한 분쟁이 일어났다. 남북전쟁 이후 민주주의 첫 시초로 만들어진 제도들이 흑인, 여성, 빈민, 21세 이하에게는 투표권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했다.
192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여성에게 투표권이 생겼고, 1950년에 흑인은 실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사실 계급, 남녀, 인종, 경제적으로 차별이 만연해 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미군들이 돌아와 결혼하면서 주택과 결혼하는 쌍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1946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비붐 시대에는 7,640만 명이 넘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1950년 집과 자동차, 패스트 푸드, 대중음악 등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1930년대 만들어진 텔레비전도 히트한 것은 1950년대. 텔레비전은 가족 간의 대화를 대폭 줄게 했다. 광고를 보면서 새로운 물건을 구매하고 싶은 욕구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산업의 발전이 꼭 인간을 유익하게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디자인 | 이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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