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이면 데뷔 20년차인 배우 차태현의 톡톡 튀는 코믹 연극으로 흥행의 기대감을 상승시킨 영화 <슬로우 비디오>. 입소문이 나더니 개봉 11일만에 100만 관객이 넘은 이 영화의 매력은 무엇일까? 이 겨울, 부족한 감성을 2배로 업 해주는 영화 속 마음의 동체시력을 소개한다. 

 
 
1990년 오스트리아에서 시작된 ‘슬로비 족 Slobbie’은 90년대 미국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슬로비 족은 ‘천천히 그러나 더욱 일을 잘하는 사람들Slow But Better Working People’의 약칭이다. 그들은 현재 맡은 일에 충실하고 직장을 옮기지 않는다. 주식투자 대신 저축에 힘쓰고, 하루에 두 시간 이상 가정생활에 신경을 쓴다. 또한 회사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고액 연봉자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며 낮은 임금에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느리고 천천히’의 삶을 사는 슬로비 족과 영화 <슬로우 비디오>의 주인공 여장부는 많이 닮아있다.

다들 너무 빠르고 바쁘게 산다.
내가 보듯이 가끔은 느리게 흐르면 좋을 텐데.

영화 <슬로우 비디오>에서 남자 주인공 ‘여장부(차태현)’의 의미심장한 한마디다. 영화 속 여장부는 어린 시절부터 탁월한 동체시력의 소유자다. ‘동체시력Dynamic Visual Acuity’이란 움직이는 물체를 순간 포착해내는 능력으로 실제로 일반인보다 운동선수들에게 필요하다. 움직이는 공을 캐치해 내는 시력이 좋아야 하므로 이승엽 선수는 컴퓨터 화면을 잘 보지 않기로 소문나 있다. 날아오는 공에 적힌 숫자를 맞추는 연습을 했다는 스즈키 이치로 선수의 이야기도 있다. 탁구 선수, 복싱 선수, 격투기 선수들도 동체시력이 뛰어나거나 이를 발달시키는 훈련을 한다. 영화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여장부의 동체시력이 과장되게 표현된다. 빠르게 날아오는 야구공을 정확하게 잡아내는 여장부는 실력자이지만 달리기만 하면 한쪽으로 쓰러진다. 뇌가 동체시력을 인식하는 능력이 떨어져서 동체시력의 부작용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 까닭에 안타깝게도 야구 선수로는 대성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는 방에 틀어박힌 채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수많은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에서 간접적으로 인생을 배우는 사회의 약자로 살아간다.

 
 

여장부는 왜 CCTV 속 인물에 주목하는가?
성인이 된 여장부는 세상밖으로 나왔다. 그에게도 동체시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CCTV를 이용해 범죄를 예방하고 범인을 잡아내는 일을 주로 하는 CCTV 관제센터에 취직이 된 것이다. 범인을 잡는 공을 세웠지만 그에게 더 관심이 있는 것은 200대의 카메라 밖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여장부에게 그들은 마치 200편의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과 같았다. 혜화동 일대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서 손수레를 끌며 일을 하는 소년, 마을버스를 운전하며 퇴근 후엔 밤마다 놀이터에서 혼자 벽을 향해 힘없이 야구공을 던지며 시간을 보내는 노총각,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였던 이상형 봉수미. 여장부는 드라마를 보듯 CCTV에 나타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여겨본다. 그리고 문득 세상 밖으로 그들을 만나러 나갔다. 특히 자취생 봉수미는 택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초등학교 친구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빚도 갚지 못해 깡패들의 횡포의 대상이 된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며 살아가는 그녀는 세상 밖으로 나온 여장부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극중의 여장부는 인물들의 삶에 숨은 사연을 발견하고, 마음으로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중심적인 인물들에게 여장부의 이런 관심이 불편하기만 하다. 영화 속 여장부는 세상을 향해 교류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마음을 닫고 산다.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는 여장부는 달리면 시력을 잃는다는 안과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위험에 처한 봉수미를 구하기 위해 시력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달린다. 그런 여장부의 몸부림은 관객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하루의 소중함을 수채화 같이 표현해낸 영화의 행복한 결말은 메아리가 되어 관객의 내면에 맴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가?’ ‘행복은 도대체 어떻게 발견하는 것인가?’   
만약 우리가 마음의 동체시력을 가진다면 삶엔 어떠한 변화가 생길까? 한편의 영화지만 여장부가 가진 마음의 동체시력은 어린 시절부터 집단 따돌림을 받으면서 가슴 아픈 시간을 극복한 덕분에 가지게 된 힘이다. 비록 시력은 잃어버렸지만 주변을 훈훈하게 만들고 사랑을 얻게 된 여장부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가지 소중한 섭리를 발견하게 된다. 외형적으로 주인공이 남들보다 느리고 뒤처진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천천히 사색하며 지나온 시간의 가치는 소중했다. 바쁘고 각박하게 사는 현대인보다 생의 본질에 더 깊이 다가가 행복을 얻은 것이다.

 
 

마음의 동체시력이 안겨주는 행복
몇 해 전 한국은 5000만 인구 일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했다. 20-50클럽 회원국에 가입한 한국과 선진국들은 경제적인 고속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풍요 속의 빈곤처럼 얻은 것이 있는 반면 잃은 것도 있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이혼율 1위라는 불명예를 기록했다. 한국인의 삶의 질도 시간적 여유와 마음의 여유가 사라져 황폐해진 것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다. 미래의 일꾼인 젊은이들도 경제와 복지의 혜택 이면에 학업과 스펙 쌓기에 바빠 이기심만 발달한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그 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기보다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살피거나 포용하는 배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행복할 조건이 많아도 만족이 없고 오히려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다.
 타인이 쉴만한 그늘이 형성된 사람은 인간관계를 더욱 건강게 만들 수 있다. 자기를 과신하는 병폐에서 벗어나서 타인을 포용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발효와 숙성을 거친 깊은 사고의 힘은 남을 위하고 공동체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자신도 행복하게 만드는 마음의 필수 요소이다. 
 
남을 포용하는 마음의 동체시력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라는 심리학 용어가 떠오른다. 추운 겨울날 서로 함께하면 따뜻한 줄 알지만 가시가 있어서 가까이 할 수 없는 딜레마. 우리 사회도 쉴만한 그늘의 필요성은 절실히 느끼지만 그늘이 형성되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나와 다른 스타일, 다른 생각을 포용하거나 다른 사람의 실수와 허물을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부족한 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도태되고 있다.
다른 사람을 향하여 분노와 판단의 돌을 던지는 우리 모두도 동일한 부족함과 허물을 가진 사람들인데도 깊이 생각하는 힘이 부족하니까 자신을 높이 평가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만 커져서 상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납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좀 더 깊고 구체적으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동체시력이 있다면 나와 다른 스타일의 사람들을 포용하며 그들이 다가와 쉬게 할 수 있는 큰 그늘을 가진 인생 나무가 되리라. 이 겨울 마음의 동체시력을 키워야 하는 이유다.

디자인 | 김진복

저작권자 © 데일리투머로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