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china '썸~' 타는 이유 (3)

개그 중 <썸&쌈>이 요즘 핫 하다. 연애 심리를 아주 잘 표현해낸 썸과 쌈(사랑이냐 싸움이냐)의 스토리에 사람들은 박장대소했다. 조용한 물리학도로 숫기 없던 한 청년이 중국을 사랑해 ‘썸’을 타게 된 사연이 있다. 급기야 전공까지 중국어학과로 바꿔서 몰입했다. 현재 대학교 4학년인 이영표 씨는 중국으로 해외봉사를 다녀오면서 외국어의 보고寶庫를 발견했다.  2014년 아시안 게임과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서 통역까지 맡은 그의 중국 해외봉사의 ‘썸’ 스토리를 소개한다.

▲ 이영표(명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4학년)
▲ 이영표(명지대학교 중어중문학과 4학년)

2007년 명지대학교에 입학한 파릇한 새내기의 머릿속에는 중국이란 나라가 ‘바가지, 인신매매’와 같은 단어들로 점철됐다. 2008년 이영표 씨가 중국으로 해외봉사를 가려고 결심했을 때 그런 흉흉한 뜬소문을 마음에서 떨쳐내야만 했다.
“평소 말투가 거칠고 공부에 취미가 없던 친한 형이 있었어요. 그 형은 마술을 전공해서인지 이상한 멋에 취해 살았는데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 꽤 건실한 청년으로 변했어요. 아프리카로 다녀온 형이 유창하게 영어로 말하며 삶에 새로운 비전을 갖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그 형이 변했다면 나도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저 역시 도전이 됐습니다. 그런데 워크숍에 참석해서 보니 어떤 나라를 다녀와도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굿뉴스코 봉사로 중국에서 온 한 친구와 친해졌는데, 중국이란 나라가 유독 친근하게 느껴져서 선택했어요.”
누구에게나 생애 크고 작은 우연한 기회가 다가오지만 그것을 감지하고 기회를 잡은 사람은 드물다. 특히 내면보다 외향적 아름다움에 매혹되기 쉬운 20대 초에 이영표 씨는 낯설고 거친 환경 속에서 봉사하리라 생각했다. 물리학도였던 그가 중국어 기초조차 몰랐지만 중국인 친구 덕에 중국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져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무탈하게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모든 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생생한 중국어 습득, 그대로 따라 하기
“중국에서 만난 지부장님은 해외봉사단원인 우리에게 해외봉사의 가치뿐만 아니라 유창한 언어 실력도 선물로 주고 싶어 하셨어요. 삼 개월 간 오전에는 발음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무조건 말을 걸며 입을 떼는 연습을 병행했어요. 특히 오후에는 가진 것 없이 나가서 저녁밥을 해결하는 미션을 목표로 삼았죠. 처음에는 중국어를 전혀 모른다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에서 온 저를 친숙하게 대해주는 중국인 친구들을 하나 둘 사귀기 시작했어요.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재미를 붙여서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언어를 습득하게 됐죠.”
덕분에 그는 교과서에나 나올법한 딱딱한 언어가 아닌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살아있는 활어活語를 배운 셈이다. 중국한어수평고시HSK(Hanyu Shuiping Kaoshi) 시험에서 최고 등급인 6급을 갖게 됐고, 회화도 고급 등급을 획득했다. 굿뉴스코 프로그램을 정성 들여 활동한 덕에 자연스럽게 얻게 된 언어능력이 그에게는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하다.

 
 
국경을 넘은 우정, 친구 조동운
한반도 보다 무려 44배가 큰 땅덩어리. 자동차로 서너 시간 거리를 옆 동네라고 표현하는 중국인들의 스케일은 과히 광활한 대륙인답다. 그런 중국인들을 대하노라면 그는 한국인과 다른 배포에 감회가 새로웠다. 동북부 길림성 장춘시에 있는 다섯 개의 대학에서 매주 1회씩 돌아다니며 한글을 가르쳤고, 명절이 되면 한글 반 친구들을 모두 초대해 캠프를 열기도 했다. 그중 같은 숙소를 사용했던 ‘조동운’은 그의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친구였다.
“기타를 좋아했던 저는 고급스러운 기타 하나를 장만해서 중국으로 갔어요. 기타를 좋아한 친구 조동운을 알게 됐는데, 그 친구는 아주 오래돼서 수리가 필요한 기타를 참 잘 연주했어요. 그 친구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기타 치는 법과 중국 노래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죠. 저는 한국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어요. 긴 시간을 공들여서 만든 중국 노래에는 고급 단어가 많고 운율에 맞게 쓰여 있죠. 수십 곡의 중국 노래를 터득하자 언어가 꽤 늘기 시작했죠. 준수한 외모에 명문대인 길림대학을 다닌 그 친구는 과묵하지만 배려심이 있었죠. 전 사실 팔랑거리고 가벼운 스타일이지만 그 친구를 통해 진심이 말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해외봉사가 거의 끝날 무렵 그는 한국으로 귀국할 준비를 하기 위해 기차역으로 나갔다. 그는 마중을 나올 줄만 알았던 중국인 친구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동운이에게 마지막 인사할 기회가 없어서 우울했다.  
“연습장을 한 장 곱게 찢어서 동운이에게 줄 편지를 썼어요. 숙소에서 나올 때 편지와 기타를 가지런히 놓고 나왔어요. 역에서 만나면 고마웠다고 인사하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아서 ‘다들 공부하느라 바쁜가 보다’라고 생각하니 우울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와!’ 하는 함성이 들리는 거예요. 사방에서 사람들이 의자를 넘고 달려오는 겁니다. 알고 보니 친구들이 모두 짜고 역에서 미리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한국 대학생들을 환송한다고 노래를 불러주고 편지도 읽어주며 선물을 전해줬어요. 부끄럽지만 그 많은 역에서 펑펑 울었죠. 역무원 아저씨는 폭동이라도 난 줄 아셨는지 호루라기를 불며 달려오셨는데 정말 잊지 못할 기억이에요. 동운이는 저희가 떠나고 숙소에서 기타와 편지를 보며 눈물을 찔끔거렸다고 해요. ^^ 작년에 친구 동운이는 결혼해서 옛날에 함께 봉사했던 도시 장춘에 잘 살고 있대요. 그 친구를 꼭 한번 만나고 싶어요.” 


 
 

한국으로 귀국 후 그는 IYF(International Youth Fellowship)에서 핫닭미디어 팀의 학생 영상 팀에서 활동했다. 많은 사람들이 굿뉴스코 단원들의 귀국발표회 무대에서 그가 만든 영상을 시청했다. 한 편의 감동적인 영상물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매력에 그는 영상 제작자의 꿈을 갖게 됐다. 군대를 전역하고 다시 학교에 복학해서 6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2013년에 그는 중국 광저우 중산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집중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또한 그 시기에 중국 운전 면허증도 따고 중산 대학교와 기남 대학교 대학생 50여 명을 모아서 한글반도 운영했다.

2014 아시안 게임 사회자, 2014 장애인 아시안 게임 통역원
2014년 올 하반기는 이영표 씨에게 특별하다. 과거 그는 표현을 하거나 주관이 약해서 난처한 상황에도 살며시 웃어넘길 만큼 숫기가 없고 소심했다. 누구 앞에 드러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품을 지녔다. 그런 그가 아시안 게임과 장애인 게임에서 사회자와 통역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로 2014년 9월 14일부터 30일까지 아시안 게임에서 일하게 됐어요. 담당하게 된 역할은 장내 아나운서였고요. 샷건 종목 중에서 트랩, 더블트랩, 스키트 종목이 진행되는 경기로 종합사격장에서 관중들을 대상으로 경기를 소개하고 시상식을 진행하는 등의 사회자 역할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의 도핑 테스트가 끝나면 기자회견에 들어가서 중국 메달리스트의 통역을 담당했어요. 결선 경기와 동메달 결정전, 금메달 결정전의 사회를 맡았죠. 저는 개인적으로 아나운서에 대한 자질은 전혀 없는 것 같아요. 올바른 표준어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굿뉴스코 활동을 하면서 방송국에서 영상 자원자로 기자 역할을 했던 경력과 중국어 통역이 가능하다는 점이 아나운서로 선정된 결정적인 요인인 것 같아요.”
그는 10월 13일부터 25일까지 열흘간 장애인 아시안 게임에서도 통역 일을 맡았다. 이제는 사람들이 좋고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다는 그. 오전 8시에 경기장으로 출근하면서 올려다본 가을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워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고. 
“통역원의 역할은 몸이 불편한 선수들의 편의를 봐주고 의사소통을 돕기 때문에 퇴근 시간은 6시지만 일정하지 않아요. 사무실에 상주해서 통역하고, 경기를 진행하는 팀 통역도 맡았죠. 특히 대만 팀이 12개 종목에 출전해서 휠체어 농구, 볼링, 휠체어 스포츠 댄스 등 다양하게 통역을 했어요. 또 필요할 때마다 차량, 식사, 숙소 관리 등 한국의 업무 담당자들과 대만 사무 팀들을 연결해주는 일을 하죠.”
통역은 수준별로 다양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부족한 실력과 상관없이 최대한 기회를 잡으라고 말한다. 한두 번 경험이 쌓이면 점점 고급 통역에도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보다 활동적인 그의 소심했던 과거를 상상하지 못한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부담스러웠던 그였지만 굿뉴스코 활동을 꾸준히 한 덕에 자신의 부족한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벗어나게 됐다고 고백한다.

세상을 밝게 이끌 주역이 되고 싶다
대학생에게 1년이란 시간은 삶의 5%에 해당하는 긴 시간이다. 그 시절 무엇을 해야 할지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또한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한계를 도전해보고 가능성을 테스트해볼 좋은 기회이다.

 
 
“굿뉴스코 해외봉사를 다녀온 대학생들이 흔히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때 가장 행복했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실제 그 나라에서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단원들은 지부장님을 따라서 온 마음으로 활동했던 친구들이었어요. 저 역시 해외봉사를 다녀온 후 긍정적인 삶의 변화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국제적인 매너와 바른 자세를 배울 수 있게 됐죠.”
이영표 씨는 현재 눈부신 경쟁력을 얻었다. 뼛속까지 입력된 소심증을 날려버리고 누구와도 대화하는 민간 외교관이요 자유인이 되었다. 그는 꿈과 희망을 잃어버린 많은 청소년들이 굿뉴스코를 만나서 밝게 변화되기를 바란다. 또한 장래를 로드 맵 해주는 선배 멘토가 되길 꿈꾼다.

사진 | 홍수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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