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회 정부지원학자금 장관특별상 수상

몹시 추웠던 때가 불과 몇 주 전인 것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날씨가 따뜻하다. 대학 새내기로서의 첫 봄이 나에겐 다른 누구의 봄보다 더 따뜻한 것 같다. 걱정했던 대학교 학비와 생활비, 그리고 부모님의 기대와 주위 사람들이 보내는 연민의 눈빛이 이제는 내 발목을 잡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기숙사 문을 나서서 강의실로 이동하는 내 발걸음에서는 그야말로 즐거움과 행복함이 넘쳐난다. 이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련을 넘어왔던가. 그 시련을 지나 이 자리에 당당히 서 있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백혈병, 그 힘겨운 전쟁
“엄마, 나 너무 어지러운 거 같아. 다리도 아프고.”
초등학교 6학년 3월의 어느 날, 문득 어지럽고 몸 구석구석이 아파왔다.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도 보고, 푹 쉬어도 보았다. 그러나 나아지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무거워지기만 하는 몸. 가끔 하얘지는 눈 앞. 감기 몸살이겠거니 하고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보내버렸다. 다시 집 근처의 작은 병원에서 진료를 보았을 때 의사선생님은 좀 더 큰 병원으로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하셨다. 그 날, 큰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받아보시고는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염없이 울기만 하셨던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렸던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우리 집 침대 위에 누워 어머니에게 왜 우냐고, 그만 울라고 말했다. 가족 모두가 괴로움에 잠들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고, 새벽쯤에야 어머니께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를 말씀해주셨다. 백혈병. 어렸던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위로할 수 없었다. 그 때부터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가끔 드라마에서나 보던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나와 부모님은 날이 밝자마자 대학병원으로 달려가 응급실에서 정밀검사를 했다. 병명은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 꽤나 진행이 많이 되어 위험한 상황이었다. 혹시나 오진이 아닐까 했던 실낱같은 희망조차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1년간의 집중치료, 2년 반 동안의 통원치료가 시작되었다.
악재는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치료 도중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손과 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한 채 침대 신세를 져야만 했다. 평소 손재주 좋고 운동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아왔던 나에게 백혈병 진단 확정만큼 큰 충격이었다. 항암치료에 재활치료까지 겸해야 했던 나는 거의 매일을 울었다. 3년 동안의 치료 중 1년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프기도 했었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 빚을 내 사업을 하셨지만 불행히도 실패하셨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2살 어린 동생은 돌봐줄 사람이 없어 이모네 집에서 생활했다. 3년간의 힘든 투병 끝에 괴로웠던 항암치료는 끝났지만 나에게는 손과 발의 장애가, 가족들의 마음에는 상처가 남았다. 하지만 가족 모두가 이제는 더 이상 흩어져있지 않고 한 집에 살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공부 욕심, 그러나 부모님의 반대
통원치료를 1년 남기고, 나의 학교 문제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면역력이 약해서 상처가 나는 것이나 심지어 감기조차 조심해야 한 상태였다. 하지만 더 이상 학교 가는 것을 늦추기 싫었고, 오랜 기간 병원에 무료하게 있으면서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이 생겼던 나는 부모님에게 학교를 가겠다며 졸라댔다. 부모님은 집에서 조금씩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치는 것이 어떻겠냐며 건강상 아직 학교를 가기엔 무리라고 반대하셨다. 끝내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부모님은 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하셨고 다른 친구들보다 1년 늦게 중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교실풍경, 친구들의 웃음소리, 전에는 그다지 흥미롭지도 않았던 수업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가끔 신종 플루, 독감 등 전염병이 돌 때 마다 학교를 빠질 수밖에 없었고, 어쩌다 열이 나면 1주일씩 입원하는 바람에 학교를 빠지기 일쑤였지만,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전교 10등 가까이 되는 성적을 유지했다. 학원도 다니지 못한 내가 다른 친구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을 부모님도 기특하게 여기시고 뿌듯해하셨다. 좋은 내신 덕에 공립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나는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와 별 차이 없는 학비를 내며 양질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거의 매 수업 시간마다 이루어지는 토론·토의 수업, 비교적 활성화 된 동아리 활동, 새로운 친구들과 다양한 경험이 있는 친구들을 만나 더없이 행복하고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냈다.

 
 

조금씩 다가오는 대입, 기울어져만 가는 가세
나의 항암치료가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우리 가족은 차상위 계층이 되고 말았다. 항암치료에 들어가는 비용이 어마어마했음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부모님에게 정말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어느 정도 복지혜택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4인 가족이 생활하기에는 너무나도 빠듯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항상 공장에서 밤낮 없이, 주말 없이 일하시곤 했다. 같은 집에 살지만 늦은 밤에나 잠깐 볼 수 있었던 아버지였다. 어머니는 아직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의 나를 돌보기 위해 부업을 시작하셨다. 나는 조금은 빠듯한 가정 경제 속에 고등학교로 진학했지만, 나중에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거나 국립대학에 들어가리라 다짐하며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한테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께서 공장에서 일하시다가 오른쪽 팔에 화상을 입으셨다고 했다. 순간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이렇게 갑자기 전화가 올 정도라면 작은 상처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그 말을 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 바로 병원으로 간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애써 웃음 지으시며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하셨지만 이제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모든 걸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왼손만으로는 일을 하실 수 없으니 아버지는 회사를 1년 반 정도 쉬셔야 했고, 우리 가족은 졸라맸던 허리띠를 더욱 더 졸라매야만 했다. 가정 상황이 이렇다보니 나는 과자 하나 사먹을 돈, 책 한 권 살 돈도 아껴가며 학교생활을 했고 한번 산 문제집도 책 표지가 떨어질 때까지 다시 공부하곤 했다. 친구들이 사놓고 안 쓰는 문제집을 얻어가며 공부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도 대학등록금 마련, 생활비, 자격증 준비까지 앞으로 들어가야 할 돈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며 목에 걸린 가시마냥 나를 괴롭게 했다.

▲ 글쓴이가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그린 작품.
▲ 글쓴이가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어릴 적 꿈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 그린 작품.

그렇게 불안한 상태 속에서도 나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수능시험을 쳤고 불행 중 다행으로 교육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국립대학이지만 학비가 우리 가족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었고 타지에 있는 대학이므로 기숙사 비용과 생활비 또한 만만치 않으리라는 걱정이 앞섰다. 손과 발에 장애가 있는 나로서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도 없었던 터라 더욱 막막했다. 비록 약간의 장애를 가지고는 있지만 지금껏 학생 생활을 하는 데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몸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별똥별처럼 날아든 희망, 한국장학재단
힘겨웠던 수험생활, 그리고 대수능이 끝나고 간신히 대학교에 합격한 후에도 가난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현실에 화가 났고 또 좌절했다. 그렇게 열심히 병마와 싸워 이겨내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공립외국어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또한 간절히 바랐던 대학에 무사히 합격했는데도 아직 시련이 남아있다는 것에 일종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수능 후에 작은 책자를 주셨다. 대학 신입생들을 위한 장학금 가이드 같은 책이었다. 다양한 장학재단이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었는데 담임선생님께서는 그 중에도 한국장학재단을 강력히 추천해주셨다. 집으로 돌아가서 바로 부모님에게 그 사실을 알려드리자 정말로 기뻐하셨다. 나와 부모님 모두 내가 한국장학재단의 장학생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러한 재단이 존재하고, 또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에 감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장학금 신청을 하면서도 혹시나 장학생 선발이 되지 않으면 어떻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느라 며칠은 잠을 설치기도 했다. 국가장학금 선정 여부가 결정 되지 않은 채 점점 등록금 납부일이 다가왔고 그럴수록 더 초조해졌다. 긴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홈페이지에서 장학생으로 선발되었다는 문구를 보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져있던 무언가가 해소되는 듯했다. 아마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꿈을 이룰 수 있는 열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리라.

나 또한 누군가의 별똥별이 되리라
꿈으로 가는 결정적 관문에서 희망을 잃을 뻔 했던 나에게 한국장학재단에서의 도움은 나에게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었고 꿈을 향해 날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날개 덕에 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온 짧은 인생 중 가장 행복한 오늘을 살고 있다. 걱정 없이 학업에 매진하고, 미래의 내 모습을 매일 상상하며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부지런히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것보다 큰 행복을 나는 아직 겪어보지 않았다. 나의 꿈은 초등교사이다. 하루라도 더 빨리 교사가 되어 이 세상 모든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꿈을 찾고, 또한 그 꿈을 잃지 않도록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별똥별이 되고자 한다. 내가 날개를 얻어 꿈을 이루기 위해 도약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는 미래에 나의 학생이 될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이승주_밴드 동아리에서 기타 연주를 맡아 정기공연 준비에 최선을 다하고, 포토샵으로 그림그리기에도 능숙한 창창한 새내기.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는 그는 광주교육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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