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dia, 12억 인구 속에서 반짝였던 12달 (1)

도심과 마을, 산, 강, 들판 어딜 가도 사람이 없는 곳이 없으며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문화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는 인도. 1년 동안 다양하고 재미있는 갖가지 봉사활동을 하며 봉사단원들이 얻었던 수많은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오랜 가식을 벗었던 인도 시간
솔직하게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동경했지만 정작 자신은 가식뿐이라 괴로워했던 최수은 씨. 인도에서 봉사하면서 그의 오랜 고민은 한 줄기 눈물로 해결됐다.

일 년 동안 인도에서 내가 한 것을 얘기한다면 10분도 채 안 돼 이야기가 끝날지 모른다. 하지만 인도에서 내가 얻은 것을 얘기한다면 사흘밤낮도 모자라다. 나는 철저하게 거짓으로 나를 가리고 살았는데 인도의 가난하고 불편한 환경에서 솔직하고 아름답게 내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내 본래 성격은 다혈질이라 사람들과 부딪히고 상처도 잘 주기 때문에 털털하고 성격 좋은 모습으로 위장하고 살았다. 사람들은 처음 나를 만났을 때 내 위장한 모습에 쉽게 친구가 된다고 하지만 나를 알면 알수록 더 속을 모르겠다며 어느새 사이가 멀어져 버리곤 했다.

난 네가 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스물한 살이 되어 봉사하러 간 먼나 먼 나라 인도에서도 여전히 가식과 아부로 무장하고 사람들을 대하기 바빴다. 그런데 봉사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11월 즈음에 우리는 ‘무전여행’을 떠났다. 목적지 메라바니에 도착해서 해는 저물어가고 머물 곳은 없는데 수중에 남은 돈은 몇백 루피가 전부였다. 하룻밤 묵을 곳을 찾으며 이리저리 배회하다 잠자리를 얻었다.
그 때 한 여자가 불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디마푸르 시 행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언니였다. 처음 나를 볼 때부터 마음을 활짝 열어주었고 행사 마지막 날 나와 떨어지는 게 아쉬워 몰래 숨어 울던 은잔디 언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 꼭 한번 메라바니를 들르겠단 약속을 하고서야 언니의 웃음을 볼 수 있었는데 여태 기다렸던 것이다. 언니가 공연히 고집을 부려 나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낡고 초라한 대나무집에서 전기도 없이 하룻밤을 보낼 걸 생각하니 원망도 되고 불평만 나왔다. 게다가 두 청년이 와서 허락도 받지 않고 외국인이 이 동네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언쟁하는 것이 아니가. 그때 은잔디 언니가 내 손을 꽉 잡고 부엌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내 눈을 쳐다보고 말했다.
“초이Choi, 저들은 네가 우리 동네에 온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만 걱정 마. 난 네가 여기 와서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눈물이 났다. ‘나는 한국에서 봉사하러 와서 그렇게 큰 일을 한 것이 없는데 왜 언니는 나를 좋아하는 걸까?’ 그날 밤, 난 행복해서 한참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대나무 사이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너무 따뜻했던 밤으로 기억된다.
무전여행 마지막 날, 은잔디 언니는 근사한 저녁식사를 해주겠다며 달걀 6개를 외상으로 사와서 텃밭에서 뽑아온 채소와 함께 달걀요리를 해줬다. 전기가 나가 양초하나 피워 넣고 밥을 먹던 그날 저녁은 내게 더할 나위 없는 만찬이었다.
다음날 아침. 우린 버스터미널로 가야했다. 그날따라 햇볕이 너무 뜨겁고 가야할 길이 멀어나도 모르게 예민해져서 짜증을 냈다. 근데 은잔디 언니가 조용히 다가와 하는 말이,
“Shall I carry your bag?”
작은 키에 40kg도 안 나가는 비쩍 마른 몸으로 내 배낭을 들어주겠단다. 그 순간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그리고 나를 향한 언니의 진심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는지 모른다. 우린 곧 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 갔지만 그 먼 길을 언니 혼자 걸어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사람의 맛을 알다

무전여행을 다녀온 이후 나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전에는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꼬투리를 잡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무전여행에서 만난 은잔디 언니를 위해서 내가 해준 일은 별로 없지만, 언니는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는 나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내 배낭도 대신 들어주었다. 그때 내가 한 가지 느낀 것은, 내가 아무리 성격이 좋지 않고 화를 잘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이다. 또 그 마음이 나에게 전해졌을 때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것도!
돌아보니 그동안 내가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함께 지내며 봉사했던 동기 단원들이 겉으로만 친한 척한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나에게 많은 부분을 배려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를 위해 쓴말도 마다하지 않고 힘들 때는 서로의 등을 버팀목 삼아 기대는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리고 담임선생님 성함도 모를 정도로 주위 사람에게 무심하고 내 말만 하기 좋아했던 내가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의 이야기 듣는 것에 집중하고 그 사람만의 진심을 알고 가까워지는 과정이 재미가 있었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대하니 그 사람만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충격적이지만 기분 좋은 말
한국에 돌아온 후, 요즘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솔직하다’는 말이다. 거짓과 위선으로 꽁꽁 싸매어 있었던 나에겐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이다. 그리고 한 달 전 이런 말을 들었다.
 “네가 진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걸 보면 많이 부럽고, 나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어. 나도 너처럼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귀고 싶어.”
21년을 가식으로 살아왔던 내가 이 소리를 들을 때 받았을 충격을 예상할 수 있겠는가!
아직도 인도에서 쓰던 내 휴대폰  속 시계는 인도시간으로 맞춰져 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그들과 보이지 않은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글 | 최수은(경남과학기술대 식품생명공학 2, 굿뉴스코 인도 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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