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정부지원학자금 최우수상 수상

내 학창시절의 새 학기는 언제나 악몽이었다. 새 선생님, 새 학급, 그리고 새로 내야만 하는 가정환경조사서. ‘부모님 이혼. 생활보호대상자. 경제적 형편 어려움’이라고 적어내야만 하는 그 조사서가 나는 끔찍이도 싫었다. 그 조사서를 내고나면 항상 교무실로 따로 불려가거나, 방과 후에 따로 남아야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언제나처럼 가난을 확인받고 동정을 웃어넘겨야 했다.
 

▲ 김연주_좋아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글, 그림, 디자인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병아리 디자이너. 언젠가 세계에 이름을 알릴 디자이너가 되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전공 3학년에 재학 중이다.
▲ 김연주_좋아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글, 그림, 디자인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병아리 디자이너. 언젠가 세계에 이름을 알릴 디자이너가 되는 날을 꿈꾸며 오늘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시각디자인전공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여덟 살
내가 가난을 알게 된 나이는 여덟 살이다. 겨우 엄마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해 첫걸음을 내딛는 나이였다. 여덟 살 이전의 내 유년은 넉넉하진 않았지만 부족하지도 않았다. 아빠는 어린 딸을 위해 퇴근할 때마다 장난감을 사오곤 했었다. 그러나 흔해 빠진 신파극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아빠는 사기를 당했고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붉은 딱지로 끝나고 말았다. 부모님의 싸움이 잦아지던 그 무렵, 부모님은 일단 이혼을 하기로 했다. 엄마는 ‘잠깐만 따로 사는 거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유난히 영특했다며 아직도 아빠가 자랑하는 어린 시절의 나는 이미 이혼이라는 말의 의미와 그 무거움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엄마는 큰아버지 댁에 여덟 살이던 나와 여섯 살이던 동생을 맡기고 떠났다. 이미 다 큰 아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어린 오누이를 반기지 않았다. 영문도 모르고 낯선 집에 맡겨진 우리가 하루하루를 눈치 보며 보내고 있을 때, 아빠는 우리를 고아원에 보낼까 생각하셨다. 위장이혼이라던 엄마는 빚을 남기고 잠적했고, 아빠에게 남은 건 빚과 연로한 할머니와 철모르는 우리뿐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너무나도 어린 우리를 차마 남의 손에 맡길 수 없었다. 거기에 아빠는 5남매 중 늦둥이 막내였지만, 아무도 모시려하지 않았던 할머니 또한 모실 수밖에 없었다. 결국 빌린 트럭에 우리 오누이와 할머니를 태워 부산으로 왔다. 이사를 간다는 기대에, 불편했던 큰아버지 집을 벗어난다는 생각에 마냥 들뜬 우리를 싣고 트럭이 도착한 곳은 화장실이 밖에 있는 단칸방이었다.
이미 여든이 넘은 할머니, 어린 우리, 그리고 젊은 아빠는 작은 방에 복작복작 모여 함께 잠들었고 함께 끼니를 걸렀다. 말 그대로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어쩌다 얻어온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하루하루를 넘겼던 그 시절, 아빠는 몇 번이나 세상을 버릴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빠는 가장이었다. 아빠의 목숨에는 아빠 혼자만이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빠의 등에는 할머니가, 내가, 동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만큼 아빠의 책임은 너무나도 무거웠다. 이 모든 짐을 내던지고 낙동강에 몸도 던져버리지 못했던 것은 눈에 밟히는 우리 때문이었다. 결국 아빠는 살아내기로 했고, 어찌 됐든 우리 가족 입에 밥이나마 매일 먹이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빠는 대리운전 일을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친구도, 놀 거리도 없었다. 대신,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책을 읽었다. 책 속 세계에서 나는 엄마 없는 가난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느 이국의 부잣집 소녀도 되고, 왕자님을 기다리는 공주님이 되기도 했다. 책을 읽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들인 습관은 중학교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아빠의 대리운전과 생활보호대상자 혜택으로 형편은 차츰 좋아졌다. 단칸방에서 8평 두 칸짜리 집으로, 그리고 12평 영구임대아파트로 우리는 계속 이사를 다녔다.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임대아파트로 이사 후 처음으로 현관을 열었을 때의 광경은 아직도 가슴이 벅차게 한다. 집이 조금씩 커지는 것과 함께 나도 조금씩 자라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며 무난하게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한 나는 대학과 진로에 대해 생각하며 디자인과에 진학하겠다는 꿈이 생겼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자연스럽게 미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림 그리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반대는 만만치 않았다. 학창시절 공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의 가난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아빠는 공부 잘하는 딸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소망했다. 또한 생활보호대상자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우리 가족에게 학원비는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돈에 내 꿈을 양보하고 싶지는 않았고, 기나긴 설득과 싸움 끝에 아빠는 미술학원에 다니는 것을 허락하셨다. 지금도 아빠에게 죄송하고 감사하다.
미술학원을 다니면서 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공부에 탄력이 붙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열망 또한 강하게 나를 흔들었다. 여전히 생활은 힘들었지만 이 가난을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처절하게 공부했다. 실기 또한 열심히 준비했고 몇 번 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갑작스레 불행이 닥쳐왔다. 계속 함께 살아온 할머니가 위암, 치매 초기 판정을 받았고 거동이 불편해지셨다. 이미 아흔을 넘긴 할머니는 나에게 늘 엄마 같은 존재였다. 따뜻하고 정이 많아 늘 막내아들인 우리 아빠를 걱정하고 막내 손주인 나와 동생을 아껴주셨다. 하지만 언제나 건강해 보였던 할머니에게도 나이는 속절없이 덮쳐와 병이 하나 둘 커가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걷는 것조차 힘겨워져 기저귀를 차셔야 했다.
집안에 할머니와 같은 여자로는 유일했던 내가 할머니의 수발을 도맡게 되었다. 고3이었고 공부에 실기에 힘든 일이 많았지만 할머니가 편하시다면 얼마든지 기저귀도 갈아드렸고 몸도 씻겨드렸다. 나는 할머니가 단 1년이라도 더 우리 곁에 남아 계셔서 내가 대학가는 모습을 보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뜨거웠던 7월의 어느 날, 나는 실기 준비를 위해 학원에 있었다. 평소처럼 붓에 물감을 묻히고 그림 하나를 완성해 나가고 있던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연주야, 돌아가셨다…. 빨리 온나.”
그렇게 나는 여덟 살에 엄마를 잃었고, 열아홉 살에 또 다시 엄마를 잃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림도,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방황하고 싶었고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맏딸이었다. 아빠의 자랑이었고 할머니의 대견한 손주였다. 수능을 100일 조금 넘게 남겨두고 있던 그 때, 내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다시 연필과 붓을 손에 쥐었다.
시간은 쉬이 흘러 수능 날이 되었고, 나는 만족할 만한 성적을 받았다. 하지만 미대 입시는 수능이 끝이 아니다. 1월에 실기고사가 있었고, 이를 위한 학원 특강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학원 특강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300만 원이었다.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손에 쥐어보지 못한, 큰돈이었다. 나는 특강을 듣지 않기로 결정했지만 학원 원장선생님은 끊임없이 나를 설득했다. 처음에는 학원비를 감면해주기로 하셨고, 나중에는 후불로 해줄 테니 일단 다니라고 하셨다. 내가 학원생들 중에서 제일 성적이 높아 학원의 ‘기대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큰 금액에 나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특강을 제대로 듣지 않고 평소 학교 다닐 때처럼 다니기로 하고, 학원비 또한 평소대로 받기로 했다. 원장선생님께 감사했다. 그리고 입시 원서를 넣을 시기가 되었다.
“디자인 명문대인 국민대, 건국대로 지원하는 게 어떻겠니?”
내 성적이 흡족했던 원장 선생님의 말에 활짝 웃으며 대답해야만 했다.
“국립대 아니면 못 가요.”
몇 번이고 디자인 명문인 사립대를 추천받았지만, 내 결심은 확고했다. 나는 등록금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국립대와 사립대의 등록금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내 선택의 범위를 좁게 만들었다.

▲ 김연주 씨가 캐릭터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제작하게 된 작품들. 왼쪽부터 향수 ‘마크제이콥스 데이지’,게임 캐릭터, 화장품 브랜드 ‘어퓨’를 캐릭터화했다. 모두 상업적 프로젝트에 이용되지 않은 습작이다.
▲ 김연주 씨가 캐릭터 디자인에 관심이 많아 제작하게 된 작품들. 왼쪽부터 향수 ‘마크제이콥스 데이지’,게임 캐릭터, 화장품 브랜드 ‘어퓨’를 캐릭터화했다. 모두 상업적 프로젝트에 이용되지 않은 습작이다.

다시 시작
힘든 입시 기간이 지나고 나는 서울까지 올라가 실기고사를 치렀다. 결과는, 지원했던 대학 모두 합격이었다. 할머니가 이 소식을 들었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합격한 세 대학 중 나는 처음부터 맘에 두고 있었던 서울시립대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할 날만을 기다리는 새내기로서 행복에만 젖어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역시 등록금이 문제였다.
아무리 공립대학이라고 해도, 미대의 등록금은 300만 원에 가까운 액수였다. 학원 특강비를 들었을 때처럼 절망스러운 심정이었다. 말로는 숱하게 들어 왔고 어느 정도 각오하고는 있었지만, 등록금 문제가 직접 내 눈앞에 닥쳐오니 진학을 포기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학원 특강 때처럼 쉽게 포기해 버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껏 아빠를 설득한 것도, 정부의 생활 보조금을 오롯이 학원비로 투자한 것도 이 꿈을 위해서였다.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단계인 대학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더니 등록금이라는 거대한 벽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놈의 돈이 또 문제였다. 이 돈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삶을 힘들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언제나 내 발목을 잡았다.
막막함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던 내게 귀가 뜨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지급하는 제도가 있다는 것이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미래드림 장학금의 지원 대상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길로 당장 절차를 확인하여 신청했고, 다행히도 미래드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첫 등록금을 내는 날, 고지서에 찍힌 ‘0원’을 보자 그제야 마음껏 행복할 수 있었다. 은행에 ‘0원’으로 당당히 등록하던 그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당당한 새내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대학교 생활은 생각처럼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지만, 한국장학재단의 장학금 제도는 언제나 내 마음을 가볍게 했다. 막상 서울에 맨몸으로 올라오니 생활비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1학년 때는 내내 아르바이트를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2학년 때부터 ‘국가근로장학금’을 알게 되어 내 전공 학과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급히 생활비가 필요할 때도 역시 한국장학재단의 ‘생활비대출’을 이용하여 해결했다. 2학년 때부터 ‘국가장학금’으로 개편된 장학금 제도의 혜택을 받아 등록금 걱정 또한 덜었다. 언제나 내게 가장 큰 문제였던 돈 문제가 해결되니 자연스럽게 학교생활도 즐거워졌다. 꿈꿔왔던 캠퍼스 라이프를 드디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학업에도 충실히 노력하게 됐음은 물론이다.
국가장학금을 계속 지원받아 3년째 ‘0원’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나는 한국장학재단에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비록 힘겨운 시절이 있었지만, 나에겐 꿈이 있고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한국장학재단의 국가장학금은 내게 디딤돌과 등불이 되어 주었다. 주저앉고 싶었던 때가 수없이 많았지만, 그런 나를 위해 항상 손 내미는 이가 있어 왔다. 생활보조금을 지원해준 국가, 내 꿈을 믿어준 아빠, 편의를 봐준 학원, 마지막으로 나의 손을 잡아준 한국장학재단이 있었다.

국가장학금을 받아 돈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에게는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옛날의 나처럼 힘든 현실에 놓여있는 이들을 위한 삶을 살자는 새로운 꿈이다. 돈에 아파봤던 나이기에 누구보다 아프고 힘든 이들의 심정을 잘 알고 있다. 이를 위해 최근에는 소액이나마 후원을 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내 전공을 살려 벽화 봉사 등을 꾸준히 알아보고 있다. 또한 계속해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보려고 한다. 힘겨운 아이들에게 ‘나도 그런 때가 있었어’라고 말해주며 힘이 되어 주고, ‘지금 절망하기에는 앞으로 희망이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해주며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나도 그렇게 등불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 디자인은 나를 위한 꿈이지만 이 꿈은 다른 사람을 위한 꿈이다. 사실, 없는 이들에게 ‘나눔’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아파 본 사람은 아픈 사람을 위해 손 내미는 것이 어렵지 않다. 나부터 힘든 이들을 위해 등불이 되어 준다면, 그들 또한 나처럼 언젠가 다른 이들의 등불이 될 것이다. 내 과거는 어두웠지만, 이렇게 내 미래는 내 꿈과 함께 힘껏 꽃을 피워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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