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아이티에서 대지진으로 거의 30만 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아이티에 해외 봉사를 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학에 다니고 취업 준비를 하느라 잊고 지내다가, 부모님의 사업이 기울면서 제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필요해 해외 봉사를 결심했습니다.처음에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어요. 미국을 경유해 아이티로 갔는데, 경유 과정에서 가방이 어느 미국 분과 바뀌었습니다. 아이티에 도착해 그 사실을 알고 바로 주인에게 가방을 보냈는데,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모든 비행기가 취소돼 제 가방은 결국 받질 못했어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다저는 어려서부터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어요. 놀기 좋아하고, 학교도 잘 안 가서 부모님이 많이 속상해하셨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삶을 대충 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가 제게 넌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I have a lot of shortcomings, but I’m a new person.” 아직 부족함이 많지만, 저는 지금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라고요.1년 전 하루하루를 의미 없게 보내던 어느 날, 스리랑카로 해외 봉사를 떠났던 누나가 돌아왔어요. 제게 스리랑
1인의, 1인에 의한, 1인을 위한 방송이 익숙한 지금은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전성시대이다. 이젠 누구나 혼자서도 콘텐츠를 제작하고 방송할 수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어딘가에선 수백 명이 수개월간 동고동락하며 최고의 영화,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어 내고, 그걸 보기 위해 시사회 앞자리와 본방 사수의 열정 또한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어느 때보다 ‘영상 콘텐츠’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요즘, 엣지 있는 영상으로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촬영감독 박기현을 만나 본다.김포에 위치한 박기현 감독의 사무실로 향하는 길에, 기자는
나의 첫 대학 생활은 정신없이 바빴다. ‘예쁘고 밝은 친구’로서의 모습을 지키며 친구들과 잘 지내야 했고, 학과 공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간호사가 되고 싶었던 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에 시달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여겼다. 누군가 내게 점수를 매긴다면 평균점은 나온다고 생각했다.나는 성격이 쾌활해 늘 친구들과 잘 지내왔고, 어릴 적부터 ‘예쁘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으며, 공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근 코로나19가 몰고 온 경제 위기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희망도 잃고 있다. 이런 가슴 아픈 뉴스를 접할 때면 그 슬픔에 공감하면서도 ‘절망, 여기가 마지막일까?’라는 생각이 든다.‘종이 잡지’ 또한 타격을 크게 입은 분야 중 하나이다. 1997년 IMF 사태 때 해외에 잡지 수출을 시작해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는 (사)한국잡지협회 정광영 회장은 지금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눈이 펄펄 내리던 1월의 어느 날, 여의도에 위치한 잡지협회 건물에서 그분을 만났다. 출판사 건축세계(주)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사진에서 보았을 땐 근
전신을 감싸는 레벨D 방호복을 입고 고글을 쓰고, 숨이 턱 막히는 N95마스크를 끼고, 라텍스 장갑 두 겹을 착용하고 이중 덧신으로 신발을 감싼다. 이 모든 장비를 착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5분. 고글에 눌린 머리가 지끈거린다. 찜질방에 온 듯 온몸이 습하고 숨이 막힌다. 그 상태로 환자들을 확인하다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달려가 처치를 하고, 한숨 돌리자마자 정신을 집중해 다른 환자의 혈관을 찾는다. 숨가쁜 이 현장은 코로나19와 싸우는 의료진들의 일상이다. 지난해 봄, 의료진이 부족하다는 뉴스를 보고 대구 의료현장에 파견을 다녀
찬바람이 몸을 절로 움츠러들게 만드는 겨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고, 이젠 정말 집밖으로 쉬이 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차, 회사, 집… 세 곳만을 오가는 가운데 허리 통증, 등 결림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이는 단순히 운동 부족 때문일까? 먼저 우리 일상을 떠올려보자. 출퇴근길에 운전할 때, 회사에서 컴퓨터로 일할 때, 집에서 스마트폰을 하며 휴식을 취할 때에도 우리는 몸 앞쪽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몸의 뒷근육보다 앞근육의 활동량이
‘13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크리에이터’, ‘AP통신, BBC방송국이 주목한 인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 수상’, ‘유튜브 CEO가 직접 한국까지 와서 만난 인물’, ‘자서전과 요리책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저자’, 이 모든 타이틀의 주인공은 73세 박막례 할머니이다. 늘 새로운 것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도전하는 삶’의 아이콘이 된 할머니. 73세에 세계 여행이라는 색다른 꿈을 꾸며 손녀와 열심히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고단한 세월을 걸어오다 어느새 70대가 된 박막례 할머니, 삶의 변화의 시작은 병원에서 받은 치매 위험
2020년 한 해, 온라인으로 해외 봉사활동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름하여 ‘제1기 온라인 해외봉사단원’. 2020년 3월만 해도 이들은 여느 봉사단원들처럼 1년간 해외에서 지낼 채비를 차곡차곡 마치고 비행기 뜰 날만 기다리던 대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출국 하루 전날 하늘길이 막혔고, ‘왜 우린 못 가는 거야?’라는 실망감과 억울함에 힘이 쭉 빠졌다.그때 이들은 선택해야 했다. ‘이대로 포기할 것이냐, 맞서 싸울 것이냐’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남들이 미련하다고 하든지 말든지 하늘길이 열릴 때까지, 아니, 열리든 말든 한국에서 어떻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나의 지난 시간은 기나긴 밤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심하고 행동이 느렸던 나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느린 내가 싫었다. 그럴 때마다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분은 부모님이었다. 엄마는 몸이 불편했지만 막내딸인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엄마와 나란히 걸어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잠시 엄마와 떨어져 걸었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부모님에게 내가 상처를 주다니….’ 스스로를 자책했고, 미워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
나는 학창시절부터 성격이 무척 소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 선생님, 반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며 이야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잘 표현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특히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국제적인 무대에서 영어로 연설하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였다. 나는 달라지고 싶었다. 그래서 대학입학 후 다양한 대외활동에 참여했다.1학년을 마친 후, 아프리카 가나로 해외봉사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워크숍에 참석하며 바쁘게 지냈다. 내틀에서 벗어나 나는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2020년은 코로나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한 해다. 나는 대구에서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다. 평소 여느 사람들보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라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재빨리 마스크를 썼고, 손이 건조해질 정도로 부지런히 씻었다. 주변에서 “너는 절대 안 걸리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3월 나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 감염 위험을 피해 카페 대신 갔던 친구의 집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나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정
이지은 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대안학교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학교 정문을 지나 교무실로 가는 길에 만난 학생들은 처음 보는 기자에게 하나같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호기심 가득한 학생들이 교무실 창문으로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선생님 이뻐요!” 하는 응원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예쁘네요.”라고 하자 이지은 씨는 웃으며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답했다. 대안학교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 없다는 26살의 초보 교사, 어릴 적에 별다른 꿈이 없었던
1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다. 나는 한 중소 광고회사에서 2년차 사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공했던 분야는 미디어 아트였지만, 이 회사에서 우리 팀이 주로 하는 업무는 시나리오, 제안서 작성 등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우리 회사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1차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곧바로 2차 구조조정이 있을 거라고 했다. ‘설마 나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3월 어느 평일 오후, 부사장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셨고 권고사직을 언급하셨다.그 당시에는 담담한 것 같았지만, 이후 일주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사실이 있다. 홀로 아픔을 겪을 때 괴롭다는 것, 배고플 때 한 끼 밥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 마음이 맞는 사람과 대화할 때 즐겁다는 것 등등. 최근 안동 깊은 산골 과수원에서 휠체어를 탄 남편과 아내가 잘 익은 사과 향기보다 더 진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가 사이 좋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산이 좋았던 우리가을 냄새가 짙게 풍기는 11월 초, 반정현 안순영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빨강, 노랑 등 가을 색이
대학생이 된 후 나는 우크라이나로 해외봉사활동을 왔다. 이 나라에 처음 도착했을 때 너무 멋있는 건물들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수도 키예프에 있는 ‘졸로티보로타’ 지하철역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곳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황홀했다.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좋은 것을 꼽으라면 ‘산책하는 문화’다. 이곳 사람들은 하루에 최소 1시간에서 최대 4시간까지 걸으며 산책한다. 그래서 곳곳에 산책하기에 좋은 다양한 공원이 많고, 산책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를 구석구석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내가 산책 시간을 기다리는 이유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우정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번째는 ‘자기 이익을 위한 우정’, 두 번째는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우정’ 세 번째는 ‘완벽한 우정’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완벽한 우정이란 즐거울 때든 슬플 때든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며,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근거한 ‘완벽한 우정’을 가진 두 사람, 세븐디그리 건축사무소 권혁천 대표와 오충환 과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지아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안나라는 학생입니다. 지금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어교육학과에 재학 중입니다.제가 중학생 때부터 한국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언니가 동생인 제게 한국의 여러 영화나 드라마들을 소개해주었는데 그때부터 한국의 아름다운 영상 예술에 빠졌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감을 가졌습니다. 특히 한국 역사 드라마에 나오는 여러 고어古語들에 관심이 갔고, 이것이 제가 한국어를 공부하고 싶은 열정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생 때부터 한국에서 공부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부모님께 제 꿈을 말씀드
전 세계에 코로나19의 여파는 멈출 줄 모르고 있다. 그 폐해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에 더 매섭게 몰아친다. 일해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자리까지 잃는 이때에, 미얀마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다는 한국인 강사가 등장했다. 현지인 수준으로 미얀마어를 구사하는 이은정 씨는 지난 5월부터 페이스북에 마인드강연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회 수가 1, 2만을 오락가락하더니 얼마 전에 올린 영상은 조회 수가 순식간에 70만을 넘겼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미얀마에 거주하는 그와 영상채팅으로 인터뷰를 진
이름마저 비슷했던 모네와 마네는, 비슷한 이름 때문에 서로를 오해하며 서먹한 관계로 시작했지만 진솔한 대화 끝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40살이 되기까지 무명화가로 살았던 모네, 그보다 8살이 많았던 선배 화가 마네는 세상이 모네를 알아줄 때까지 묵묵히 그를 지지해 주었다. 1883년 마네가 세상을 떠났고, 마네의 그림이 혹평을 받으며 미국으로 팔려갈 위기가 오자 모네는 마네의 그림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도록 일일이 편지를 써 그의 그림의 가치를 알렸고, 현재 마네의 그림은 그의 바람대로 루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