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침체된 사회적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투머로우 말하기대회가 전국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울산에서 온라인으로 열린 이번 투머로우 말하기 대회는 투머로우 교양지 9,10월 호를 읽고 ‘나의 꿈’, ‘내가 존경하는 인물’, ‘잡지 내용 중 인상 깊은 부분’을 비롯해 ‘어려웠던 때를 극복한 경험’ 등의 주제로 발표가 진행됐다. 중·고등부에서는 김미현(울산생활고 2) 학생이 ‘좌절하지 않으려면 마음을 일으켜 세우라’라는 제목으로 대상인 울산시 교육감상을 받았으며, 대학부에서는 장은철(울산과학대 1) 학생이 ‘작은 빛’이라는 발표
10초만 참으셔글 이지민레소토는 사계절이 있는 나라다. 레소토의 겨울은 한국과는 반대로 6월부터 8월까지인데, 평균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꽤나 춥다. 올해 7월에는 레소토에 5년 만에 눈이 내렸다. 아프리카에서 눈을 보는 아주 진귀한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롱패딩을 입고 눈을 맞았는데, 내가 있는 곳이 아프리카인지 남극인지 헷갈릴 정도로 눈이 펑펑 쏟아졌다.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만큼은 그랬다. 난방이 잘된 따뜻한 집에 누워서 귤을 까먹고 있노라면,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겨울은, 우선 난방시설이 없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아빠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놀러갔다가 아빠 손을 놓치는 바람에 한참을 혼자 울고 있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빠는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주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홀랑 다 먹고 배탈이 났고,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이게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국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6살 때, 어머니의 나라 몽골에 왔다. 다만
해외봉사를 떠나올 때 나는 ‘최대한 많은 걸 경험해야지!’ ‘행복하게 즐겁게 지내야지’라는 생각으로 가슴이 벅차 있었다. 하지만 막상 짐바브웨에서 생활을 시작하자 예상치 못한 어려움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간관계였다. 한국에서 가장 골치 아파했던 문제가 짐바브웨에서도 여전히 날 괴롭혔다. 짐바브웨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해외봉사자도 와서 같이 지냈는데, 처음에는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체리’라는 중국인 언니와 계속 부딪혔다.언니는 나와 성격이 전혀 달랐다. 언니는 자신이 하고 싶
‘친구란 무엇일까? 인생에 친구는 꼭 필요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며 답을 찾았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힘은 강력하다. 때론 이끌어주고, 변화를 만들고, 각자의 삶을 탐험하며, 따뜻한 요람도 된다. ‘친구’라는 단어가 살아 있다면, 이 둘이 아닐까? 같은 사고를 당하며 ‘소울메이트’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문혜진 씨와 이선미 씨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의 첫인상이 기억나시나요?혜진: 가나로 해외봉사를 간 50명의 단원 중 저와 동갑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에티오피아 카페 안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국 돈으로 500원을 카페에 내고 카페 안 작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자기 팀을 열렬히 응원한다. 거리에 빈 깡통만 있어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시작한다는 에티오피아. 그곳에서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1년 간 교육봉사를 다녀온 박성민 씨를 만났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와 보안 전문 회사에 다니며 대기업 임직원들의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는 박성민 씨. 축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를 만나본다. Q. YTN 뉴스에 에티오피아
이번 리더스 컨퍼런스에서는 여섯 나라의 청소년 문제를 의제로 다루었다. 에티오피아의 청소년 폭동, 태국 청소년들의 우울증과 자살, 남아프리카의 높은 청년 실업률, 필리핀 청소년들의 성性의식과 10대 임신, 키리바시 학생들의 학교 중퇴와 자살, 피지의 10대 미혼모 문제가 그것으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생들은 의제 별로 팀을 나눈 뒤 토의했다. 그 가운데 필리핀의 청소년 문제를 발표한 두 팀의 프로젝트를 소개한다. 필리핀의 10대 임신 현황 및 그 이유필리핀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국가들 가운데 지난 20년 동안 10
한글이 반포된 지 574년이 흐른 지금, 한글은 대한민국과 세계를 잇는 연결고리다. 우리 문화가 ‘한류’를 타고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고 있으며, 그 중심에 한글이 있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거나 우리말 노래를 따라 부르는 외국인을 만날 때면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19로 꽁꽁 얼어붙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한글 캠프가 녹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글을 매개체로 삶에 활기를 되찾고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한다.방역 모범국으로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한국도 코로나19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말과 글에는 한 민족이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형성한 정서와 문화,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말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 속에는 백성을 사랑한 따뜻한 마음과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습니다.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받지만, 나라의 글로 정착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한자 문화를 강조했던 사대부들은 한글을 무시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문화말살정책으로 한글 사용이 금지되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한글은 우리글로 자리 잡았고, 지난 해엔 37만 명의 외국인이 한국어능력시험에 응시할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없고,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고통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저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버려졌고, 생후 6주 만에 입양되었습니다.제가 4살 때 부모님은 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슈바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Shwachman.Diamond syndrome 골수 기능 이상에 따른 혈구 감소가 나타나는 매우 드문 유전질환) 제가 걸린 병명을 아는 데에만 4년 반이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병원 간이침대에서
코로나 시대에 대화를 이야기하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요즘은 사람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로움도 팬데믹 수준으로 높아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더더욱 연결되어야 합니다.어떻게 하면 잘 연결할 수 있을까요? 조금 어려운 질문인데, 저는 첫 번째로 잘 들을 수 있어야 하고, 10~15분 이상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직업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된 기술들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더 좋은 대화를 위한 방법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첫째, 한꺼번에
제 아버지는 25년 동안 약사였습니다. 정말 평범한 분이셨죠. 하나만 빼고요. 아버지는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갈게.” 하면 꼭 나타나는 사람.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도 약속 하나는 꼭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2011년에 의사였던 아버지 친구가 전화해서 아버지가 암 말기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호전되는 듯하다가 곳곳으로 전이돼 아버지는 201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때 제가 추도 연설을 했는데, 아버지를 계속 생각하면서 떠오른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추도 연설 제목도 “내가 하겠다고 했
작년에 가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여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많은 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 인어공주의 에리얼 역을 맡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사랑받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그 당시, 그러니까 34년 전이죠. 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습니다. 1년 3개월 동안 브로드웨이에 캐스팅이 되기까지 쉬지 않고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그때 본 오디션 중 하나가 인어공주였죠.요즘 학생들은 카세트테이프를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제 목소리를 녹음해서 프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의사가 초음파로 진단한 뒤 부모님께 이야기했습니다.“이 아이는 헨하트 증후군(Hanhart Syndrome 선천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사지나 장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적 장애)을 가지고 있어서 팔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병을 가진 아이들은 30%만 살고 나머지는 죽었습니다.”“부정적인 것에 착념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아요.”그때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셨고, 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전 어릴 때부터 혼자 옷을 입다가 넘어지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높은 의자에 혼자 앉혀 놓고 시리얼을 먹
코로나19로 대학생들의 온라인 활동이 활발해졌다. 다양한 꿈을 가진 대학생들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온라인에서 만나는 ‘멘토 Zoom IN’프로그램은, 미래를 고민하는 대학생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대학생들을 위해 준비한 것이다. 이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유니브리더스의 대학생 4명을 만나보았다. 코로나19로 학교는 문을 닫았고, 초중고를 비롯하여 대학교도 ‘온라인 개학’을 선택했다. 외부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개강과 함께 활발하게 이뤄졌던 대학생 대외활동 및 서포터즈 활동도 잠잠해졌다. 이 상황에서 할 수
굿뉴스코 미얀마 지부에서는 미얀마 학생들을 위해 2008년, 음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진달래 합창단”을 창단했다. 현재 진달래 합창단은 합창단원 40명, 오케스트라 3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얀마에서 가장 크고 실력있는 합창단으로 성장했다.“저희들 각자는 어두운 과거가 있습니다. 실패를 하고, 가출을 하고, 마약을 하며 꿈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황은 미얀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입니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하는 음악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 우리가 음악으로 행복을 맛보고
미얀마의 황금빛 탑을 볼 때면 황홀하기까지 하지만, 실제 미얀마는 빈부격차가 굉장히 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전기가 자주 끊겨서 어둠 속에서 지내기 일쑤고, 물 부족으로 다른 사람들이 쓸 물을 생각해 아껴 써야 한다. 한국에선 스위치만 누르면 불이 들어오고 수도꼭지만 열면 물을 사용할 수 있기에 처음엔 이런 환경에 적응이 안됐다. 기본적인 게 부족하다 보니, 내 것을 손해보고 싶지 않아 예민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더
#School저는 7살부터 미얀마에 살았어요. 우리나라 말도 서툴게 하던 때라, 미얀마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요. 이듬해에 현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미얀마어로 진행되는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미얀마 친구들이 제 가방에서 수업에 맞는 책을 꺼내주고, 어디를 공부하는지 책을 펴주었어요.수업 시간 내내 저를 살뜰히 살펴주고, 수업이 끝나면 숙제를 시켰지요. “이렇게 적어라.” “저렇게 말해라.” 등등 눈높이 수업을 해주었어요. 우리 부모님은 그 친구들이 고마워서 집에 자주 초대해 음식을 해주셨는데, 친구들이 올
대학 졸업을 앞두고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을 알게 됐고, 필리핀으로 봉사를 다녀왔다. 1년 동안 필리핀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처음 배운 ‘마음의 세계’는 신선했다. 지금은 내가 마음의 세계를 가르치는 굿뉴스코 미얀마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미얀마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오토바이를 타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토바이를 갓 배워 운전이 많이 서툴고 날까지 저물어가고 있어서 겁이 덜컥 났다.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에 속도를 내서 부지런히 가는데, 신호가 바뀐 것을 보지 못해 앞차와 부딪히고 말았다. 미얀마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