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포스터에 ‘감동 실화’라고 적힌 문구를 종종 본 적 있을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로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뺏는다. 2019년에 개봉된 ‘크게 될 놈’도 그렇다. 김해숙, 손호준 주연의 이 영화는 죄의 유혹에 점점 빠져들어가 큰 죄를 짓고 교도소에 수감된 아들과 그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애절한 사랑을 담아내, 관객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영화 내용을 더 깊이 있고 자세히 담은 책이 이번에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감동 실화의 주인공 김기성 씨를 만났다.
우간다 수도 캄팔라에 위치한 마케레레 대학Makerere University이 올해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동부 아프리카 최초의 종합대학교로 2016년 타임즈가 선정한 세계 대학 순위에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이름을 올렸고, 우간다 대통령을 포함해 탄자니아 전 대통령 벤자민 음카파, 콩고 전 대통령 조셉 카빌라, 케냐 전 대통령 음와이 키바키를 배출한 대학이기도 하다.100년의 대학 역사에는 40년을 함께한 바나바스 나왕웨 총장이 있다. 1987년 ‘지도 조교’로 마케레레 대학에 적을 둔 그는 2년 후 건축학과를 신설했고, 건
글로벌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영어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영어는 직장에서도 필요하지만, 외국인과 소통은 삶의 반경을 넓혀주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뜨겁다.기자는 10년 전에 미국으로 해외 봉사를 다녀왔다. 한 친구가 캐나다로 유학 가서 영어를 배우고 넓은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 부러워, 그와 비슷한 경험을 선택한 것이 해외 봉사였다. 미국에서 지내는 일 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별히 한국을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온 유학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선진 교육시스템을
영어, 나는 할 수 없어중학교 시절부터 영어는 나에게 ‘외계어’ 그 자체였다.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이해가 안 되었고, 쉬운 단어조차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공부해도 영어 점수는 항상 하위권을 맴돌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영어는 더더욱 어려워졌고, 나는 아예 ‘영포자’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공부해봤자 영어 과목은 점수가 안 나오니까 다른 과목에 집중해 공부했다.그리고 ‘나는 영어가 필요하지 않아. 못 해도 살아가는 데 지장 없어!’라며 나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영어를 못 해도 잘
작년 한 해 우리는 코로나19로 많은 변화를 직접 겪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아마 비대면, 언택트Untact일 것이다.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만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물리적 공간에 함께 있지는 않았지만, 디지털 공간 안에서 함께 있었다.이런 디지털 세계를 메타버스Metaverse라고 한다. 2020년 10월, 엔비디아NVIDIA의 창업자 겸 CEO 젠슨 황은 “메타버스가 오고 있다”라고 선언했으며, 수많은 업체들이 메타버스 시대를 대비해 온라인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떼려야 뗄 수 없
“봉사의 꽃은 현지 체험이야!”“아프리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워!”아프리카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아프리카에 매료되었고, 주저 없이 아프리카로 해외 봉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 ‘베냉’을 선택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처음 베냉에 도착해서 간 곳은 ‘코토누’라는 도시였다. 수도와 멀지 않아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코토누에는 한국인 지부장님이 있어서 아프리카임에
지난 4월 성남아트센터에서 ‘청각장애인 수술 기금 마련 음악회’가 열렸다. 그날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 씨가 협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성남아트센터를 찾았다. 한수진 씨도 태어날 때부터 왼쪽 귀가 안 들리기에, 그 음악회가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음악회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곡으로 꼽는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제1번 G단조’를 연주했다. 연주회 중간에, 자선 음악회 수익금으로 인공달팽이관 수술을 받은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청각만 회복된 것이 아니라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음악으로 마음까지 치유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연주회가 지닌 사회
내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아버지가 많이 아프셨다. 죽을 고비를 넘기실 때마다 나는 급히 휴가를 나왔고, 아버지는 세 번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오랫동안 해외에서 근무해 아버지 없이 사는 것이 익숙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빈자리가 유난히 컸다. 우리 가족은 가뭄에 쩍쩍 갈라지는 땅처럼 마음이 메말라 갔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각자 힘든 시간을 보내느라 서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나는 제대한 후 대학에 복학했다.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굽은 허리, 손마디가 다 튀어나온 손가락, 흙이 잔뜩 묻은 장갑과 팔 토시,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땀이 섞인 흙냄새. 나는 우리 친할머니를 시골 할머니라고 부른다. 내가 할머니를 이렇게 부르게 된 이유는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평생을 시골에서 사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우리 가족이 명절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갈 때면 항상 손수 농사를 지은 쌀, 고춧가루, 고구마, 마늘, 딸기잼, 김장 김치 등을 차 트렁크가 꽉 찰 때까지 아낌없이 주셨다.체감 온도가 40도에 다다르는 무더운 여름날에도 할머니는 농기구가 든 바구니를 한 손에
“엄마 재혼할 거야.”“그래, 엄마가 좋으면 해.”내가 중학교 2학년 때 엄마는 재혼할 거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와 언니, 그리고 여동생은 모두 엄마의 재혼을 찬성했지만, 오랫동안 여자끼리만 살아온 집에 들어오신 ‘아빠’는 편한 존재는 아니었다.아빠는 퇴근 후 우리에게 다가와 “이 영화 재밌다는데 같이 볼래?” 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길 원하셨다. “이 치킨 맛있다고 하길래 사 왔어. 같이 먹자”라며 맛있는 음식들을 잔뜩 사 오기도 하셨다. 그리고 필요한 것이 있는지 먼저 물어봐 주시고, 갖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모자람 없이 채워
내가 태어난 지 두 돌이 채 되기 전,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다리 한쪽을 잃으셨다. 갑작스러운 불행에 어머니는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동생을 키우기 위해 백방으로 일을 다니셨고, 2년 후 새어머니를 만나 재혼하셨다.새어머니는 우리를 친자식처럼 길러주셨다. 아버지가 일을 나가시면 어머니가 그 빈자리를 가득 채우셨다. 손이 많이 가는 우리 형제를 먹이고, 재우고, 학교를 보내시고, 부족한 것은 없는지 살피셨다. 덕분에 결핍을 경험하지 않고 자랄 수 있었다.고등학생 시절, 나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
오봉산 자락에 자리한 고봉중.고등학교를 찾아갔다. 넓은 운동장을 걸어 들어가면서 주변 풍광이 너무나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고 둘러보았다. 사람이 자유롭게 들어갈 수도 없고 나올 수도 없는 곳이지만, 햇볕과 바람은 마음껏 드나들며 꽃을 피우고 라일락 향기를 사방에 날려주고 있었다. 건물 2층 원장실로 올라가니 바깥 풍경처럼 밝은 얼굴로 성우제 원장이 일행을 맞아주었다. 인사가 오가고 명함을 건네고 자리에 앉자, 마치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낸 지인처럼 금방 이야기의 물꼬가 터졌다. Q. 입구에 고봉중고등학교라
통역 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이은성 씨는 취업 대신, 아프리카 케냐로 목적지를 정했다. 해외봉사를 했던 케냐로 다시 돌아가 당시 받았던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해외봉사 다녀온 지 8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은성 씨에게 그 빚의 기억은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다소 무모해 보이는 케냐로 가는 길,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그 빚을 다 갚았을까? Q. 서른 살에 제대하셨어요. 취업을 놓고 조급해진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 케냐 행을 선택하는 데에 고민은 없었나요?케냐로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나서 제 머
나는 작년에 첫 직장에 입사했다. 직장 근처에서 하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나 외에 4명의 대학생 동생들이 있었는데, 동생들은 이곳에서 함께 지낸 지 오래된 사이였다. 내가 재택을 시작할 무렵, 동생들도 코로나로 인해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나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동생들과 지내야 했다.그들과 함께 지내며 내가 느낀 걸 이야기하자면 첫째, 예의가 없다. 둘째, 배려심이 없다. 셋째, 나를 무시한다.나보다 세 살이 어린
청소년들이 바람직한 가치관을 확립하고 미래의 꿈을 키워가도록 진주뉴스(발행인 송창순)와 한마음마인드교육원(원장 전봉숙)은 ‘제1회 투머로우 독후감 공모전’을 공동 주최하였고, 지난해 12월에 시상식을 가졌다. 공모전에 총 121편의 원고가 접수되었고, 그중 최우수상 수상작을 여기에 소개한다.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을 지날 때 가끔 던지던 질문입니다. 행복은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전적 뜻으로는 제가 만족하는 이 질문의 답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은 바람은, 입시 공부를 하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주위에 좋은 대학 출신이 많다 보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 실력으로는 이루기 힘든 일이었다.나는 결국 사이버대학에 입학했다. 좋은 대학은 둘째 치고, 걸어 다닐 캠퍼스도 없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속상했다. 누가 나에게 어느 대학에 다니냐고 물어볼까 봐 걱정이었다. 사실 내가 사이버대학에 다닌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고 비웃을 사람도 없는데, 스스로 기가 죽어서 지냈다.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뒤늦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03년 12월 9일, 선교사인 부모님을 따라 생전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내 나이 열네 살이었다. 목적지는 아프리카였는데, 마치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아는 아프리카는 만화 라이온 킹에서 봤던 세렝게티 초원과 동물들과 자유롭게 어울려 노는 정글의 왕 타잔이 전부였기 때문에 ‘나도 타잔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나이지리아로 떠났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나이지리아의 라고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매연으로 가득 찬 뿌연 하늘은 내가 상상한 초원이나 정글과는
작년 2월, 코로나는 평화롭던 일상을 침범했다. 대학 새내기였던 나는 학교에 갈 생각에 들떠 있었으나, 비대면 수업으로 자연스레 그 기대감은 사라졌다.이 시기에 엄마는 치킨집을 여셨다. 이미 예약금을 걸어둔 터라 시국이 좋지 않아도 장사를 시작해야 했다. 사실 당장 치킨 가게를 운영하는 것 말고는 금전적 벌이를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장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온라인으로 전환된 수업 덕분에, 나는 가게 일을 도울 수 있었다.몸 쓰는 일을 처음 해보는 엄마의 팔엔 기름 튄 자국이 무성했고, 아르바이트가 처음인
나는 2020년에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고 불리는 말라위로 해외봉사를 왔다. 오기 전에 나는 집과 학교 아니면 다른 곳에 가지 않는 집돌이로 살았다. 성격도 소심하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하고 변화 없는 하루를 보내는 내 모습을 볼 때, 답답하기도 하고 삶의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움을 불어 넣어줄 환경으로 가서 내 삶이 바뀌길 바랐다.그러던 중 친구가 추천해준 ‘해외봉사’는 내가 기다려온 기회 같았고, 졸업을 앞둔
서부 아프리카에 위치한 코트디부아르는 그 대륙에서 선진국으로 손꼽힌다. 그리고 그 나라의 중심에는 최대 도시이자 경제 수도인 아비장Abidjan 시市가 있다. 2년 전 한국을 방문한 로베르 뵈그레 맘베Robert Beugré Mambe 아비장 시장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아비장 시청사에서 인터뷰가 이루어졌다.그러나 인터뷰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맘베 시장은 3월 6일에 있을 국회의원 선거를 준비하느라 유난히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고, 두 달이 조금 넘는 기다림 끝에 3월 11일 약속이 잡혔다. 약간의 긴장감이 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