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당초 남태평양에 위치한 ‘피지’로 해외봉사를 가고 싶었다. 아름답고, 청정한 그곳에선 코로나에도 자유롭게 해외봉사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비자가 나오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푸에르토리코라는 나라를 가기로 했다.푸에르토리코라는 나라가 무척 생소했던 나는 인터넷에 하나씩 검색을 했다. 그때마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거칠다.” “대체로 사람들이 차갑다.”라는 평이 많이 보였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낯도 많이 가리는데, 괜히 이곳으로 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미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20세기 들어 빠르게 발전한 산업 그리고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어느 나라보다 앞서는 세계 최강국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삶은 굉장히 부유하고 풍요로울 거라고 생각했다.‘우리나라보다 훨씬 선진국인 미국에서 봉사할 일이 있을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는데 의외로 프로그램이 많고 다양했다. 봉사를 하는 동안 행복했다는 선배 단원들의 마음을 나도 똑같이 느껴보고 싶어서 미국으로 해외봉사를 지원했다.고층빌딩이 빼곡히 솟아 있는 뉴욕 맨해튼의 전경, 눈부시게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미국에 가서 보니 ‘이래서
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는 남학생, 너도나도 손을 힘차게 들고 있는 아이들, 이런 모습을 뚫어지게 보는 또 다른 아이들…. 3월호 표지 사진은 이런저런 호기심을 자아낸다. ‘저 남학생이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하는 걸까?’ ‘아이들은 무슨 발표를 했을까?’ 이 사진의 주인공은 지난해 우간다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하경훈 씨다. 그가 어떤 인연으로 사진 속 아이들을 만나게 된 것인지 따라가 보자. 봉사 기간이 끝나가는 무렵, 나와 단원들은 우간다의 ‘라카이’라는 지방으로 마지막 체험 여행을
바르게 사고하지 못하고 떠오르는 생각에 사로잡혀 불행을 끌어안고 살았던 김효은 씨. 해외로 봉사를 갔을 때 처음으로 그런 자신을 바로 보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듣고 배우고,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나에게는 아주 고질적인 버릇이 있다. 쉽게 포기하고 주저앉으면서 ‘나는 불행한 사람’으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오랜 시간을 불행한 사람으로 살았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해 이직이 잦으셨던 아버지,
한자에게 굿바이 인사를 했던 내가 중국어과를?내가 처음 한자를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우리 학교는 수능을 마친 고3 학생들에게 별도로 ‘졸업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이때 시험 과목이 영어와 한자였다. 나는 ‘유종의 미’를 거두겠노라며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림처럼 생겨서 독음에 뜻까지 외워야 하는 한자가 너무 어려웠다. 결국 나는 졸업시험 중 한자 시험은 꼴등을 했고,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 한자에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라는 굿바이 인사를 남겼다. 그러나 그후,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수능 점수에 맞춰 지원
인생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를 맞은 사람들이 있다. 그 지점은 첫 취직일 수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을 발견한 때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도움을 얻었을 때가 되기도 한다. 어떤 계기이든, 그때부터 삶의 방향과 의미가 달라진다. 기자는 많은 사람들이 터닝 포인트로 꼽는 것 중 하나가 ‘해외봉사’라고 생각한다. 해외봉사를 떠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을 하고, 전혀 다른 문화를 영위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 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이번에 만난 이규환 씨도 그랬다.
짐바브웨는 그곳 현지어로 ‘돌집’이라는 뜻이다. 이름처럼 짐바브웨에는 다양한 돌과 자연이 어우러진 곳이 많다. 표지 배경인 ‘락뷰 Rock View’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파란 하늘 아래 큰 돌, 작은 돌, 모난 돌, 긴 돌…. 다양한 모양의 돌이 한 곳에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짐바브웨 해외 봉사단원인 전영조, 한규민, 이은오 씨는 그곳의 돌들이 꼭 자신들의 모습 같다고 했다. “한 사람씩 보면 뾰족한 돌처럼 모나기도 하고 부서진 돌들처럼 약하기도 하지만,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함께할 때 생각지 못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6배인 페루는 고산지대, 사막, 아마존 정글, 바다 등 다양한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나라다. 해외봉사단원인 이은지, 이하은 씨는 페루의 지방 도시로 봉사를 다니며 여러 문화를 체험하고, 동시에 좀 더 넓은 마음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침보테’와 ‘이카’ 지역에서의 소중한 추억을 잊을 수 없다는 두 사람. 그들의 봉사 라이프를 소개한다. #침보테Chimbote못해도, 행복할 순 있잖아글 이은지한국에서 페루로 온 뒤 우리는 줄곧 수도 ‘리마’에서 생활했다. 그리고 리마에 조금 적응할 즈음 이곳저곳
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다해야, 너는 왜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이 말을 들은 나는 억울하고 분했지만,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학창시절, 내 삶은 무미건조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나는 5살 때부터 ‘*신증후군’이란 병으로 병원에서 살다시피 했다. 평소보다 조금만 피곤하거나 정해진 음식 외에 다른 음식을 먹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이 풍선처럼 부어올랐다. 그래서 우리 집 냉장고에는 늘 내가 먹어야 하는 약이 가득 차 있었고,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쌀밥이나 소금기가 있는 반찬은 볼 수 없었다.*신
초등학교 시절, 방과 후 나의 일과는 엄마와 가정통신문을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간혹 설문지가 나올 때면, 나는 글 쓰기에 서툰 엄마를 위해 사전을 펼쳤다. 엄마가 말하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주면, 엄마는 그걸 보고 따라 쓰셨다. 그 일을 마치면 나는 엄마와 함께 밖으로 나가 폐지를 주워 고물상에 팔았다. 엄마는 막내딸인 나를 무척 사랑했고, 나 또한 엄마랑 손을 잡고 걸으며 장난치고 웃는 그 시간이 좋았다.어느 날, 엄마와 폐지를 줍고 돌아오는 길에 반 친구를 만나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다음 날 나는 평소처럼 등교를
지난 달, 어느 방송에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푸에르토리코 용사들의 근황을 소개했다. 뉴스 내용에는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청춘을 헌정한 참전 용사들을 한국의 대학생들이 찾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아흔 살이 넘은 그분들이 한국에 왔을 때의 나이 정도로 보이는 청년들이 푸에르토리코까지 봉사를 가서 감사의 시간을 가졌다는 게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뉴스에서 본 청년들과 연결이 되었다. 푸에르토리코 곳곳을 다니며 한국을 알리는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전한다. Q. 한국전쟁 참전 용
토요일 오전 7시, 브라질 상파울루 주의 어느 골목길에서 표지 촬영을 시작했다. 상점도 열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7월호 표지의 주인공인 ‘하다싸’와 ‘알레’의 표정은 한껏 빛났다. 두 사람은 ‘글로리아 밴드’의 멤버이다. 이들은 음악이나 영상을 제대로 배운 적은 없지만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매달 뮤직비디오 클립을 하나씩 만들고 있다. 두려움과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적게나마 행복과 미소,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라고. 사진 촬영을 마친 두 사람을 온라인 화상 채팅 줌에서 만났다. Q. 12시간의 시차에도
“봉사의 꽃은 현지 체험이야!”“아프리카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순수하고 아름다워!”아프리카로 해외 봉사를 다녀온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아프리카에 매료되었고, 주저 없이 아프리카로 해외 봉사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서 ‘베냉’을 선택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처음 베냉에 도착해서 간 곳은 ‘코토누’라는 도시였다. 수도와 멀지 않아 도로가 잘 포장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코토누에는 한국인 지부장님이 있어서 아프리카임에
“어머, 너는 어쩜 이렇게 밝아?”나는 쾌활한 성격 덕에 어릴 적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되었다. 나를 처음 보는 어른들은 밝은 성격을 칭찬하시곤 했다. 공부에는 썩 소질이 없었지만 발표를 잘해 많은 상을 타기도 했고, 긍정적인 성격 덕에 웬만한 어려움엔 잘 넘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1월,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캐나다로 해외봉사를 떠나면서도 걱정이 없었다. 물론 낯선 나라에서 단체생활을 하며 지내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맡은 바 최선을 다해 완벽한 봉사활동을 하고 오겠다고 다짐했다.아토피
2005년에 우간다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김형진 씨는 그곳에서 지낸 1년 동안 다른 사람을 돕는 기쁨, 사람들에게서 받는 사랑과 감사가 얼마나 행복한지 느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그때의 행복을 잊지 못했고, 2009년에 다시 우간다로 떠났다. 우간다에서 지낸 지 벌써 1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곳에서의 삶은 한국에서 살았다면 해보지 못했을 일들로 가득 차 있다. 먹는 것과 씻는 것도 그렇지만 쉽게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오지로 봉사하러 다니면서 여전히 새로운 일들을 하고 지낸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하는 데
나는 2020년에 ‘아프리카의 따뜻한 심장’이라고 불리는 말라위로 해외봉사를 왔다. 오기 전에 나는 집과 학교 아니면 다른 곳에 가지 않는 집돌이로 살았다. 성격도 소심하다보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게 더 편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하고 변화 없는 하루를 보내는 내 모습을 볼 때, 답답하기도 하고 삶의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순간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움을 불어 넣어줄 환경으로 가서 내 삶이 바뀌길 바랐다.그러던 중 친구가 추천해준 ‘해외봉사’는 내가 기다려온 기회 같았고, 졸업을 앞둔
부족한 제 모습에 또 다시 자책하고 있을 때, 베냉 사람들은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제게 큰 사랑을 주었고, 저는 그 힘으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습니다.비극은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 있다가 예고도 없이 찾아옵니다. 그날도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저는 졸린 눈을 비비며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휴대전화 너머로 ‘쾅!’ 하는 굉음이 들리더니 친구와 통화가 끊어졌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주변에 무슨 일이 났나보다’ 생각하며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야? 내일 연락줘.”하지만 다음 날 친구에
한국에서 저는 부족함 없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스스로 벌어서 썼습니다.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남들 다 걱정하는 등록금 걱정 한 번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가족 관계와 교우 관계도 좋았고, 나름 해보고 싶은 것, 경험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만족스럽게 살았습니다.그러다 25살에 브라질로 해외 봉사를 갔습니다. 평소 배우던 운동 때문에 브라질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마침 해외 봉사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지원했습니다. 브라질에 있으면서 처음엔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냈습니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릴 만큼 빼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에스와티니. 저는 작년 한 해 그곳을 다녀왔습니다. 제게 에스와티니가 특별한 이유는 ‘행복하다’ ‘아름답다’와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느낄 수 없었던 저에게 ‘행복’을 느끼게 해준 진짜 아름다운 나라이기 때문입니다.저에게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빠’라는 아픔이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아빠를 가장이라고 부르지만, 제게 아빠는 기댈 수 없는 존재,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감추고 싶은 존재였습니다.저는 아빠를 우리 가족을 불행으로 이끄는 장본인이라고 생각하며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캐나다로 해외 봉사를 떠나며 열심히 활동해서 1년을 정말 멋지게 보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결심이 무너지게 되었는데요. 바로 ‘인디언 캠프’라는 행사를 진행할 때였어요.캐나다 봉사단 지부에서는 해마다 인디언 마을을 찾아가 며칠 동안 머무르며 청소년들에게 꿈과 소망을 전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큰 행사인 만큼 저도 밤낮없이 열심히 인디언 캠프를 준비했어요. ‘애들이랑 이런 놀이를 해야지, 이런 아카데미도 해야겠다!’ 그런데 행사 당일이 되자, 제 계획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거예요. 아이들이 계속 뛰어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