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에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도 함께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그는 스무네 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EMI클래식에서 데뷔 음반으로 발표했으며, 그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과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몇 년 걸린다는 전곡 녹음을 그는 단 29일만에 해내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코로나19로 줄곧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만나기로 했지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없고,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고통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저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버려졌고, 생후 6주 만에 입양되었습니다.제가 4살 때 부모님은 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슈바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Shwachman.Diamond syndrome 골수 기능 이상에 따른 혈구 감소가 나타나는 매우 드문 유전질환) 제가 걸린 병명을 아는 데에만 4년 반이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병원 간이침대에서
누구든지 인생에는 저마다의 ‘에베레스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에베레스트는 꿈, 혹은 크고 작은 목표 등 우리가 살면서 이루고 싶은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꿈을 이루기 위해 그 산을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리고 꿈을 이루는 진정한 기회는 위기가 바뀌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저는 어릴 적부터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좋았습니다. 12살이 되던 해에 집을 떠나 콜롬비아 국경의 아마존 강 유역으로 가서 브라질, 페루, 에콰도르 등을 탐험하며 지냈습니다. 저는 스무 살에 집으로 돌아왔고, 그 여행에서 자연의 소중함
13살 때 보디빌더였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체육관에 갔다가 복싱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시합이 두렵기도 했지만 첫 경기를 ‘넉아웃’으로 이기며 복싱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복싱을 하면 할수록 즐거웠습니다. 하지만 공부와 권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오자 가족들은 공부를 하라고 했습니다. 권투는 여성을 위한 스포츠가 아니라며, 성공할 수 없을 거라고 했죠.‘아니야, 성공할 수 있어!’ 하고 오기가 생겼습니다. 다행히 중미 지역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 등록금을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선발전에 나
제 아버지는 25년 동안 약사였습니다. 정말 평범한 분이셨죠. 하나만 빼고요. 아버지는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분이셨습니다. “내가 갈게.” 하면 꼭 나타나는 사람. 완벽한 사람은 아니어도 약속 하나는 꼭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2011년에 의사였던 아버지 친구가 전화해서 아버지가 암 말기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호전되는 듯하다가 곳곳으로 전이돼 아버지는 2012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 장례식 때 제가 추도 연설을 했는데, 아버지를 계속 생각하면서 떠오른 것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추도 연설 제목도 “내가 하겠다고 했
선수 시절, 저의 가장 큰 무기는 ‘끊임없는 연습’이었습니다. 농구는 체력이나 기술뿐 아니라 사고가 필요합니다. 제가 연습을 정말 많이 하던 시절에는 경기 중에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해, 경기 장면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결정적인 슛을 날릴 수 있었습니다. 스카티 피펜(토털 패키지라 불리던 전 NBA 농구 선수)도 저를 막을 수 없던 그 시절, 저는 기본을 지키고 계속 훈련하면서 마인드를 컨트롤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에 예상치 못한 문제를 만납니다. 구소련과 경기 중
작년에 가 3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번 여름이 아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많은 팬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처음 인어공주의 에리얼 역을 맡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사랑받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그 당시, 그러니까 34년 전이죠. 저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러 다녔습니다. 1년 3개월 동안 브로드웨이에 캐스팅이 되기까지 쉬지 않고 오디션을 보았습니다. 그때 본 오디션 중 하나가 인어공주였죠.요즘 학생들은 카세트테이프를 잘 모르겠지만, 거기에 제 목소리를 녹음해서 프
제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의사가 초음파로 진단한 뒤 부모님께 이야기했습니다.“이 아이는 헨하트 증후군(Hanhart Syndrome 선천적으로 발달하지 않은 사지나 장기를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적 장애)을 가지고 있어서 팔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병을 가진 아이들은 30%만 살고 나머지는 죽었습니다.”“부정적인 것에 착념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아요.”그때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셨고, 저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전 어릴 때부터 혼자 옷을 입다가 넘어지곤 했습니다. 부모님은 저를 높은 의자에 혼자 앉혀 놓고 시리얼을 먹
지난해 필리핀에서 1년 간 해외봉사를 하고 돌아온 김은빈 씨.그는 필리핀에서 4개월간 '마인드 강사'로 50회 강연을 했고, 5천여 명이 그의 강연을 경청했다. 그는 해외봉사를 떠난 것이 인생에서 '신의 한 수'라고 말한다. 29살 평범한 회사원이 뒤늦게 해외봉사를 떠난 이유가 있나요?저는 대학 졸업 후 1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회사에서 승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을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쳐갔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라는 고민만 깊어졌어요.
축구는 제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축구선수로 활동하며 돈을 벌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그 시간들이 ‘인생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유익한 삶의 교훈을 배울 수 있는 긴 여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코트디부아르에서 태어났지만, 6살 때 축구선수였던 삼촌을 따라 프랑스에 가서 성장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며, 성공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피
피지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충실히 하는 가운데, 그는 한국의 좋은 장점들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고 살 만큼, 그가 한국에서 만족하며 사는 삶은 어떤 것일까? 나는 주한 피지 대사로 임명을 받아 2018년 9월에 한국 땅을 밟았다. 외교관으로서 첫 부임지였다. 오세아니아에 호주와 뉴질랜드를 제외한 14개의 섬나라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국에 외교 공관을 두고 있는 나라는 피지와 파푸아뉴기니 두 나라뿐이다. 절대적인 크기로 봤을 때는 작은 나라이지만 피지는
막내아들로 부러울 게 없이 살던 그가 어쩌다 아버지가 되었다. 가장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환경미화원 시험에 도전하는데 자기가 쓰는 감동의 자기 이야기나는 딸만 넷인 집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니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나를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셨고, 어떤 잘못도 감싸 주셨다. 나는 하기 싫은 것은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하며 하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정말 편하게 살아온 것이다.꼭 그것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 나의 습관 속에 공부도 포함되어 나
현대 사회는 가족 구성원이 단출해지고 있다. 1인 가족도 늘고 있다. ‘유재하·신미라’ 부부도 1년 전엔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핵가족이었다. 그런데 남편 유재하씨가 귀농을 결심하면서 지금은 충주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처음 귀농 소식을 주변에 알렸을 때 사람들이 유재하 씨에게 가장 많이 했던 질문은 “어떻게 아내를 설득했어?”였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신미라 씨 또한 처음부터 귀농이 반갑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귀농을 택했고, 지금은 남편이 무척 고맙다고 말한다. 그들의 시골 생활은 어떨까? 신미라 씨의 시점으로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즐겨 푸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의 고향 진주에서는 다들 그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할 거라고 확신했지만, 정작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취업의 길로 눈을 돌리려던 그때, 국세청에서 ‘국립세무대학’을 설립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생들에게 4년 학비 전액과 생활비까지 지급하는 등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당시 세무대학의 경쟁률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어렵지 않게 입학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재정학, 세법, 회계학 등 남들은 이해하
사회적 규제, 도덕교육으로 청소년들의 자살, 범죄, 중독 등의 문제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증가추세로 지속되자 그 대안으로 마인드교육이 세계적으로 급부상하였다.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면 미국, 중남미와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에서 마인드교육이 곧 시행될 예정이다. 그 나라의 교육관계자 및 교사들이 자국에서 마인드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연수를 받으러 한국을 찾았다. 마인드교육의 학습 과정과 시행 효과를 알고자 먼저 학습자의 위치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이다. 마인드교육은 학습자의 실질적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기에 연수를 받는 사람들에게 상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글과 사진 중심의 정보를 전달하는 블로거들이 한창 인기를 끌더니, 이제는 일상을 영상에 담아 공유하는 유튜버들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유튜버 스타 크리에이터들은 100만 명 이상의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어서 그들이 제작한 영상의 파급력이 상당하다. 그런 그들과 함께 영상을 제작하며 ‘누구나’ 자신의 영상을 찍을 수 있다고 알리는 영상 감독이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제작하고 싶다는 신보석 영상 감독을 만났다.31살에 그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으며, 아내 그리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 3명 중 1명 꼴로 한부모 가구 자녀라고 한다. 한부모 가족 비중이 커졌지만, 이들을 위한 정서적 교육이나 상담은 부족한 상황이다. 그 중 유년시절 부모의 불화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결혼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자신감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 상처는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 아물 수 있다. 이번 칼럼의 주인공은 8년차 주부 이은아 씨다. 그녀가 어떻게 어린 시절의 불행했던 기억에서 벗어나 가족을 꾸리며 따뜻하게 살고 있는지 1인칭 시점으로 소개한다.
로날드 일등서기관은 원래 사업가였다. 볼리비아의 자연수엔 석회질이 많아 그냥 마실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을 사 먹는데, 그는 이런 점에 착안하여 24살부터 산타크루스에서 ‘OK Water’라는 브랜드로 생수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꽤 대중화되어 잘 많이 팔리는 상품이지만, 처음은 그렇지 않았다. 초기에 그는 무거운 물통을 들고 유명한 가게부터 소박한 가정까지 모든 대문을 두드리며 물을 소개했는데, 이렇게 방문판매를 하는 것이 매우 창피했다고 한다. “가끔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어요. 만나는 사람
‘4월 15일, 장애가 있는 고객이 주문한 차가 하루 일찍 출고되었다. 쉬는 날임에도 나는 일을 나섰다. 고객분은 차를 나중에 갖다 줘도 괜찮다고 했지만, 하루라도 빨리 차를 타는 게 얼마나 좋을지를 알기에 지체하지 않았다. 그 길에 아내도 동행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이라 가는 내내 봄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새 차를 타고 아름다운 길을 달리니, 쉬는 날에 일을 하는 것도 괜찮은 듯하다. 고객도 연신 고맙다며 행복해하셨다. 그분만 아니라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오랜만에 나들이를 다녀온 행복한 하루였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문제를 만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로 인해 우리가 겪는 좌절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서가 아니라, 생각에서 이미 불가능한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절망에서 행복으로 변화를 이루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보통 사람들처럼 문제 앞에서는 나약한 사람이지만, 먼 곳이 아닌 마음 안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았다는 점이다. 회사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오늘도 바쁘게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각자가 가진 마음의 세계 안에서는 기쁨을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