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만 구독자를 보유한 유튜브 크리에이터’, ‘AP통신, BBC방송국이 주목한 인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 표창 수상’, ‘유튜브 CEO가 직접 한국까지 와서 만난 인물’, ‘자서전과 요리책 두 권의 책을 출간한 저자’, 이 모든 타이틀의 주인공은 73세 박막례 할머니이다. 늘 새로운 것에 거침없이 뛰어들어 ‘도전하는 삶’의 아이콘이 된 할머니. 73세에 세계 여행이라는 색다른 꿈을 꾸며 손녀와 열심히 유튜버로 활동 중이다.고단한 세월을 걸어오다 어느새 70대가 된 박막례 할머니, 삶의 변화의 시작은 병원에서 받은 치매 위험
퇴근길 꽉 막힌 도로를 지나 경기도 양주에 자리하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센터’를 방문했다. 그곳에서, 만 18살이 되어 아동양육시설에서 나온 안지안 씨와 그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조한나 씨를 만났다. “오느라 고생 많으셨죠? 식사는 하셨어요?” 조한나 씨의 물음에서 따뜻한 배려가 느껴졌다. 얼굴의 반을 마스크로 가린 채 진행된 인터뷰였지만, 두 사람의 말간 얼굴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기자가 본 그들은 친구이자, 자매이자, 인생의 선후배 같았다. Q.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요?조한나: 저와 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대학교 1학년 때까지, 나의 지난 시간은 기나긴 밤과 같았다. 어릴 적부터 소심하고 행동이 느렸던 나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 느린 내가 싫었다. 그럴 때마다 내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분은 부모님이었다. 엄마는 몸이 불편했지만 막내딸인 나를 무척 사랑하셨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엄마와 나란히 걸어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면 잠시 엄마와 떨어져 걸었다. 엄마에게 너무 미안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시는 부모님에게 내가 상처를 주다니….’ 스스로를 자책했고, 미워했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
유난히 추웠던 날, 소방관 권세준 씨를 만나러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위치한 소방서를 찾았다. 야간 근무를 마친 뒤 잠깐 단장하고 나온 그가 노곤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환한 미소로 진지하게 고민하며 질문에 답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질문을 들으니 생각하게 되네요.”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았다.그는 20대의 대부분을 무얼 하면서 살지 고민하고 선택하고 방황하면서 보냈다.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어떤 일을 할 때 심장이 뛰고 즐거운지 알게 됐다며, 갈팡질팡하며 보낸 시간에 고마움을 전했다
갑작스러운 시작고등학생 시절 나는 누구보다 씩씩한 학생이었다. 운동도 곧잘 했기 때문에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시작됐다. 심한 두통 탓에 음식도 먹는 대로 게워냈다. 증상이 점점 심해져 병원에 찾아가 척수염이란 진단을 받았다. 뇌와 팔다리의 신경을 관장하는 척수에 염증이 생겨서 몸에 마비가 오고 감각을 잃어가는 병이다. 병마는 순식간에 내 몸을 덮쳤다.이마의 세로 3cm를 제외하고 모든 신경이 마비됐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없고, 한쪽 시력과 청력도 잃어갔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2020년은 코로나를 빼놓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한 해다. 나는 대구에서 치위생사로 일하고 있다. 평소 여느 사람들보다 건강에 대한 걱정이 많은 편이라 코로나바이러스가 발생하자 누구보다 재빨리 마스크를 썼고, 손이 건조해질 정도로 부지런히 씻었다. 주변에서 “너는 절대 안 걸리겠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3월 나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 감염 위험을 피해 카페 대신 갔던 친구의 집에 코로나 확진자가 있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나와 함께 있었던 친구들이나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모두 정
이지은 씨를 만나기 위해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대안학교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학교 정문을 지나 교무실로 가는 길에 만난 학생들은 처음 보는 기자에게 하나같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인터뷰가 시작되고, 호기심 가득한 학생들이 교무실 창문으로 고개를 삐죽삐죽 내밀었다. 촬영이 시작되자 “선생님 이뻐요!” 하는 응원 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예쁘네요.”라고 하자 이지은 씨는 웃으며 “그래서 제가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어요.”라고 답했다. 대안학교 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 적 없다는 26살의 초보 교사, 어릴 적에 별다른 꿈이 없었던
1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것 같다. 나는 한 중소 광고회사에서 2년차 사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전공했던 분야는 미디어 아트였지만, 이 회사에서 우리 팀이 주로 하는 업무는 시나리오, 제안서 작성 등이었다. 그런데 올해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면서, 우리 회사 사정은 점점 어려워졌다. 1차 구조조정이 이루어졌고, 곧바로 2차 구조조정이 있을 거라고 했다. ‘설마 나일까?’ 생각했다. 그런데 3월 어느 평일 오후, 부사장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셨고 권고사직을 언급하셨다.그 당시에는 담담한 것 같았지만, 이후 일주
남녀노소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공통되는 사실이 있다. 홀로 아픔을 겪을 때 괴롭다는 것, 배고플 때 한 끼 밥에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 마음이 맞는 사람과 대화할 때 즐겁다는 것 등등. 최근 안동 깊은 산골 과수원에서 휠체어를 탄 남편과 아내가 잘 익은 사과 향기보다 더 진한 행복을 느끼며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부부가 사이 좋게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 궁금해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산이 좋았던 우리가을 냄새가 짙게 풍기는 11월 초, 반정현 안순영 부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빨강, 노랑 등 가을 색이
Interview다큐멘터리 촬영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 이른 아침에 그와 인터뷰가 이뤄졌다. 자가격리 2주 동안 호텔 방에서 5백 페이지 분량의 주인공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그는 줄곧 영상만 생각했다. 밥을 먹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이 장면이 여기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계속 떠올랐다. 일 잘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그도 마음을 단순하게 정돈하고 정신을 몰입해 촬영에 임했다. ‘한국 출장을 한마디로 말한다면?’이라는 질문에, 다큐에 담아내고 싶었던 최고의 주인공을 만났고, 그를 통해 꿈에 그리던 ‘따뜻한 감동’을 이루었
한국에 대한 기억이 많진 않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추억이 하나 있다. 그때 나는 아빠와 함께 동대문시장에 놀러갔다가 아빠 손을 놓치는 바람에 한참을 혼자 울고 있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아빠는 펑펑 울고 있는 나를 달래기 위해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주셨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많은 아이스크림을 홀랑 다 먹고 배탈이 났고,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터졌다. 이게 내가 가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국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다.6살 때, 어머니의 나라 몽골에 왔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진정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가 있어야만 성공한 인생이다’라고 표현할 만큼 우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는 우정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번째는 ‘자기 이익을 위한 우정’, 두 번째는 ‘단순한 즐거움을 위한 우정’ 세 번째는 ‘완벽한 우정’이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완벽한 우정이란 즐거울 때든 슬플 때든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으며, 나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리란 믿음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에 근거한 ‘완벽한 우정’을 가진 두 사람, 세븐디그리 건축사무소 권혁천 대표와 오충환 과장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전 세계에 코로나19의 여파는 멈출 줄 모르고 있다. 그 폐해는 경제적으로 낙후한 나라에 더 매섭게 몰아친다. 일해도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자리까지 잃는 이때에, 미얀마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고 싶다는 한국인 강사가 등장했다. 현지인 수준으로 미얀마어를 구사하는 이은정 씨는 지난 5월부터 페이스북에 마인드강연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다. 처음에는 조회 수가 1, 2만을 오락가락하더니 얼마 전에 올린 영상은 조회 수가 순식간에 70만을 넘겼다. 그는 왜 이런 일을 하고 있을까? 미얀마에 거주하는 그와 영상채팅으로 인터뷰를 진
‘친구란 무엇일까? 인생에 친구는 꼭 필요할까?’ 라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그리고 인터뷰를 하며 답을 찾았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힘은 강력하다. 때론 이끌어주고, 변화를 만들고, 각자의 삶을 탐험하며, 따뜻한 요람도 된다. ‘친구’라는 단어가 살아 있다면, 이 둘이 아닐까? 같은 사고를 당하며 ‘소울메이트’라는 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된 문혜진 씨와 이선미 씨를 소개한다. 안녕하세요.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의 첫인상이 기억나시나요?혜진: 가나로 해외봉사를 간 50명의 단원 중 저와 동갑
실력은 좋지만 환자들에게 호통 치는 의사선생님, 좋은 선생님일까? 나쁜 선생님일까?나는 오랜 세월 병을 달고 살았다. 태어나 첫돌도 안 되었을 때에 급성패혈증을 앓아 코와 귀의 기능이 많이 망가졌고 만성 비염과 중이염에 시달려야 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 병원 저 병원 추천해줬지만 모든 병원에서 나는 완치할 수 있는 길이 없는 특수한 경우라고 결론지었다.한쪽 귀는 거의 들리지 않고 다른 귀에도 진물이 계속 생겨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찾아가 진물을 빼주어야 했다.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기 일쑤였고, 내게 유일하게 희망을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에티오피아 카페 안엔 사람들이 넘쳐난다. 한국 돈으로 500원을 카페에 내고 카페 안 작은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자기 팀을 열렬히 응원한다. 거리에 빈 깡통만 있어도 동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축구를 시작한다는 에티오피아. 그곳에서 축구를 가르치기 위해 1년 간 교육봉사를 다녀온 박성민 씨를 만났다. 현재는 한국으로 돌아와 보안 전문 회사에 다니며 대기업 임직원들의 의전을 담당하고 있다는 박성민 씨. 축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를 만나본다. Q. YTN 뉴스에 에티오피아
‘굿뉴스월드’ 사무실에서 홍석영 씨를 만났다. 서울시 양재동에 위치한 사무실은 정답고 아담했다. 평범한 회사원을 꿈꿨던 그가 필리핀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 택한 직장은 ‘국제 개발 협력 NGO’였다. 특별한 사명감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살면 자신도 행복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실제로는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신입사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분투했던 그녀의 4년 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NGO(비정부기구) 활동이 많은 제약을 받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에
학창시절, 나는 피아노가 좋았다. 한때 나는 ‘세계 최고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에 피아노를 전공하기 위해선 열심히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고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그런 내 열심에 하늘이 감동했을까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운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미국으로 유학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정말 쉴 틈 없이 살며 대학을 졸업했다. 나도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원을 가고 싶었지만 여건이 좋지 않아 포기했다. ‘그 다음엔 뭘 해야 하지?’ 쉽게 답이 떠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에 클래식 음악 축제가 열렸다. 거기에는 세계가 주목하는 젊은 피아니스트 임현정도 함께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그는 스무네 살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EMI클래식에서 데뷔 음반으로 발표했으며, 그 음반이 빌보드 차트 클래식 부문과 아이튠즈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보통 몇 년 걸린다는 전곡 녹음을 그는 단 29일만에 해내 ‘천재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코로나19로 줄곧 한국에서 머물고 있는 그녀가 아주 오랜만에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뷰를 청했다. 처음에는 만나기로 했지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이 없고,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통 없이 살고 싶어하지만, 고통에 대해 알아야 할 게 있습니다. 저는 원치 않는 아이로 태어나 버려졌고, 생후 6주 만에 입양되었습니다.제가 4살 때 부모님은 제가 여느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슈바크만 다이아몬드 증후군’(Shwachman.Diamond syndrome 골수 기능 이상에 따른 혈구 감소가 나타나는 매우 드문 유전질환) 제가 걸린 병명을 아는 데에만 4년 반이 걸렸습니다. 어머니는 매일 밤 병원 간이침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