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코로나로 온 세계가 멈춰 있을 때 남다른 선택을 한 젊은이들이 있습니다.166명의 굿뉴스코 해외봉사단원이 그들입니다.얼마 전, 한국에 돌아온 단원들이 그곳에서 받아온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았더군요. 떠올리기만 해도 벅차오르는 추억과 경험을 여러분께 전달해 드립니다. 편집자 주 무너진 꿈을 일으켜, 우크라이나에 용기를해외봉사를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다.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많은 우크라이나 난민을 받았고, 오펜바흐에 있는 우리 지부 또한 70여 명의 난민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크라이나에서 만든
나는 중국에서 태어나 자랐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근무하고 계시는 회사를 따라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 할아버지가 한국인이셨기에 한국어를 조금 할 줄은 알았지만, 수업을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반 친구들의 세심한 배려와 도움으로 점차 학교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고 그때 처음으로 ‘언어’에 대한 흥미가 생겼다. 이후, 영어의 매력에 푹 빠진 나는 대학을 영어학과로 진학했다. 입학하던 해, 나는 누구보다 열정이 넘치는 학생이었다. 국제개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학과 공부도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나는 2월에 미국으로 해외봉사를 떠난다. 가족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나도 해외봉사를 하러 가야겠다.’라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가려고 준비를 시작하니,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가고 싶지 않았다. 해외봉사를 가기 위해선 3차례의 워크숍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너는 어느 나라로 가고 싶어?”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어느 나라든 가고 싶지 않아서 “아직 어디로 갈지 모르겠어.”라며 답을 피했다. 그런데 마지막 워크숍 때, 나는 어느 나라든지 해외봉사를 꼭 가고 싶어졌다. 마지막 워크숍에서 나는 프로그램 진행팀을 도와 함
지금 아니면 언제?나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다. 화상으로 수업을 듣고, 사회적 거리두기로 학교에 가는 것도, 외출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학 문화를 즐길 틈도,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다. 대학에 다니기 위해 20년간 살아온 고향을 떠나 경기도로 왔지만,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무척이나 외로웠다. 점점 우울감에 빠져드는 나를 보며 엄마는 해외봉사를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다. 하지만 정작 나는 가고 싶은 마음 반, 걱정하는 마음 반이었다. ‘해외봉사 기간이 1년이던데, 그 시간에 적응할 수
새해를 맞이하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았다. 가장 떨렸던 순간을 꼽자면, 한 강연 대회에서 대상을 받던 날이다.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제 경험을 많은 분과 나눌 수 있어 기뻤습니다!” 2022년은 내가 생각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 해였다. 나의 삶을 소재로 강연하는 모습, 한국을 방문한 아프리카 에스와티니의 한 시장님과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 어른들을 먼저 찾아가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 등.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던 ‘나’에게 낯선 모습들이 포착될 때면 주변 사람들도, 나도 놀라곤 했다. 나에게 이런
지금은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고등학생 때를 돌아보면 나의 아침은 언제나 전쟁 같았다. 엄마는 매일 내게 “밥 먹고 가거라!”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시간이 없다고!”라며 되받아쳤다. 왜 그렇게 시간이 없었냐면, 눈뜨고 집 밖을 나설 때까지 화장과 머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다.나는 거울을 보며 외모를 가꾸느라 매일 아침 두 시간을 화장대에 앉아 있었다. 책가방에는 책과 필기구를 대신한 화장품과 작은 베개를 넣었다. 이 말은, 학교에서 공부하기보단 친구들과 외모와 관련된 이야기, 화장품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
형형색색의 풍선을 들고 싱그럽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주인공들. 이들은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새해를 맞은 봉사단원 최수희 씨와 그가 현지에서 만난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말라위에서 느낀 행복과 감사’를 풍선 하나하나에 힘껏 불어넣었다는 최수희 씨. 그 풍선 속 추억들을 풀어보는 심정으로, 그가 보내온 봉사 체험기를 읽어보았다. 직장인, 돌연 해외봉사 선언하다“수희 씨, 보면 볼수록 참 성실하고 싹싹해!”1년 전, 나는 순탄히 회사 생활을 이어가던 5년 차 직장인이었다. 신입사원 티를 벗고, 일은 어떻게 해
누구에게나 방황의 시기가 있다. 내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순간 말이다. 그럴 땐 잠시 멈춰 내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지만, 이상하게도 쉼표가 어색하다. 그때마저도 더 빨리, 더 높이 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만 같다.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에서 2년 6개월 동안 자원봉사를 한 문은영 씨도 그랬다.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했던 그는 해외로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으로 애초 예상했던 ‘1년’보다 더 긴 시간을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 ‘청춘은 아름다워라’에는 진정한 행복과 사랑을 찾아다니며 고뇌하는 한 청년이 등장한다. ‘청춘’이라는 단어 옆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동반한다.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미성숙하기에 쉽게 상처받고, ‘가능성’이 되려 묵직한 막막함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 그 젊은 날을 조금 특별한 곳에서 보내는 이들이 있다. 호주로 봉사활동을 떠난 8명의 대학생. 때론 고민과 후회 속에 빠지기도 하지만, 새로운 도전과 배움의 기쁨이 더 크다고 말하는 이들의 봉사기를 들여다본다.
이번 호 표지 촬영은 현지 시각 밤 9시에 시작됐다. 대낮처럼 훤한 북유럽의 백야 덕분이었다. 6월이 되면 핀란드에선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나타난다. 이때 핀란드에는 밤새 북유럽의 정취를 즐기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하지만 김예선 씨는 ‘백야 속에서도 숙면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한다. 자신을 ‘핀란드에서 즐겁게 생존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그는 여행객이 아닌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유학하러 왔던 핀란드에서 넓고 깊은 인생의 맛을 느껴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다. ‘언어도 충분히 배웠으니 한국
윤혜진 씨가 이번 호의 표지 주인공이 된 데에는 한 장의 사진이 주는 따스함 때문이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얼굴이 다 보이지 않았으나, 정지된 화면 안에서 아이들과 나누는 익살스럽고 사랑스러운 표정에서 행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혜진 씨의 찰랑이는 머릿결이 신기한 아이들은 그녀의 머리를 만지고, 만지고, 또 만지며 “한국 갈 때 꼭 이 머리카락 주고 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남동부에 위치한 에스와티니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온 그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한다.에스와티니를 다녀오셨다고 하는데 생소한 나라입니다.
이번 호 표지 주인공은 푸에르토리코에서 봉사활동 중인 김은진 씨다. 한 달 전, 그가 메일을 보내왔다. “저는 이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끔씩 부모님이 무척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함께 살아도 서로의 마음은 모르던 우리 가족이 지난해부터 조금씩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며, 점점 가까워졌거든요. 지금은 잠시 집을 떠나 있지만, 투머로우를 통해 부모님께 제 소식을 전하고 싶습니다.”라는 짧은 메모와 함께, 봉사 활동하며 배우고 느낀 점을 적은 한 편의 글이 첨부되어 있었다. 기자는 그가 전하고 싶은 소식은 무엇인지, 가족
굿뉴스코 페스티벌 행사 중 체험담 발표는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 참가자들은 카메라 앞에서 1년간 봉사하며 느꼈던 성취의 기쁨뿐 아니라 자신이 실수했던 일, 이를 통해 느낀 고마움 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중에 아프리카 우간다로 해외봉사를 다녀온 김예진 단원의 스토리를 소개한다.여러분 중, 어두웠던 마음이 한순간 밝아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나요? 저는 지난해, 우간다에서 한 친구를 만났을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어려서부터 제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진학 후에는 왼쪽 눈이 거의 보이지
페스티벌 프로그램 중에 박은유 씨의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흑백으로 시작한 영상엔 물총으로 사람을 겨눈 한 아이가 “지원 바람”을 외치자 여행 트렁크에 숨어 있던 다른 아이가 “7시 방향으로 출동”을 말하며 물총을 들고 뛰어나온다. 잠시 뒤, 두 아이에게 물총 공격을 당한 아주머니는 소리친다. “이놈의 자식들, 내가 너희들 가만히 안 둘 거야!” 무서운 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친 아이들은 뒤로 돌아 뛰어가며 “은유 형!”을 목청껏 부른다. 즐거워 보이는 장면 다음이 반전이다. 박은유 씨는 북받치는 듯한 감정을 절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영국과 스페인에서 온 해외봉사자들이 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코로나로 바깥 출입이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국행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 연락했고,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전주의 한 대안학교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었다.4명이라서 시끌벅적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조용하고 차분했다. 한국에 온 소감을 물으니 “가장 한국적인 도시가 전주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봉사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며 짧게 한국말로 대답했다. 때론 자원봉사자로서 뿌듯하다가도, 한국이라는 생소한 문화와 4명의 각기 다른 취향에 눈물짓기도 했다는 그들의
1년 전, 짐바브웨 출국을 앞두고 인터넷 검색을 해서 그 나라의 위치, 문화, 사회 전반에 관해 살펴봤다. 그때 내 눈에 가장 띈 것은 십여 년 전, 짐바브웨가 겪은 경제적 위기였다. 하루에도 몇 배씩 물가가 오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흔들리면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무척 안타까웠다. 나는 ‘작은 것이라도 도움을 주고 와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실제로 마주한 짐바브웨의 경제 상황은 여전히 좋아보이진 않았다. 매일 일을 하지만 월급이 너무 적어서 식료품을 구하는 것도 힘겨운 이들이 많았다. 한번은 짐바브웨의 수도를
잠비아로 해외 봉사를 떠났던 친구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원래 낯도 많이 가리고 대인관계도 원만하지 않았던 친구라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는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무척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부러웠다. 그 당시 나는 어머니가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순탄치 않은 군 생활 중이었다. 친구의 웃음을 보니 ‘저렇게 웃어본 적이 언제였나?’ 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그런 환한 미소로 웃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제대 후 친구가 다녀온 잠비아로 해외 봉사를 왔다.
대만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싱그러운 청량감, 순수한 학생들, 아기자기한 소품이 단연 돋보인다. 영상으로 본 ‘대만’은 내게 청춘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해외봉사 국가를 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중국어를 전공한 나는 빨리 대만으로 가고 싶었다.하지만 막상 대만에 도착하니, 밖을 나가지 못하고 건물 안에만 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대부분의 봉사활동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줌zoom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며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직접 대만을 만날 생각으로 가득찼던 나에겐 실망감이 컸다.다행히 4개월 뒤
답답한 온라인 수업, 쌓여가는 과제들… 대학 생활이 지루하고 재미없던 나는 삶에 변화를 주고 싶어 해외 봉사를 결심했다.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도미니카공화국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 계획과 달리, 그곳은 내 삶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식민통치를 위해 이주한 백인과 강제 이주된 흑인들이 수백 년 전부터 거주해오면서 백인, 흑인, 혼혈인 등 다양한 인종이 어울려 살아간다. 이런 역사와 관련된 관광지나 박물관도 많다. 나는 공대생으로 문화나 역사에 큰
페루에 가기 전, 나는 그곳에 ‘마추픽추’와 같은 산악지대가 대부분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만난 페루는 익숙한 도심 풍경이었다. 그러다 두 달 뒤에는 말과 당나귀를 키우고, 따듯한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시골 동네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어느 날엔 거대한 모래 사막지대가 펼쳐졌고, 어느 날엔 길게 뻗은 해안가를 마주했다. 다른 지방으로 옮겨갈 때면, 기온 차이 때문에 옷을 바꿔 입어야 할 때도 많았다. 페루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매우 다양한 모습을 가진 나라였다.그건 페루의 환경만이 아니었다. 그곳